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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국물이 시원합니다

삼복더위와 모래찜질

by 진주


무더운 여름철에는 시원한 오이냉국이나 콩국수, 냉면이 손이 가는 시기이다. 덥다고 차가운 음식만 먹다 보면 배탈이나기 쉬운 때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삼복더위에 이열치열이라고 뜨거운 삼계탕, 보양식 등을 먹음으로 기력을 보충해주는 풍습이 있다. 뜨거운 음식이 우리 몸속에 들어가면 땀을 원활하게 배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 체온을 낮춰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올해는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곡물, 원자재 가격과 물류비 상승으로 외식 물가 오름세가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삼복더위에 만만하게 먹었던 삼계탕 식재료도 너무 많이 올라서 문전성시를 이루었던 음식점도 올해는 예년만 못하다고 한다.


옛날에는 집집마다 봄이 되면 암탉이 달걀을 품어서 병아리를 부화시켰다.

꼴망태에서 달걀을 품고 있는 암탉이 신기해서 쳐다보면 깃을 세우고 자기 새끼를 지키느라 꼬꼬꼬 울었다.

품은 지 삼주가 지나면 예쁜 병아리가 알을 까고 나왔다. 나오자마자 뒤뚱뒤뚱 걷고 하루가 다르게 개나리. 빛으로 자라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그러나 어미 닭이 될 때까지 험난한 길을 통과해야 했다.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는 우리 메리에게 쫓겨서 퍼득퍼득 날다가 구정물 통에도 빠져 죽고, 물려서 죽기도 했다.


그래서 정작 몇 마리 남지 않았다. 아무리 무더운 삼복더위가 찾아와도 집에서 키운 닭 한 마리 쉽게 잡지 못하고 제사가 돌아오거나 손님이 오시면 닭을 잡았다.

그래서 삼복더위라고 어린 시절 특별히 삼계탕을 먹어본 기억이 없다.


놀이 삼아 삼촌이나 오빠들이 강에서 투망으로 건져 올린 피라미로 매운탕을 끓여먹었던 기억이 날 정도이다.

농사를 주로 짓고 살았던 때라 특별한 놀이가 없었다. 그저 무더운 여름철에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자 엄마들은 모래찜질을 하러 백사장으로 나갔다.


솥단지, 장작, 삽, 수제비 반죽, 호박, 풋고추, 양념 등 필요한 물품들을 챙겨서 머리에 이고 솥단지는 주로 남자들이 지게로 지어다가 걸어주었다. 처녀들과 엄마들이 하루 휴가를 즐기는 날이었던 셈이다.

우리 동네는 가늘고 부드러운 섬진강 모래사장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뙤약볕에 섬진강 모래가 뜨겁게 달구어져 얇은 고무신으로 모래가 들어와서 걸을 수가 없었다. 아예 신발을 벗고 모래 속에 발을 파묻으며 걸어가면 쉽게 갈 수 있었다.

한 여름에 모래사장에 발을 파묻으면 무좀이 낳은 다고 했다.

보통 5-6명이 일행이 되어 서로 짝을 지어 한 사람이 삽을 가지고 햇볕에 달궈진 뜨끈뜨끈한 모래를 사람 하나가 다리를 뻗고 누울 만큼 구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가슴에서부터 발끝까지 모래를 삽이나 손으로 가볍게 퍼 얹어 덮어주고 얼굴에는 양산을 꽃아 서 햇볕을 가려주었다.


대개 20-30분가량 누워 있다 섬진강 물에 들어가서 몸을 씻고 다시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점심때가 되면 걸어놓은 솥단지에 장작불을 붙이고 불을 때기 시작했다.

뜨거운 모래 열기와 함께 장작불까지 합해져서 그날 섬진강은 한증막처럼 뜨거웠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집에서 반죽해온 수제비 반죽을 떼어 넣고 반달로 썰어온 애호박도 넣은 후에 수제비가 끓어오르면 간을 맞추고 매운 풋고추와 마늘, 파도 넣어서 한 소큼 끓이면 수제비가 완성이 되었다. 먹거리가 풍성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모래찜질할 때 고깃국 대신 수제비를 끓여서 먹었다. 펄펄 끓어오르는 수제비를 한 대접씩 떠서 뜨거운 국물을 마시면서도 시원하다는 어른들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섬진강 가장자리에 수박과 참외를 모래를 파고 묻어놓으면 냉장고에 넣어 둔 것처럼 시원했다. 집으로 올 때쯤 꺼내서 한 조각씩 나누어 먹던 기억도 잊을 수가 없다.


모래찜질을 마치고 각가지 짐을 꾸려서 머리에 이고 동네로 들어가는 행렬이 제법 길게 늘어섰다.

허리, 다리가 아픈 곳에 모래찜질이 효험이 있다고들 하는데 요즘 같으면 물리치료 효과가 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한 여름 무더위를 피하느라 즐겼던 놀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원한 계곡을 찾아서 물 맞으러 가는 일행도 있었다. 목욕은 못해도 속옷 차림으로 머리도 감고 다리를 물속에 담가놓고 무더위를 피했다.


쌀을 천으로 동전 크기만큼 동글동글하게 싸서 나무에 매달아 놓기도 했는데 일종의 미신으로 가족들이 더위 먹지 않고 건강하게 올여름 잘 지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달아놓았던 것 같다.


집에서 가져간 먹거리는 술 넣고 발효되어서 부들부들한 술 빵이었다. 아이들은 따로 세모 모양으로 팥 앙금을 넣고 만들어주었다. 맨드라미 잎사귀로 예쁘게 무늬를 입힌 솔 적도 꾸덕꾸덕하게 말라 쫄깃쫄깃하니 맛있었다.


엄마는 종갓집 맏며느리로 사실은 모래찜질, 물 맞으러 가는 때가 없었다.

절기가 돌아오면 모기떼를 쫓아가며 저녁 내내 식구들 먹을 음식 장만하면서 틈틈이 적도 부치고 빵도 쪄냈다.


세월이 흘러 여름휴가철이 되면 더위를 피해 아버지께서 나이 든 우리 형제들을 데리고 구례 산동에 자리 잡고 있는 온천을 갔다.


다녀오는 길에 각종 나물과 민물게를 넣고 끓인 매운탕과 함께 은어튀김을 먹었다.

어린 시절 뜨거운 음식을 훌훌 마시고 시원하다던 어르신들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나도 그 나이가 훨씬 넘어섰다.


고향을 찾아갈 때마다 같이 다녔던 그 길에서 부모님을 다시 만난다.

후식으로 섬진강변에서 수박을 쪼개 었던 복날이 어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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