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속 그림책, 픽션과 메타픽션 이야기

그림책깊이읽기 2

by 행복한독서

에르네스트와 빅토르는 그다음 장으로 넘어갔습니다. 어떤 토끼가 무시무시한 초록용을 때려눕힌 장면이었지요. 둘은, 넋을 잃고 쳐다보았습니다.

“나도, 이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빅토르가 꿈을 꾸듯 중얼거렸습니다.

“야! 빅토르, 정신 차려!” 에르네스트는 동생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빅토르, 꿈을 꾸는 건 좋아. 하지만 책에 나오는 걸 그대로 다 믿으면 안 돼. 나름대로 판단을 해야지.”

빅토르는 금세 시무룩해졌습니다.

“에이, 그러면 재미없는데… 근데, 믿는 척하면서 재미있어하는 건 돼?”

“물론! 그건 되지.”

“그래? 그럼 빨리 보자.”

둘은 꼭 붙어 앉아 다시 책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_클로드 부종 『아름다운 책』 중에서

아름다운책-1.jpg ⓒ비룡소(『아름다운 책』)


‘그림책 안의 그림책’이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텍스트는 바로 프랑스 작가 클로드 부종의 『아름다운 책』입니다(원서 제목은 『Un beau livre』입니다. ‘beau’라는 단어에는 ‘아름다운’만이 아니라 ‘유용한’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후자의 번역이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형 토끼 에르네스트가 우연히 발견한 그림책을 집으로 가져와 동생 빅토르와 함께 보기 시작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 장면에서 동생 토끼는 책의 내용을 다 믿으면 안 된다고 형 토끼가 충고하자 “근데, 믿는 척하면서 재미있어하는 건 돼?”라고 묻습니다. 책을 처음 보는 동생 토끼가 무심코 던진 말 같지만 픽션의 본질을 한마디로 표현한, 아주 멋진 문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책-2.jpg ⓒ비룡소(『아름다운 책』)


독자가 픽션에 몰입할 수 있는 이유는 잠시 ‘불신을 정지(suspension of disbelief)’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픽션은 허구이지만 독자가 책을 읽는 동안에는 의식하지 않은 채로 그 의심을 억누르는 까닭에 픽션의 세계에 빠져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를 일종의 ‘도피주의’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지의 제왕』 작가인 J. R. R. 톨킨이 말했듯이 도피가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감옥에 갇힌 사람이 감옥 담장 밖의 아름다운 일들을 상상할 수 있다면 수감 생활을 인내하기가 더 쉬워질뿐더러 앞날에 대한 소망도 갖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좋은 픽션도 독자에게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통찰을 제공하며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의 문제를 극복할 힘을 줄 수 있습니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 해체

‘픽션’ 앞에 ‘넘어서’라는 뜻의 ‘메타(meta)’라는 접두어가 더해서 생긴 단어인 메타픽션(metafiction)은 포스트모던 그림책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서사 전략입니다. 메타픽션은 앞에서 설명한, 픽션을 읽는 독자의 불신을 정지하는 태도를 의도적으로 방해하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타픽션의 일반적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허구의 일종으로, 허구의 장치를 의도적으로 그리는 것을 가리킨다. 메타픽션은 그것이 픽션임을 의도적으로 독자에게 알리는 것으로, 허구와 현실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표상주의 연극과 비교하면, 표상주의 연극이 관객에게 극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하는 반면, 메타픽션은 독자에게 허구적인 사실을 의식하게 한다.”


현실과는 구분되는 2차적 세계를 구축하는 픽션과는 달리 메타픽션 텍스트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리므로 독자들을 당혹하게 합니다. 작년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칼데콧 수상 작가인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리버벤드 마을의 이상한 하루(Bad day at Riverbend)』를 보기로 하지요. 이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리버벤드라는 서부의 작은 마을에서 네드라는 이름의 보안관이 서쪽 하늘에서 이상한 빛이 몇 분간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조금 후 마부 없는 마차가 그 마을에 들어오고, 말들의 몸에는 반짝이는 이상한 선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마부를 찾으러 마차 바퀴를 따라간 보안관은 사막에 쓰려져있는 마부를 발견합니다. 그가 마부를 데리고 마을로 돌아오자 마을 사람들은 그 빛 때문에 다들 두려움에 싸여있습니다. 그 빛은 그것에 닿는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하고 그 빛이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 몸은 기름진 표식으로 뒤덮였다는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을 위해 네드는 그 악한 이상한 빛을 끝장내겠다고 용감하게 나서고 그 뒤를 여러 명의 카우보이들이 뒤따릅니다. 앞의 언덕에 사람 같은 형상이 나타나자 네드는 그 모든 소란의 원인이 그 악마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빛을 비추어 자기들을 얼어붙게 하기 전에 해치우고자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러나 언덕으로 올라간 그들은 갑자기 하늘을 가득 채운 밝은 빛 안에서 얼어버립니다.
리버벤드마을1.jpg ⓒ문학동네(『리버벤드 마을의 이상한 하루』)


이 텍스트에서 독자의 시선을 끄는 건 그림 이미지의 윤곽선 안에 그려진 크레용 선입니다. 서술자는 그것을 “기름진 점액” “끔찍한 점액” “표식” “두꺼운 줄무늬”라고 표현하지만 독자들 눈에는 그저 크레용으로 거칠게 그어진 선으로 보일 뿐입니다. 마차를 이끄는 말들의 몸과 사막의 땅은 붉은색으로, 선인장은 초록색으로, 그리고 마부의 모자, 얼굴, 눈, 입, 몸은 여러 색의 크레용으로 칠해져 있습니다. 사막으로 나선 카우보이들 앞에 나타난 그 악마는 크레용으로 그려진, 큰 키의 빗자루같이 가느다란 사람 형체입니다. 카우보이들이 얼어버렸다고 서술된 장면에서는 카우보이들의 몸 위에 크레용으로 색칠 중인, 작은 손이 등장합니다. 다음 페이지에서 우리는 그 작은 손의 주인을 알게 됩니다. 그는 지금 붉은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책상 앞에 앉아 크레용으로 바로 그 장면을 색칠하는 중입니다. 마룻바닥에는 색종이와 크레용, 가위가 어지럽게 흩어져있어서 그 작업이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임을 알려줍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카우보이”라는 제목의 색칠책이 책상 위에 놓여있고 이 아이는 축구공을 들고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빛이 꺼졌다”라는 마지막 문장이 남겨집니다. 뒤 면지도 앞 면지와 마찬가지인 검은 색지입니다(원서에서 앞뒤 면지는 검은색이나 번역본에서는 면지의 색이 짙은 녹색입니다).


이제 독자들은 이 이야기가 실은 이 아이의 색칠 놀이와 함께 진행되어온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성인들(마부, 보안관, 카우보이, 마을 사람들)을 놀래고 당황하게 하고 급기야는 얼어붙게 한 자는 바로 이 어린아이(정확히 말하면 크레용 색칠 작업)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나타났다가 사라졌던 그 이상한 빛의 정체는 여전히 미스터리입니다. 혹시 책장을 넘길 때 들어온 빛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본문의 흰 배경과 대조되는, 검은색 앞뒤 면지는 이야기의 시작 전과 종결 후 전깃불이 꺼져있는 어두운 방이 아닐까요.


텍스트를 놀이터 삼아

『리버벤드 마을의 이상한 하루』를 메타픽션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독자에게 텍스트의 저자성(authorship)에 관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이 텍스트의 저자는 누구입니까. 스케치를 그린 작가인가요, 아니면 그 스토리를 끌고 나가는 크레용 작업인가요. 이 답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메타픽션 작품이 반영하는 세계관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허구란 무엇인가?’ 혹은 반대로, ‘실재란 무엇인가?’라는 형이상학적 문제와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철학적 문제에 답하기 위해 과거에 인류가 참조하던 토대를 허물어버렸습니다. 이데올로기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이 목적하는 것은 고대와 근대의 형이상학과 인식론의 토대를 의심하고 더 나아가 전복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고대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유했던 보편적 진리와 근대인이 신뢰했던 인간의 이성을 더 이상 실재의 의미를 확증하는 토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텍스트의 저자성과 텍스트 자체의 권위를 부인하는 것은 결국 해석 행위의 해체(그것을 풀어헤쳐서 텍스트의 자의성과 임의성을 드러내는)로 이어집니다.

리버벤드마을2.jpg ⓒ문학동네(『리버벤드 마을의 이상한 하루』)

『리버벤드 마을의 이상한 하루』는 글과 그림의 기호로 이루어지는 그림책에서 저자성과 텍스트, 해석 모두에서 해체를 시도하는 독특한 텍스트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 텍스트의 모티브가 된 색칠 놀이는 포스트모던 비평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놀이’ 개념의 탁월한 예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놀이’는 어린이의 놀이나 규칙 있는 게임과 같은 놀이의 개념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서 텍스트의 의미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 작업의 해체를 뜻합니다. 포스트모던 비평가에게 놀이라는 단어는 저자의 권위가 부재한 곳에서 해석자들이 누리는 무제한적인 자유를 의미합니다. 메타픽션 텍스트는 저자가 구축하는 세계라는 픽션의 개념을 해체함으로써 독자에게 텍스트로부터 어떤 의미나 메시지, 혹은 교훈을 얻는 대신, 그저 글과 그림이라는 기호들의 해석을 즐기며 텍스트를 놀이터로 삼을 것을 제안합니다.


픽션이 독자에게 주는 것

그럼, 다시 처음의 토끼 형제 이야기로 돌아가봅시다. 그들이 그림책 속 토끼들이 여우와 사자를 가지고 노는 이야기에 푹 빠져있는 동안, 어느 사이에 굴 안으로 들어온 여우가 토끼 형제를 잡아먹으려고 달려듭니다. 순식간에 닥친 위기 앞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형 토끼는 곧 정신을 차리고 읽고 있던 책으로 여우의 머리를 내리친 후 여우 주둥이에 책을 쑤셔 박았습니다. 그림책이 이에 박힌 여우는 그대로 줄행랑을 칩니다.


토끼 형제는 이제 살았습니다. 에르네스트는 때를 놓치지 않고 말했습니다.

“봤지, 책은 정말 쓸모 있는 거야.”

빅토르도 맞장구쳤습니다.

“맞아, 빨리 또 하나 구해 와야 겠어.”

그러자 에르네스트가 덧붙여 말했지요.

“그래, 껍데기가 커다랗고 딱딱한 걸로. 속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한 걸로!”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예전의 토끼 형제가 아닙니다. 처음엔 동생에게 책에 있는 것을 모두 믿으면 안 된다고 핀잔을 주던 형 에르네스트도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나 봅니다. 토끼 형제는 픽션의 세계로 들어가 독서의 즐거움을 만끽했을 뿐 아니라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인식도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빛과 줄무늬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용감하게 사막으로 나아갔지만 얼어버린 채 색칠을 당하고 있는 리버벤드의 카우보이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현은자_성균관대 아동청소년학과 교수, 『100권의 그림책』 공저자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0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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