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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Jun 12. 2024

현실적인 표현으로 탄생한 추상적인 세계

09:47

이기훈 글·그림 / 90쪽 / 25,000원 / 글로연



표지를 넘겨 만난 검은색 면지 위 가느다란 회색 라인으로 그려진 사각 형태를 살펴보며 여객선 창문으로 추정되는 창이 열려있는 이미지는 독자의 호기심을 급하게 자극하지 않고 천천히 음미하며 다음 장을 넘기게 만듭니다. “08:50”이라는 짤막한 텍스트와 함께 그래픽노블과 흡사한 프레임 나누기로 여객 터미널에 도착한 설렘 가득한 가족이 등장합니다. 다음 장에는 “09:00”를 가리키며 배는 항구를 떠납니다. 면지로부터 세 번째 장이 넘어가서야 작품의 제목과 같은 “09:47”을 발견하며 이야기가 시작되었음을 독자는 눈치채게 됩니다. 최근 그림책 양식을 생략하거나 제작비 절감을 위해 면지 이후 바로 타이틀이 등장하며 시작되는 그림책 시장에서 무척 반가운 편집 구성입니다.

이야기는 다시 “09:30”으로 돌아가 “09:47” 화장실에 들어가 잔뜩 몸이 젖어 나오는 딸을 보며 당황하는 엄마의 모습으로 이들의 여행이 무엇인가 기묘한 분위기가 돈다는 것을 독자는 감지하게 됩니다. 평온해 보이는 가판대 위 주인공 소녀는 갈매기 때문에 애착 인형을 바다에 떨어뜨리게 되고 목적지인 섬에 도착해 인형을 다시 찾게 됩니다. 무언가의 강한 에너지로 애착 인형과 함께 깊은 바닷속 여행 모험이 시작됩니다. 깊은 곳에서 존재를 가늠하기 어려운 동그란 구체가 보이고 “12:00”를 가리키는 페이지에서 작가는 검은색 톤으로 스토리 반전을 시도합니다. 실존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물고기의 등장으로 판타지한 작가의 세계로 빠져들어 가며 거칠어진 바다와 함께 물고기 표피가 인류의 잔해들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합니다. 그 잔해는 사실 우리가 바다에 버린 수많은 쓰레기입니다. 우연히 만난 고래상어는 지느러미에 걸린 그물과 부표 때문에 고통스럽게 헤엄치고 소녀와 애착 인형은 폐그물을 제거해 주며 거대한 고래 형태의 쓰레기 더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글로연(『09:47』)

쓰레기로 구성된 고래의 움직임은 역동적이며 쓰나미와 같은 존재로 바닷가 마을을 덮치고 인간의 문명을 공격합니다. 이 시점에서 작가는 본격적으로 그림책의 본질인 보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역동적인 장면들을 기다렸다는 듯 방출하기 시작합니다. 텍스트가 존재하지 않지만, 독자는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박력 넘치는 이야기 속으로 몰입됩니다. 해수면 위에서 깊은 심연으로 돌아간 장면은 아이러니하게도 고요한 바닷속 풍경으로 그려지며 고래 형태들이 추상적 모양으로 흩어지기 시작하고 작품의 하이라이트인 넓고 깊은 바닷속 작은 점과 같이 존재하는 두 주인공을 보여줍니다. 우주 속 작은 존재와 같은 주인공과 함께 어둡고 깊은 바다 표현은 마치 동양화 속 깊고 진한 먹의 농담을 이용해 최소한의 묘사로 완성한 미니멀리즘 회화를 감상하는 느낌마저 듭니다. 서구적 표현에 가까운 박진감 넘치는 작가의 잉크 드로잉과 매우 대치되는 모습입니다. 과거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 중 끝이 없는 우주에 떠있는 두 주인공의 모습을 공간 여백을 극대화하며 묘사한 연출과도 매우 유사해 보입니다. 긴장된 위험천만한 상황을 넓은 암흑 공간을 통한 고요한 무드로 완성합니다. 함께 달려간 독자에게 잠시 기분 좋은 휴식을 제공하는 장면을 엔딩으로 선사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데이비드 위즈너의 작품을 즐겁게 보며 그림책 장르 속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한 이기훈 작가이지만, 본 작품을 소개할 때 대부분 숀 탠 작가를 자주 거론하곤 합니다. 평소 흥미롭게 두 작가의 작품을 즐겨보며 유사한 장르의 형태를 가진 그림책이지만 우리 풍경과 정서가 담긴 모습은 어떤 그림책으로 탄생할까 하는 목마름과 같은 궁금증이 있었는데 수묵화 기법과 유사한 돌산이 자리한 섬마을 풍경 장면을 바라보며, 이러한 갈증을 말끔하게 해갈해 준 작품이 『09:47』이 아니었나 여겨봅니다.


예술을 생산하는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어떤 그릇에 담겨야 하는지 혹은 미리 정해진 그릇에 어떤 메뉴를 담아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작품을 제작합니다. 이기훈 작가의 원화를 처음 맞이한 이담 그림책 전시회에서 다른 작가들보다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자신의 부스에 이동이 불가능하여 과거 법원으로 사용하던 공간에 남겨진 금고를 방해 요소가 아닌 재미있는 오브제로 활용한 모습이었습니다. 전시를 위해서 큰 크기의 오일 바를 이용한 드로잉과 원색을 과감하게 사용한 채색으로 완성된 페인팅들이 설치된 공간 끝 금고를 이용해 작가의 양철곰 캐릭터를 유머러스한 입체물로 소화해 낸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이야기 속 녹슬어가는 폐기물과 같은 양철곰이 실제로 전시장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렇듯 매체의 특성에 따라 작품의 전달력과 그 감동은 매우 달라집니다.


그림의 장르적 성격에 맞는 가로세로 길이가 30센티미터에 육박하는 큰 판형과 표지 위 세심하게 디자인된 서체 윗부분 코팅 그리고 더스트 재킷을 벗기면 등장하는 검은 하드커버 바탕 위에 작품의 타이틀로 떨어지는 두 주인공의 모습은 본문에 들어가기 전 반전된 시각적 재미를 선물합니다. 이미 종이 그림책 물성의 높은 완성도로 소장의 만족감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09:47』은 그림책 애호가라면 꼭 만나 보아야 하는 작품입니다.


류영선_그림책평론가, 『그림책 보는 기쁨』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4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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