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다니카와 슌타로 글 / 초 신타 그림 / 엄혜숙 옮김 / 28쪽 / 13,000원 / 한림출판사
우리 마음의 종류와 변화를 정의하는 일은 과연 가능할까? 스스로 질문을 던져봅니다. 엄격히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문자로 정의를 해보면 대부분의 전문가는 감정(Emotion), 느낌(Feeling), 정서(Affect)로 나누게 됩니다. 복잡한 여러 상황에서 미묘하게 펼쳐지는 마음속 파도를 평소에 기분(Mood)이라는 광범위하고 모호한 개념으로 정의하며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기분이 좋아!’ 혹은 ‘기분이 나빠!’ 이렇게 표현하곤 하지요. 우리 삶에서 단 한순간도 떨어트려 놓지 못한 마음 변화를 그림책으로 출간하는 일은 매우 어렵지만 많은 작가의 꿈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을 처음 서점에서 만났을 때 아주 먼 거리에서도 확연하게 보였던 ‘기분’이라는 커버 일러스트레이션과 함께 디자인된 과감한 크기의 서체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시각적으로 독특한 디자인을 이루어낸 타이포그래피에서는 재즈의 스윙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미니카를 들고 신이 난 어린이의 손짓과 함께 비대칭적인 배치로 표현된 디자인이었습니다. 통념적으로 주목성이 강해야 하는 표지 그림의 기본 틀에서 벗어나 프레임 하단에서 살며시 올라오는 팔은 독자의 궁금증을 더하며 작품 감상의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과연 누가 이렇게 엉뚱하면서도 기발한 상상으로 그림책을 만들어낸 것일까요?
살아생전 필요시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여행 기간에 따라 적합한 크기의 가방을 준비해 두고 예고 없이 떠나기를 반복했다는 작가 초 신타. 그의 삶 속 단면만 살펴보더라도 의식의 흐름에 매우 충실한 작가의 삶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초 신타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 불필요한 설명과 평범한 서사적 구조의 이야기를 거부하였던 그만의 스타일이 무척 낯설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모든 작품 속 ‘융화와 어울림을 통한 평화’라는 주제를 평생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던 작가의 진심은 마음속 깊이 다가오는 뭉클한 감동을 선사하며 넓은 팬층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흔히 글이 없는 그림책을 볼 때면 많은 이들은 이야기 혹은 스토리가 부재한 작품일 거라 오해하곤 하지만, 문자라는 형식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 대부분 작품은 작가가 말하려는 주제가 드러나는 이야기 구조를 그림에 내재시키고 있습니다. 『기분』은 일본을 대표하는 현대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가 시적 축약된 문장으로 초 신타와 함께 출간한 작품입니다. 우리에게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엔딩 타이틀 곡의 작사를 맡아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하나의 시간으로 엮고 감정의 변화를 표현했던 가사 내용으로 애니메이션만큼 큰 화제가 되어 대중들에게 알려지기도 하였지요.
『기분』의 표지를 넘기면 또 다른 손이 등장하여 아이들의 싸움으로 연결되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다음 장을 넘겨보니 장난감 쟁탈전의 승리는 주인공의 것으로 마무리되는 듯 보입니다. 주인공과는 달리 울고 있는 친구의 모습은 무척이나 작은 존재로 그려져 있습니다. 아이들의 동작은 마치 인형극을 보고 있는 듯 분명하고 단조롭게 움직임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과장되지 않은 형태 속 표정들도 자신이 처한 상황과 감정을 담백하고 정확하게 독자에게 보여줍니다. 거친 붓질과 큰 면 채색을 중심으로 세밀한 톤들이 겹치며 등장인물의 형태 외곽을 정리해 둔 그림을 자세히 바라보니, 단순한 이야기 묘사에 그치지 않고 입체적인 감정의 변화를 거친 붓질의 움직임을 이용해 추가로 독자와 소통을 시도하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과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해부학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문자의 정확성과 그림의 입체적인 정보를 동시에 사용해 교본을 만들 것을 권했던 것처럼 『기분』은 열 개의 펼침면 그림이 전개되는 동안 텍스트를 생략하고 온전히 일러스트레이션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친구와 싸워 승리하게 된 기쁨은 잠시 뒤로하고 길가에서 만난 아기 고양이에 대한 측은함, 병원에 가기 싫은 거부감과 뜻밖의 만남으로 발생한 부끄러움까지 유년 시절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것 같은 평범한 일상을 통해 다양한 감정의 변화를 온전히 그림으로만 보여주지요. 평온함만이 존재하지 않는 그 시기의 감정 요인 중 가장 큰 것은 부모의 존재입니다. 부부 싸움의 영향으로 악몽을 꾸었던 밤은 부모의 걱정으로 전이됩니다. 밤은 어느새 아침이 되어 신문을 보고 출근하는 아빠와 배웅하는 엄마의 모습을 무심히 옆에서 노는 척하며 지켜본 아이는 스스로 마음의 무게를 덜어냅니다.
다니카와 슌타로의 텍스트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그동안 서사적 구성으로 배경까지 그려졌던 풍경은 사라지고 아이의 감정 변화에 집중할 수 있도록 표정이 부각된 그림으로 마무리됩니다.
아이 스스로에게 되묻는 기분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장면에서 어린이와 어른들의 감정 그리고 타인의 기분과 나의 관계에 대한 고민으로 전이됩니다. 이러한 흐름은 평소 초 신타가 자기 작품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공통 주제를 담고 있으며 작품 초반에 등장하였던 놀이공원과 미니카를 통한 친구와의 관계로 다시 돌아옵니다. 가면을 쓰고 나타난 친구에게 놀라며 웃음이 터진 아이들의 화해는 초 신타의 마법을 통해 곧 독자 스스로의 모습이 됩니다.
류영선_그림책평론가, 『그림책 보는 기쁨』 저자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4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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