사람은 인연이란 존재를 얼마나 믿을까. 옷깃만 스쳐 지나가도 인연이라는, 그리고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지 만난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게 허황된 말이란 생각에 아무런 감흥도 없어했던 시절이 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의 연은 돌고 돌아 제자리에서 만나게 된다는 말을 믿게 되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A라는 친구에게서 이런 얘길 들은 적이 있다. A는 아빠의 옛 사진을 보다가 그 사진 속에서 엄마를 발견한 적이 있다고 했다. 엄마와 아빠가 연인이란 이름으로 만나기 한참 전의 순간에 말이다. 중고등학생이던 둘이 가족과 함께 간 여행 장소에서 사진을 찍은 날. 훗날, 아빠의 사진 모퉁이에는 엄마가, 엄마의 사진에는 왼쪽으로는 아빠가 찍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를 발견한 어린 시절의 A는 자신이 태어난 걸 운명이라 말했다. 나는 모든 걸 다 동의할 순 없었지만 동감했다. 순간에 함께했다는 것만으로도 인연이 되었고, 연인으로 이어졌다. 나는 가끔 10년도 더 넘은 이 스토리를 종종 떠올리곤 한다. 알게 모르게 나를 스쳐 지나간 인연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어릴 땐 세이클럽이란 채팅이 유명했었다. 거기에서 우연히 '솜'이라는 친구를 만난 나는, 솜이에게서 '원'이라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다 대학생이 되고 기숙사에서 우연히 원이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 셋은 한 기숙사 건물에 배정이 됐다. 나는 첫눈에 솜이를, 그리고 원이를 알아봤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네가 원이구나!라고 외치던 나를, 원이는 아직도 기억한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그때도 어쩌면 나는 인연을 알고 있던 건지도 모른다.
대학생, 스무 살 즈음에 만나 지금까지 이어온 우리는 과연 인연일까를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우린 그때부터 함께했고 지금까지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내 옆에는 항상 노트북으로 새로운 영상을 찾아보며 지식을 습득하고 있는 원이가, 플랫폼 서비스를 이용해 글을 읽고 감탄사를 뱉는 솜이가 있다. 그들은 하던 행동을 끝내고 나면 내게 다가와 언제나 말했다. 이번에 알게 된 이야기인데, 새롭게 알게 된 소식인데….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리고 혼자 속으로 웃음을 그려낸다. 성향도, 관심사도, 하는 행동도 이렇게 다른데 우리는 '하나'의 이름으로 함께 살고 있다. 법적으로는 가족도, 동거인도 아니지만 우리는 '가족'이었다. 나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생각을 털어낸다. 인연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떠랴. 우리가 이미 새로운 가족의 형태로 살고 있는 게 중요하지, 하고 말이다. 우리에게는 서로가 있고 이로 인해 살아갈 힘을 얻으니 그걸로 됐다.
함께, 그리고
우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각자의 생업으로 뛰어들었다. 나와 솜이는 서울로, 원이는 부산으로 흩어졌고 각자의 꿈을 향해 한 발씩 나아갔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쉽지 않았다. 서울의 월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가는데 방송작가로서 살아가는 내 월급은 하루가 위태로웠다. 하루에 2-3시간 정도의 잠만 자면서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방송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대며 60만 원을 받았다. 120을 주면서 이만하면 돈 잘 쳐주는 거라는 말도 들었고, 150을 받을 때는 과분한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자잘한 말속에 담겨진 커다란 상처는 나를 찔렀고 큰 구멍이 났다. 나는 불안한 생활과 음울한 생각으로 인해 병원에 가야만 했다. 하지만 병원비가 없었고, 매일 조금씩 나락으로 떨어졌다. 고시 지망생으로 가득 찬 노량진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피폐해진 솜이는 오히려 나를 이끌어 냈다. 우리 같이 병원에 가자. 돈은 내가 낼 게. 손을 꼭 잡고 찾아간 병원에서 평소에 잘 울지도 못하는 나는, 1시간이 넘게 울음을 토했다. 남들도 다 이렇게 사는 걸까요. 저는 실패한 사람인 걸까요. 나는 왜 살고 있는 걸까요. 선생님은 그랬다. 솜이라는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었으면 아마 세상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다고. 나는 프로그램을 마무리하고 방송작가를 그만뒀다. 그리고 솜이는 아무런 생(生)이 없는 노량진에서 발을 뺐다. 우리는 그대로 짐을 쌌다. 서울에서 하루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갈 곳이 없는 나는 이번에도 솜이의 손을 잡았다. '제주도에 같이 가자.'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솜이의 목소리가 여간 든든한 게 아니어서 나는 다시 또 울고 싶었다.
솜이와 내가 서울을 접고 제주도로 내려오는 시기에 원이도 부산을 등지고 제주로 내려왔다. 원이는 이제 그만두고 제주도로 내려갈게요. 용기를 내서 마지막을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왜 이렇게도 이기적인 건지,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원이를 탓하며 마무리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당당하고 멋지던 원이는 몇 년의 삶 동안 작아질 대로 작아져 있었다. 마지막이라면 으레 퇴직금을 줘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고용주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하루 이틀 미루더니 말을 싹 없앴다. 원이를 달래 속사정을 살폈다. 알고 봤더니 태초에 말한 금액도 되지 않는 임금을 받고 있었고, 제대로 된 계약서도 작성한 게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원이가 법적으로 불리하다는 걸 생각하며 고용주는 원이의 임금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스트레스 상황이 지속되자 원이는 이와 얽힌 관계를 그냥 외면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불의를 가만히 보고 있지 못하는 성미의 솜이가 원이의 손을 잡았다. 일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끝날 때까지 모든 자료를 수집했고 증거들을 모았다. 그리고 노동청에 신고를 하고 셋이서 함께 부산행 비행기를 탔다. 남들은 여행으로 서울을, 부산을 갔지만 우리는 '일'로 가야만 했다. 노동청에서 주무관과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합의를 봐야만 했다. 아직 어렸던 우리는 이 모든 과정이 무서웠지만 버텼다. 원이는 고용주와 전화를 해야만 했다. 내가 줄 수 있는 돈은 얼마 안 되는데. 뻔뻔한 말에 잔뜩 겁을 먹었지만 노동청은 우리 편이었다. 속이 시원하진 않았지만 생각보다 원만하게 해결이 되었다. 이제 모든 걸 다 털어내고 새로 시작해도 되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시 제주로 향했다.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을, 우리는 왜 이렇게 다사다난하게 겪은 건지 모르겠다. 이제는 이때의 이야기를 하며 웃지만 그때의 우리는 울지도 못하고 속으로 마음을 곰기고 있었을 테다. 혼자 앓는 게 얼마나 아픈 일인지 그때 알았다. 민폐가 될까 전화조차 하지 못하고 혼자 울면서 우리는 서로가 보고 싶었다. 얼마나 소중한 시간들이 우리에게 있었는지를 알았다.
우리는 모든 짐들을 털어내고 제주로 향했다. 그리고 솜이네 집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우리가 가족이란 이름으로 첫 발을 내디딘 계기였다. 기숙사에서 함께 살던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는 많은 부분을 맞추어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처음부터 같이 산 사람처럼 잘 맞았다. 물론 가끔 투닥투닥거리면서 싸우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우리는 웃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서로의 힘이 되어주자, 편이 되어주자, 위로가 되어주자, 사랑이 되어주자. 우리는 꿈꾸고 있다.
우리는 어쩌면 힘들었던 그 오랜 시간 동안 '함께'할 미래를 꿈꿨기 때문에 버틴 걸지도 모른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살아간 지 몇 년이 되어가니 이제는 서로가 없으면 안 된다. 싸우더라도 집에서 나간다는 이야기는 금지, 같이 살기 싫다는 말도 금지, 서로의 상처 공격하기 금지 등…. 이 말도 안 되는 규칙을 우리는 조금씩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다. 여전히 싸우면서 울기도 한다. 그러다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면서 하루를 쌓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감히 가족이라고 불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