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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쓰지 않아도 되는 치유의 문장들

경기서적 책방지기 추천책

by 행복한독서

사랑은 왜 밖에 서 있을까

최문자 지음 / 200쪽 / 15,000원 / 난다



아침 청소 중이었다. 어제 저녁부터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책을 한참을 보았다. 등단 후 오래도록 시만 써온 것으로 아는데, 첫 산문이라니.

최문자 시인은 우리 서점이 자리한 동네에 산다. 시인과 시인의 가족들이 이따금씩 책을 사러 서점에 온다. 살갑게 대할 수 있는 친분은 아니지만 서점 문을 연 이래 줄곧 그의 신간들을 나름 신경 써서 진열하고 있다. 한 번도 시인과 사는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없다. 이 책으로 그런 대화들을 대신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다가가기 어려운 원로 시인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서 나의 감정이 그의 시에 가닿을 수나 있을까 싶어 그저 조금 더 젊은 시인들의 시집을 기웃거렸던 내가 사실 속으로 너무 우스웠었다. 부끄러웠다.


책 표지인 프랑스의 화가 오딜롱 르동의 「비올레트 에만의 초상」 시선 끝에는 꽃이 있었다. 사랑의 시선 끝에 시인이 있고 책 속의 모든 말들은 꽃가루 되어 날아가고 봉우리를 보이며 꽃을 피워내기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생각을 멈추고는 마저 하던 집안일을 끝내놓고 아기를 데리고서 가방에 책을 넣어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늘 적당한 벤치에 앉아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는데 너무 일찍 다다른 여름의 길목에서 짧은 시간 동안 내 무엇을 건드렸는지 눈물방울이 두어 번쯤 속눈썹을 적셨다.


“누구의 잎으로 산다는 것은 마치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사는 것이다. 단 한 번도 나로 살지 않는 것이다.” (18쪽)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하루 스물네 시간을 살고 있는데도 턱없이 하루가 부족하고 바쁘고 고단함을 느낄 틈이 없을 때, 무언가에 허덕이는 나를 건져 올릴 시간조차 없을 때, 가끔씩 기분 좋은 바람이 스쳐가도 온몸으로 누릴 여유조차 나지 않을 때, 나는 무엇으로 살고 있는지 혹시 나로 살지 않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아주 얕고 짧은 우울함이 밀려오는 날들이 있었다.

자연물을 가지고 신나게 노는 아기의 곁에서 발치에 떨어진 잎들을 주워 들여다보면 “잎의 슬픔은 뒤집혀도 똑같은 색깔”이라는 시인의 말이 왜 그렇게 서러웠는지 모르겠다. 다가와 그 잎을 낚아채 가는 작은 손과 티 없는 웃음은 나라는 나무, 나의 잎, 나의 꽃이 분명 존재함을 일깨워주기도 했다. 한 번도 내가 꽃피지 않은 적은 없었다고.


시인이 했던 생각들과 고뇌들은 너무나도 서정적이었다. 물론 말이 좋아 서정적이지 시인이 살아오는 내내 모든 것이 결코 다 서정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산문으로 집어든 책을 낭만으로 읽어내면 안 되기에.

길어진 해가 지고 있는 저녁 산책길에 “해가 지고 있는 저녁의 시간”을 지나가고 있을 시인의 책 속 문장들을 떠올리면서 “닿고 싶은 곳”을 생각해본다.

바람, 햇빛, 나무와 잎, 줄지어 핀 꽃들, 벤치 그리고 성가시다고 생각했지만 생명을 움트려는 공기 중의 꽃가루들까지 모두가 산문으로 느껴졌다.


시인의 산문으로 봄을 나고 이제 여름을 준비한다. 해석하거나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치유의 문장들을 안고 나는 여름의 해 지는 저녁으로 가고 싶다.


이유리_경기서적 책방지기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2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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