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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독이 Jun 23. 2023

오늘도 발치에 사랑이 치인다 1

엽편, PART 01

빌라 계단에서 쿰쿰한 냄새가 올라오는 걸 보니 밖에 비가 오나 보다. 출근하려다 말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 신발장 근처에 놓여 있던 우산을 하나 챙겨들고 나왔다. 워낙 오래된 달동네 빌라이다 보니, 항상 비가 오기 전엔 계단에서 시멘트 악취가 올라오곤 했다. 어렸을 땐 친구들과 이 냄새가 시체 냄새가 아닐까 하며 키득거리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예 말도 안 되는 추측은 아닐 수도 있겠다. 여기 산 지 10년이 훌쩍 넘어가는데도 아직도 이 냄새는 익숙해지질 않는다.


빌라 현관을 나서자 비가 꽤나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한 발짝씩 걸어 나가며 우산을 펴려는데 발치에 무언가가 걸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지저분한 종이박스들이 중구난방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아니, 어떤 개념 없는 새끼가 계속 여기다가 쓰레기를 버려 놓는 거야? 거치적거려 죽겠네.’


언뜻 봐도 오래되어 보이는 종이박스들은 귀퉁이부터 빗물에 조금씩 젖어 들어가며 곰팡이가 슬어가고 있었다. 왠지 방금 내려온 빌라 계단과 유사한 냄새가 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뜩이나 비까지 내려 회사에 늦을까 봐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신경질적으로 종이박스들을 발로 차며 집을 나섰다.

하지만 몇 발자국 못 가서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 진동이 또 발목을 잡았다. 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회사 서류로 가득한 가방을 우산 쥔 손으로 옮기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이름을 확인하자 ‘할머니’라는 세 글자가 보였다. 잔뜩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자마자 할머니께서 지난밤부터 모아놨던 걱정들을 한 번에 쏟아내시는 것 마냥 잔소리를 하시기 시작했다.


“으응, 지선이냐? 하이고~ 아침은 챙겨 먹었냐? 할머니 병원에 있다고 밥 굶으면 안디야. 냉장고에 며르치볶음이랑 반찬 있으니까 단디 챙겨 먹어라잉, 알겠제? 그리고 여름이 오긴 왔나보다. 밖에 비 억수로 쏟아지니까 또 칠칠치 못하게 현관에 두고 가지 말고 우산 꼭 챙겨라잉. 너는 어려서부터 비 올 때 마다 넘어져서 꼭~ 어디하나 다쳐오곤 했응께 바닥 잘 보고 다니고잉! 그리고...”


“아, 알아서 할게요. 끊어요.”


가만두면 1시간은 족히 이어질 듯한 할머니의 설교 소리를 중간에 끊으며 통화 종료 버튼을 마구 눌렀다. 오늘따라 할머니의 사투리 섞인 억센 발음이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이젠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간 빼도 박도 못하고 지각이다. 아슬아슬하던 운동화 바닥이 결국 헐었는지 빗물이 양말을 적셔오는 게 느껴졌지만, 그딴 찝찝함 따위를 신경 쓸 새는 없었다. 뛰다시피 걸음을 재촉하며 회사 가는 버스를 겨우 타고 출근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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