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여행 중의 산책
그는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어디 가?"
"잠깐 해변에, 수영하고 싶어서."
"혼자서 가는 거야?"
"응."
"대단한데. 나는 혼자서 이것저것 잘하는 편이지만 수영은 못할 것 같아."
"왜? 뭐가 어때서?"
"혼자 해변에서 수영하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어."
"같이 갈래?"
그는 불쑥 물어왔다. 어, 오늘은 해야 할 게 있어서. 즐거운 시간 보내고 와. 나는 거절했다. 거절은 습관처럼 작동했다. 왜 거절했는지 모를 거절이었다. 미움을 덜 받고 싶다는 것이 습관적인 거짓말로 이어져왔다. 더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이 섬은 ‘해야 할 것’이 없는 곳이었다. 그는 도착한 이후, 매일같이 수영을 하러 나갔다. 얄미울 만큼 그는 다른 이들과도, 혼자서도 알차게 시간을 보냈다. 그의 하루를 채우던 것은 스스로 단단해진 이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었다. 내가 질투하던 눈빛이었다. 그는 수영을 갈 때 가끔 같이 가자고 제안했는데, 습관이 되어버린 거절을 그만두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두 번의 거절 끝에 나는 거절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근데 나 수영 못하는데 같이 가도 괜찮아?"
"그건 걱정 마. 나 물고기처럼 수영해. 내가 알려줄게."
바다로 나가는 길은 매일 봐도 질리지 않았다. 모래 빛만이 가득한 숙소의 거리를 걷고 있어도 바다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타는 듯한 모랫빛 거리의 끝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한순간 바다가 트인다. 다시 발걸음은 새로워진다. 새파란 부두를 따라 걸으니 해변이 나왔다. 해변은 내가 좋아하던 산책로에서 2분 정도만 더 걸으면 나오는 곳이었다. 잠깐 잊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조금 더 걷거나 살짝 방향만 틀어도 새로운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는 그런 곳.
해변은 북적였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여름과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수영하는 사람들, 모래에 배를 깔고 책을 읽는 사람들,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떠는 친구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주체할 수 없는 사랑에 어쩔 줄 모르는 연인들… 해변은 순간의 충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몸속에 뜨거운 기운이 차올랐다. 살아있음이 성큼 다가와 온몸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생이 축복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순간이기도 했다. 릴케의 시가 생각났다.
하루하루를 일어나는 있는 그대로 맞이하십시오.
바람이 불 때 흩어지는 꽃잎을 줍는 아이들은
그 꽃잎을 모아둘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꽃잎을 줍는 순간을 즐기고
그 순간에 만족하면 그뿐입니다.
- [인생이란] 중, 라이너 마리아 릴케
해변의 사람들은 아이들이었다. 그저 존재하는 순간들을 유영하는 아이들이었다. 마음이 간질거리고 붕 뜬 느낌에 헛구역질이 날 듯했다. 지금껏 나에게 부여된 순간들을 잘못 대하고 있었구나. 나의 순간들은 빠짐없이 '좋은 학교', '좋은 직장', ‘더 나은 나’ '좋은 무언가 들'이라는 목표를 향하고 있었다. 목표에 묶여버린 순간들은 자체의 찬란한 빛깔을 잃어간다. 그렇게 사라진 순간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한 번뿐인 나의 모든 순간들은 그렇게 늘 어딘가에 묶여 있었다.
어떤 이도 자신의 몸매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듯했다. 여름의 바닷바람과 조금이라도 더 닿기 위해 사람들은 살갗을 있는 드러냈다. 그 분위기에 어렵지 않게 나도 수영복으로 갈아입을 수 있었다. 팔다리에 그대로 와닿는 바닷바람은 순간을 둘러싸고 있던 껍질을 한 꺼풀씩 벗겨내려 갔다. 여름 한낯의 수군거림과, 바닷바람과, 형형색색의 수영복과, 에메랄드 빛 바다, 이 모든 충만한 순간들의 한복판에서 나는 그저 ‘좋다’라는 말만 연신 내뱉을 뿐이었다. 같이 이곳에 오자고 제안했던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 뜨거운 충만함에 물속에 들어가고 싶어졌다. 수영하는 법을 몰랐던 나에게 그는 물에 뜨는 법을 알려주었다.
"물을 무서워할수록 뜨는 건 힘들어져. 몸에 힘을 빼야 하는데, 물을 무서워하면 그게 안 돼. 처음에는 잡아줄 테니까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고, 몸의 경직된 부분이 있는지 계속 집중해 봐. 명상이랑 비슷해. 뜰 수 있으면 곧 수영도 할 수 있어."
눈을 감고 힘이 들어간 부분들을 하나둘씩 찾아내야 했다. 힘을 준 적은 있어도 뺀 적은 없었다. 몸에는 크고 작은 힘들이 풀어지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경직된 몸을 달랬다. 이제부터 힘을 빼는 연습을 해보겠다고, 지금껏 그러질 못해 미안하다고. 조금씩 몸을 이완시켰다. 느껴지는 건 나의 호흡뿐이었다. 그럼에도 몸에는 빼지 못한 힘이 남아있었는지 도움 없이는 물에 뜰 수 없었다.
그날 저녁, 침대에 누워 바다의 촉감을 떠올렸다. 내일은 혼자서 뜰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은 무섭지 않았다. 그저 힘을 빼본 적 없었을 뿐이었다. 내일이 기다려졌다.
"오늘도 나랑 수영하러 가줄 수 있어?"
다시, 나는 바다의 한가운데에 누워있다. 스스로 물 위를 뜨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물 위를 스스로 떠다닐 수 있게 되자 그다음은 뒤따랐다. 나는 몸을 뒤집을 수 있게 되었으며, 깊은 물속에서도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바다는 깊고 고요했다. 찰랑거리는 파도는 따뜻하게 느껴졌다. 스스로를 가두고 있던 틀을 계속 두드려 준 그에게 감사했다. 우리는 해변에서 맥주를 마시며 노을을 바라보았는데, 마치 나를 뒤흔드는 책 한 권을 만난 것 같았다. 그 책은 살아있었고,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