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에서 만난 젊은 작가 9 - 정진호
그의 어린 시절 성장기엔 그림책의 존재가 없었다. 다만 동화 쓰기가 있었을 뿐이다. 시와 글쓰기를 즐기던 어린 시절, 그는 짧은 동화를 틈틈이 쓰곤 했다. 대도시 외곽, 주로 신도시에서 몇 차례 이사하며 지내다 보니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고향이 없는 채로 살았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아파트가 들어서는 곳들은 세련되거나 오래된 도시처럼 정돈된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런 개발과 구도심의 사각지대에서 작가는 오히려 사유의 성장기를 거쳐왔던 건 아닐까. 그 시간의 흐름은 대학 시절까지 이어진다. 800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A4 용지 두 장의 분량을 쓸 수 있었던 군 생활은 글쓰기의 최고 훈련소였다. 여덟 명이 두 명씩 한 조가 되어 24시간 교대 근무여서 혼자 글 쓰는 게 가능했다. 아쉽게도 출력지도 없고 원본 파일도 갖고 나올 수는 없었지만 병영문학상을 받을 정도의 기량을 인정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안 삼을 수 있었다.
작가에게는 아주 사소한 단어와 문장을 마치 화두처럼 안고 끈기 있게 살을 붙여나가는 집요함이 있다. 이는 결국 지금의 독특한 그림책 작업의 원천이 되었다. 군 제대 후 인천박물관에서 소장품을 주제로 공모가 있을 때 역할 분담으로 글을 썼다. 이때 처음으로 그림을 생각하게 되었다. 글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데 자신이 생각하는 이미지를 직접 그리고 싶어졌다.
직접 기회로 삼은 건 대학 졸업 작품으로 구상했던 ‘평화의 댐’이었다. 대학생들을 상대로 ‘대한민국 최대 거짓말’을 묻는 여론 조사에서 2위로 뽑힌, 인간이 만든 거대한 조형물. 비록 과잉 대응으로 국민을 속여 만든 구조물이지만 어찌할 것인가. 이미 만들어버린 천문학적 비용의 인공 구조물을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해보자는 구상이었다. 건축학도로서 높이 125미터, 길이 601미터의 댐을 주제로 이야기 그림책을 만들었다. 이 『평화의 댐』은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작가의 작품 중 하나이다. 졸업 설계 과정에는 다른 주제가 세 개 더 있었고 그중에는 『위를 봐요!』도 있었다.
건축 졸업 설계에 건축 설계도와 모형도가 아닌 그림책이라는 엉뚱한 작업을 과감하게 받아 들여준 분은 바로 지도교수님이었다. 4학년 때 교수님은 제자인 작가에게
라고 우회적으로 다른 길을 용인해주기도 했다. 어찌 된 일인지 당시 함께 공동 프로젝트를 했던 친구 중에는 작가를 포함해 뮤직비디오, 타이어 디자인, 3D 게임 전문 회사 등 건축과 거리가 먼 직업을 택한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학생이 뭘 잘하는지 발견해주는 은사가 있었다는 사실은 작가에게 큰 행운이었다.
뿐만 아니라 학교에 처음 만들어진 동화와 연계된 독특한 교양 수업은 실제 그림책 습작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유난히 동화를 소재로 한 수업에 강하게 이끌렸던 건 사실이다. 이 강의로 동화와 그림책의 결합이 이루어졌고 교수님께 메일로 습작을 보여 드렸다. 그런데 교수님은 이 습작품을 작가의 동의 없이 출판사에 보냈고 뜻하지 않게 작가의 첫 그림책이 되었다. 이 작품이 2013년에 계약을 한 후 출간된 『위를 봐요!』다. 그는 독자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한 아이에게 받았던 질문 하나를 들려주었다. “그림책(『위를 봐요!』) 속 장면 중 사람들이 바닥에 누워서 아파트 베란다에서 휠체어를 타고 있는 아이를 올려다보는 그림이 있는데, 어떻게 그렸어요?” 그는 7층에 앉아서 그렸다고 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그만큼 작가의 표현 방식에 색다른 점을 발견한 건 어린이 독자의 눈이었다. 이 작품은 2015년 볼로냐아동도서전에서 라가치상을 수상하고 IBBY에서 ‘장애 아동을 위한 좋은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볼로냐 심사 위원단은 이 책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게 해주는 책”이라고 말한다.
졸업 학년이 시작되기 전에 만들고 있던 세 권의 그림책 습작이 완성되었고 그해 9월 그림책 『평화의 댐』도 완성되었다. 이 네 권의 습작이 지금의 작가로 서기까지 큰 버팀목이 되었다.
집에서만 생활해야 하는 아이의 절박한 호소를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이야기하고 그려냈던 『위를 봐요!』가 공간의 시점으로 접근했다면 『벽』은 책 자체가 공간으로 설정된 또 하나의 조형물이다.
표지 안쪽에 써놓은 작가의 말은 간단하면서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의 긴 벽에 둥그렇고, 네모지고, 길쭉하고, 세모진 여러 형태의 창과 문을 통해 작가가 들려주고 싶은 ‘바뀌는 건 벽이 아니라 내가 아닐까?’ 하는 질문으로 안팎의 경계를 허문다.
『3초 다이빙』도 누군가를 이기면 누군가는 져야 하는 경쟁이 싫은 아이가 등장한다. 다이빙은 혼자서도 할 수 있고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된다. 뱅글뱅글 도는 구조로 된 계단을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시선으로 다이빙대 위로 올라가는 아이를 포착하는 장면, 그림으로 이야기하고 심리 상태를 공간으로 표현해내는 특유의 시각화 작법은 오로지 그의 그림책에서만 보인다.
건축과 그림책 모두 공간을 설계한다는 점에서 똑같다.
작가는 이렇게 건축과 그림책에서, 아니 그 이상의 모든 일들에 대해서도 경계가 사라지기를, 특히 벽이 없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작가의 작업은 이 철학이 쉼 없이 그리고 소리 없이 흐르고 있다. 쉬운 그림으로 이야기하지만 깊은 사유가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병규_행복한그림책연구소 소장, 『우리 그림책 작가를 만나다』 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0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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