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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Dec 04. 2024

우리를 기다리는 삶의 풍경들

이길 저길

문정인 글·그림 / 40쪽 / 19,000원 / 달그림



어렸을 때 아주 좋아했던 그림책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어느 길로 갈지 고민하는 순간마다 페이지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며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 그림책이었습니다. 어떤 길로 가면 좋은 일이, 어떤 길에선 무서운 일이 벌어졌죠. 그 길은 또 다른 길로 나뉘어 각각의 길마다 서로 다른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모든 경우의 수가 궁금해 이길, 저길, 가보며 몇 번이고 읽었습니다. 나의 선택에 따라 다른 결말이 나오는 것이 게임 같아 재밌었었습니다. 그중에는 소위 말하는 ‘해피 엔딩’도, 주인공이 곤경에 빠지거나 나쁜 일을 겪는 ‘망한 엔딩’도 있었지요. 그 책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A4용지를 스테이플러로 집고, 가위로 페이지를 자른 후 그림을 그려 같은 형식의 그림책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나이가 들고 그림을 그리게 되자, 재밌는 책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경험을, 그 즐거움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그 책의 기억을 가져왔습니다.

ⓒ문정인, 달그림(『이길 저길』)

이 책은 독자들이 주인공이 가는 길을 선택하여 서로 다른 풍경을 만드는 참여형 그림책입니다. 책은 길을 떠나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처음 책을 펼쳐보면 위아래로 길을 떠나는 주인공들과 그들이 지나는 풍경들의 연속입니다. 그렇지만 그러면 참여형 그림책이 아니지요. 주인공이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까?” 고민하는 순간부터 페이지 가운데 절취선이 있습니다. 독자들이 직접 페이지를 뜯어 주인공이 가는 길을 내주어야 하죠. 시작할 때 한 갈래였던 길은 이내 두 갈래가 되고, 이내 네 갈래가 됩니다. 길은 갈라지지만, 어떤 길의 조합을 해도 그림은 모두 이어져 하나의 커다란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절취선을 모두 뜯어도, 뜯지 않아도, 반만 뜯어도 좋습니다. 모두가 나만의 길과 풍경이 담긴 서로 다른 책을 가지게 되는 것이 저의 의도니까요.

이 책에선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삶이 그렇듯이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 채 페이지를 넘기고, 어떤 것들이 나를 맞이할까 궁금해하며 길을 떠납니다. 너무나도 마음에 드는 길 위에 있을 때도,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풍경 속으로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폭풍우가 치는 장면도, 불이 나는 장면도 있지요. 그렇지만 이 책엔 여러 갈림길에 따른 서로 다른 결말은 없습니다. 네 갈래였던 길은 이내 두 갈래로 모였다가, 마지막에 커다란 문을 통과하며 다시 한 갈래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만들며 ‘길’이 나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초기 더미북 버전에서는 저 역시 여러 가지 결말을 그렸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제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게 아닌 것 같았습니다. 길은 제게 삶, 인생의 궤적입니다. 저는 ‘당신이 삶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좋은 결말도, 나쁜 결말도 나올 수 있습니다’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길을 가도, 마음껏 헤매어도 좋아요. 그것들은 고스란히 당신 삶의 풍경이 될 거니까요’라는 말을 하고 싶었죠.

그렇게 갈라졌던 길들이 다시 하나로 모이는 결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해피 엔딩도, 망한 엔딩도 없습니다. 모두가 삶에서 지나야 하는 커다란 문을 통과하면, 마지막엔 그저 주인공이 지나쳐온 이길 저길의 풍경들이 모두 모여 그를 맞이할 뿐입니다. 마치 우리의 삶이 우리가 걸어온 길의 총합이듯이요.

저는 살면서 많이 헤매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게 되기까지 이길 저길을 들쑤셨죠. 호기롭게 길을 나섰다 폭풍우를 맞고 울며 돌아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때마다 저는 제가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실패한 길이라고 느꼈죠. 그런데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저의 작업에 고스란히 녹아들었습니다. 이길 저길 헤매며 보고 겪은 것들이 나만의 독특함이 되어 제 그림의 강점이 되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 책의 연극무대 같은 배경과 인물의 동선은 제가 한때 하려고 했던 연극 연출의 영향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제가 걸어온 길들의 총합이기도 합니다. 저의 첫 그림책인 만큼, 제가 좋아하고 영향받은 것들을 길 사이사이에 많이 숨겨놓았거든요. 그러니 보물찾기하는 기분으로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이 책을 보는 모두가 마음껏 길을 잃으며 모험했으면 좋겠습니다. 헤매는 순간조차도 멋진 풍경이 되어 여러분의 삶에 남을 테니까요. 그리고 원한다면 새로운 길과 풍경이 기다리고 있으니 다시 여행을 떠나도 좋을 것입니다.



문정인 작가는 제주에서 태어나 뭍에서 자랐습니다. 이길 저길 헤매다 그림책을 만들기로 결심한 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고등예술학교(HEAR)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습니다. 첫 그림책 『이길 저길』로 2023년 볼로냐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되었습니다.


-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4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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