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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U Oct 24. 2022

삶의 유통기한

편의점 김밥의 유통기한, 그리고 친구의 죽음.

*해당 글은 실제와 무관하며 특정 상황을 가정한 픽션입니다. 재미로 보아주세요.




“기사님, 죄송한데 조금만 더 빨리 가주세요.”


“허허. 여기서 어떻게 더 속도를 내요. 성격이 급하시네 아가씨.”


“친구가 죽었대요. 20년 친구예요.”

기사님은 말없이 액셀을 밟는다. 급히 차선을 바꿀 때마다 사람들의 짜증 섞인 욕설이 타고 있는 택시를 빠르게 비켜간다.


“감사합니다. 잔돈은 안 주셔도 돼요.”



학창 시절 공부를 꽤나 잘하던 진이는 대학교에 다니다 제 발로 중퇴했다. 어느 날 잠깐 만날 수 있냐던 진이. 만나서는 대뜸 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정했다는 진이. 대체 왜 그래야 하는지 물어봤을 땐 이미 지칠 대로 지친 표정을 보이던 진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공장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말하던 진이. 말은 공장이지만 대기업 계열사라 보수 걱정은 없을 거라고 나를 안심시키던 진이.


지난 20년 동안 진이는 집이 경제적으로 힘들다고 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진이가 처음으로 힘들다고 울면서 전화를 했다. 이제 괜찮아졌다는 아이를 밖으로 겨우 끌고 나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집 사정이 어느 정도로 안 좋은 거냐고. 생각해 보면 진이가 외동딸이라는 거 외엔 가족에 대해 알고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진이도 먼저 나서서 말하지 않았고 나도 진이가 말 꺼내길 어려워하는 것 같아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그날 진이는 처음으로 나에게 화를 냈다. 그딴 거 물어볼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다고.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라는 문자의 행간에는 진이를 향한 원망도 있었다. 그렇게까지 화낼 일이었니. 답장을 받고는 그 원망이 더 커졌다.


「미안한데 오늘 오후 중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갈 거야. 그 사람이 나에 대해 어떤 질문을 하던 연락 안 한 지 오래돼서 모르겠다고 말하면 돼. 미리 고맙다.」 용기를 내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다짜고짜 내 번호를 모르는 사람에게 팔았다고 하는 게 괘씸했다.


그날 저녁에 전화가 왔다. 진이의 옛 친구를 통해 나의 전화번호를 받아낸 진이의 어머니였다. 진이의 요청대로 아는 게 없다고 답했고, 원망의 감정 때문인지 과장까지 보태 진이와는 손절한 지 오래되었다고 덧붙였다. 진이는 어머니와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낸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빈소에는 진이 어머니가 홀로 계셨다. 기쁜 듯 슬픈 듯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 속 진이의 얼굴이 보이자 참아왔던 눈물이 쏟아졌다.


“맨날 먹던 걸 직접 내 손으로 만드니까 신기하더라?”

진이는 편의점으로 납품되는 즉석식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다. 우스갯소리로 김밥을 만들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입에 침이 고인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랍스터도 아니고 스테이크도 아닌데 겨우 그걸로 침이 고이냐며 타박했다. 한편으로는 그 아이가 긍정적으로 일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어느 날은 하루가 고되었던지 새벽 동안 메시지가 와있었다.



「수아야. 나는 편의점 음식만큼 유통기한이 짧은  있을까 싶었거든?  삼각김밥 같은  2-3일만 지나도 폐기해야 되잖아. 그런데 그만큼 짧은  있더라고.


「나 잘 살고 있는 거 맞겠지? 정말 객관적으로 말해줄 수 있어?」


「아니다 괜한 말 했다. 잘 자.」



아침이 되어서야 메시지를 확인했다. 뒤늦게 잘 살고 있다고,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거라고 답장을 보냈다. 괜한 말 아니니까 힘들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보내려다 내 코가 석자인 것 같아 차마 전송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알고 있는 번호지만 모르는 척해야 했던 그 번호로 한 번 더 전화가 왔다. 진이의 어머니였다. 진이가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는데 장례를 도와줄 지인이 없어서 괜찮다면 손을 빌릴 수 있겠냐고 하셨다. 나는 바보같이 요새 공장일이 바빠서 답장이 늦는 줄로만 알았다. 진이와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가장 먼 사이라고 생각했던 어머니의 입을 통해 죽음을 전해 들었다는 게 기분이 묘했다. 죽음을 실감하기도 전에 이런 생각부터 하다니.






“와 줘서 고마워요. 수아 씨 맞죠?”

어쩐 일인지 진이의 어머니는 내 얼굴을 알아보셨다.


“진이랑 계속 친하게 지내는 거 알고 있었어요. 진이 공장에 화재가 났어요. 평소 점검도 잘 안됐고 사고 당시엔 대피할 새도 없었다고…”


“네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 무슨 말로 위로를 드려야 할지..”


“이거. 진이 책상 서랍에서 발견한 거예요. 수아 씨 곧 생일이죠? 미리 편지를 써놨나 보더라고요.”


귀여운 아보카도 캐릭터가 그려진 편지봉투였다. 말 그대로 눈물이 솟구쳤다. 밖으로 뛰쳐나가 정신을 바로잡고 편지지를 꺼냈다. 진이의 글씨체는 20년 간 변함없이 올곧았다.



수아에게.

수아야 30번째 생일 축하해.

혹시 저번에 내가 나 잘 살고 있는 거 맞냐고, 객관적으로 말해달라고 했던 거 기억나? 그 답을 찾은 것 같아. 나 잘 살고 있어. 그전까지 난 유통기한이 짧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쓸모가 없으면 바로 폐기되는 존재라고. 사실 공장에서는 매번 작은 실수만 해도 나를 해고할 거라고 협박했거든. 같이 일하는 몇몇 동료들은 본인 잘못도 아닌데 사고로 다쳤다는 이유로 해고되었어. 그래서 나도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존재라 생각했나 봐.

그런데 얼마 전 퇴근길에 배가 고파서 편의점에 들러 허겁지겁 김밥 한 입을 먹었거든? 와.. 너무 행복한 거야. 이 한 입을 맛있게 먹으려고 내가 오늘 힘들게 일했나 싶더라고. 웃기지만 손에 들린 김밥한테 대뜸 고맙다고 말했지 뭐야. 유통기한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길거나 짧거나 그냥 존재만으로도 누군가에겐 큰 기쁨이 될 수 있는 거더라고. 그래서 말인데 쑥스럽지만 나는 너에게 그런 친구가 되고 싶어. 존재만으로도 든든하고 기쁨이 되는 친구. 그런 존재가 된다고 생각하니까 내 유통기한이 무한으로 길어지는 것 같더라. 친구가 되어줘서 고맙다. 너의 30살을 응원해.

진이가.



편지를 다 읽고 고개를 들자 컨베이어 벨트에 놓인 김밥들처럼 대기업 이름이 적힌 채 일렬로 선 화환들이 눈에 들어왔다. 눈물을 훔쳐내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화환들을 다 엎어버렸다. 위선자들. 진이의 유통기한, 아니 진이의 삶은 이렇게 끝날 수 없어.


그렇게 진이의 끝은 나의 시작이 되었다. 발인을 마치고 나면 공장 근로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가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한 줄기의 기쁨이 되기 위해 시종일관 불안한 마음으로 일을 하다, 일터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도 쉬이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지금껏 애써 외면했던 이야기를 들으러 가야겠다. 도대체 그곳에서의 삶은 어떤 삶이었는지 알아야겠다.


그들의 삶을 묻고 듣고 세상에 알릴 것이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자신의 유통기한을 의심하지 못하도록, 모두가 동등하게 무한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상황

위 글은 '누군가의 끝' 이라는 가상의 상황 설정으로부터 출발한 픽션입니다.


글 연재 패턴

1주차 - 신문 기사나 사설 등을 기반으로 다양한 사회 현안에 대해 글을 씁니다.

2주차 - 하나의 키워드를 설정하여 자유롭게 에세이 형식의 논픽션 글을 씁니다.

3주차 - 하나의 상황을 설정하여 자유롭게 소설 형식의 픽션 글을 씁니다. (본문 글은 여기에 해당)

4주차 - 콘텐츠 (영화, 드라마, 도서, 영상 콘텐츠 등) 를 보고 느낀 감상을 글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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