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그림과 원재훈 시인의 시
책의 표지에 그려진 자연 그대로의 순수함, 소박함, 그리고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는 그림들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그림들이 헤르만 헤세의 그림들이었다는 것은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얼마 전 헤르만 헤세의 책 <싯다르타>를 읽고 서평을 했던 터라 내가 헤르만 헤세라는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게 내심 부끄러웠다. 그래서 그랬는지 한동안 멍하니 그림을 감상했다. 사실 누가 그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난 이 그림들이 헤르만 헤세가 그렸다는 걸 알기 전부터 이미 이 그림들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의 그림은 자연을 주제로 한 그림이 대부분이다. 산, 나무, 꽃, 강, 호수, 들판 등 그의 그림은 "초록초록" 하다. "초록초록"한 그림은 언제나 좋다.
<시의 쓸모>라는 책은 등단한 지 이제 33년이 되는 시인이자 소설가인 원재훈 작가의 책이다. 이 책은 그동안 원재훈 작가가 글을 쓰면서 이슬 방을 처럼 떨어진 작가의 마음을 담은 책으로 시와 문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을 위해 창작 활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써 내려간 작은 결과물이다.
이 책은 대학에서 여러 편의 문학 강의를 듣는 기분이 드는 책이다. 재미없고 지루할 거라는 편견을 완전히 깨고 독자를 저자의 창작 활동의 경험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한다. 책의 중간중간 작가의 짧지만 임팩트 있는 글과 헤르만 헤세의 그림이 절묘하게 합쳐지며 또 하나의 새로운 예술작품이 탄생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나만의 강의 요약 노트를 만들었다. 오늘의 서평은 "나만의 강의 요약 노트이다."
제1강 메모는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한 사전 작업입니다.
월트 디즈니는 미키 마우스라는 유명한 캐릭터를 창조합니다. 과연 어디에서 영감을 얻었을까요? 그가 사업에 실패하고 집으로 가는 기차 안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모습이 마치 물에 빠진 생쥐와 같았다는 거지요. 이런 아이디어를 작품으로 실현하려면,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이 필요할 겁니다. 하지만 동기가 중요합니다. 동기는 자동차의 앞바퀴입니다. 책은 한 문장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 문장을 어떻게 쓸 것인가? 그것은 내 인생의 첫 문장을 뽑아내는 일과도 흡사합니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당신 책의 첫 문장을 잘 쓰기 위해서는 누군가 툭 던지는 말처럼 평범함 것들에 주목해야 합니다.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를 메모하고 기록하고, 문득 다가온 말 한마디를 놓치지 않는 집중력이 좋은 작품을 만드는 필요조건입니다.
<시의 쓸모 중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든 것을 기록하는 습관이라고 한다. 한 명의 작가가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메모가 쓰였다가 지워졌을까? 하나의 책이 출판되어 서점에 진열되기까지의 과정을 상상해 보자. 수많은 문장을 썼다 지웠다 했을 작가의 고뇌와 노력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그려지는 건 너무 당연한 현상이다. 책 한 권에 선택받아 쓰인 문장보다 지워진 문장이 더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지워진 문장들이 의미가 없을까? 그렇지 않다 언젠가는 그 문장들 또한 빛을 볼 날이 올 것이다. 우리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지만 메모지에 적힌 문장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작년 11월부터 블로그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처음 느꼈던 기분은 망망대해를 이정표도 없이 항해하는 선장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막상 배를 타고 바다로 나왔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 막막한 감정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대략 1년이라는 시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도 사실 별반 다를 게 없다. 매번 어떤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에서부터 막막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나마 조금 나아진 게 있다면 기록하는 습관을 통해 블로그 글쓰기 아이디어를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생각이나 책을 읽다가 기억하고 싶은 문구를 발견했을 때 그냥 지나치지 않고 메모를 해 두었다가 글을 쓸 때 활용할 수 있는 단계로 까지 발전했다. 작가의 말처럼, 나 또한 기록하는 습관과 메모하는 습관이 있으니 언젠가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긴다.
제2강 언어에서는 단어가 씨앗입니다.
언어에서는 단어가 씨앗입니다. 한 단어가 글의 씨앗이 되어 문장이라는 줄기를 만들고, 그 줄기를 통해 꽃이 피듯이 한 문장이 완성되는 거지요.
지금부터라도 주의에 있는 단어들을 잘 보살피고 적절한 시기에 사용하는 기술을 연마하시길 바랍니다. 아마도 시행착오를 거듭해야 좋은 문장이 탄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좋은 문장 만드는 일은 배움을 통해 나 자신을 만드는 일과 많이 닮았습니다.
<시의 쓸모 중에서>
시작은 언제나 하나의 단어이고 단어와 단어가 합쳐져서 문장이 되고 그 문장들이 모여 결국에는 하나의 시, 소설이 된다. 한 권의 책이 출판이 되어 서점에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흡사 한 인간의 삶의 무게와 비슷하다.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감이 한 권의 책에 깃들여 있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에게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또 하나의 꿈이 생겼다. 하루에도 수백 개씩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 중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의 문장으로, 글로 담아두고 싶었다. 글을 잘 쓰지 못하는 내가 글을 쓴다는 게 과연 말이 되는가 싶다가도 브런치에서 작가로 승인해주었으니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래, 나도 이제 작가다!"
제3강 좋은 글은 태양 빛을 받아 종이를 불태우는 돋보기처럼 대상과 적당한 거리 조정을 하고 다가가는 겁니다.
나무들은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잘 자랍니다. 나무와 나무가 너무 가까이에 있거나 너무 멀리 있다면 울창한 숲을 이룰 수 없습니다. 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대상이나 생각을 쓰고 싶다면, 나무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듯이 적당한 거리 조정이 필요합니다. 거리감이 지나치게 멀거나 가깝다면, 좋은 문장이 나올 수 없겠지요. (중략) 대상은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밀착된 상태의 문장은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없을 겁니다. 가수가 슬픈 노래를 부를 때 엉엉 울면서 부른다면, 그 노래가 제대로 들릴 수 없습니다. 반대로 심리적 거리가 너무 멀리 있다면,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고, 수박 겉핥듯이 무심하게 본질을 지나치는 것입니다. 마치 학위 논문이나 제품 사용설명서 같은 느낌이 들겠지요. 이건 시가 아닙니다. 좋은 시는 대상을 표현할 때 적당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합니다.
<시의 쓸모 중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영어로는 relationship이라고 한다. 관계라는 뜻의 relationship은 relate 연결하다 라는 단어에서 온 명사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한다는 건 그 둘 사이에는 항상 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무 멀어도 너무 가까워도 안 되는 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이다.
좋은 시란 심리적으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시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적당한 거리를 우리는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은유", "대조", "비유" 등을 시를 쓸 때 적용하는 게 아닐까? 이 책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다양한 글 쓰는 방법을 알려주는데 이 모든 시 쓰기 기술은 심리적으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좋은 시를 쓰기 위함인 것 같다.
제4강 글쓰기란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하나둘 적어가는 작업이다.
잠시라도 혼자 있어 본다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천천히 뒤돌아보면 내가 사랑하는 일, 하고 싶었던 공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나는 그 자체로 존재감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겠지요. 어떤 상태이든 간에, 우선 이런 생각을 끌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혼자 있을 때 빛나는 사람과 어두운 사람이 있습니다. (중략) 혼자 있을 때 몸가짐이나 태도를 잘 유지한다면 뭐든 잘할 수 있을 겁니다. 혼자 있는 순간은 위대한 순간입니다. 시는 이러한 순간을 매우 사랑합니다. 시는 혼자 있는 사람들이 손에 쥐고 있는 간절한 펜에서 흘러나오는 언어의 피이고, 여태 알 수 없었던 숭고한 존재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신을 대면하는 성자의 눈처럼, 시는 영혼의 신성한 장소로 이동하기도 합니다. 진정으로 시를 만난다는 것은 바쁜 일상적인 삶에서는 체험할 수 없는 특별한 순간입니다. 이미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은 한 편의 좋은 시입니다. 잘 읽어낼수록 가치가 올라갑니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기에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을 살 의무가 있습니다.
글쓰기도 이러한 작업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하나둘 적어가는 작업입니다. 잘 쓴 글이란 절묘하게 대상을 써내는 것입니다. 나라는 대상을 조금 더 알고자 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혼자서 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선택한 자발적 고독을 너무 무서워하지 마시고, 먼 산을 바라보듯 마음에 가까이 두고 바라보십시오. 사람은 결국 홀로 태어나 홀로 사라집니다. 요람과 무덤은 결국 같은 공간입니다. 지금 두 손의 손바닥을 펴고 내가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눈으로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지금 쥐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 그것이 대단한 것들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손바닥을 펴보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빈손이 됩니다.
<시의 쓸모 중에서>
블로그에 쓰는 글은 정보성 글이 대부분이다. 정보성 글을 제외하고 나의 생각과 의견이 들어간 글은 서평에서 쓰는 글이 유일하다. 책 서평을 통해 조금씩 글이라는 걸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글쓰기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하나둘 적어가는 작업이라는 작가의 말을 난 깊이 공감한다. 나에게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는 내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과 같다. 침묵하고 있는 또 다른 나에게 내가 말을 거는 것이다. 마음이 심란하고 답답한 날은 컴퓨터를 켜거나 펜을 든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거나 펜으로 끄적끄적 대다 보면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온한 감정이 나를 감싼다.
예전의 나는 홀로 있음을 잘 견뎌내지 못했다. 누군가와 항상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언제나 난 친구, 친구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 마음속 깊은 공허함은 줄어들지 않았다.
혼자 있는 시간이 익숙해지기 시작한 건 성인이 된 후 뒤늦게 공부를 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오로지 혼자와의 싸움이었다. 하루에도 몇 시간을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고 책을 보고 공부를 해야만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난 지금도 공부하는 것을 좋아한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혼자 있는 시간이 익숙함을 넘어 그 시간을 즐기기 시작한 건 글을 쓰면서부터이다. 글을 쓸 때는 오로지 혼자이다. 책을 읽는 순간도 혼자이긴 하지만 책을 읽을 때는 난 작가와 대화하는 기분이 들어서 오로지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오로지 나 혼자만의 시간이고 난 그 시간을 즐기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젠 인간관계에도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다.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상대와 적절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는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서로가 가장 편한 때에 웃으면서 볼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적당한 심리적 거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제5장 용서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자크 데리다) 분노를 자제하지 못하고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미래는 없다.
공자,부처, 예수 등 성인들은 용서의 대가입니다.
공자는 인으로, 부처는 자비심으로, 예수는 사랑으로 사람들을 선한 길로 인도합니다.
간혹 기도를 통해서 접근하려 해도 용서는 어려운 문제지요.
<시의 쓸모 중에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들면
임진강가에 선다
아주 잠깐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고
강물을 바라본다, 미워하기에는 너무나 작은 얼굴
내 마음엔 어느새 강물이 흘러들어와
그 사람의 얼굴을 말갛게 씻는다
그래, 내가 미워했던 것은 어쩌면,
그 사람의 얼굴에 묻어 있던
삶의 고단한 먼지, 때, 얼룩이 아니었을까?
그래, 그 사람의 아픔이 아니었을까?
그래,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나의 상처가 아니었을까?
원재훈, <임진강1> 중에서
벌써 10년 가까이 지난 일이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 집 근처 성당에 갔다. 모두가 잠든 시간인 새벽에 알람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눈이 먼저 떠졌다. 내 안의 분노라는 감정이 날 매일 새벽에 눈뜨게 했다. 내 안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새벽기도를 가는 일이었다. 그렇게 새벽기도를 다니다가 우연히 성당 벽면에 붙여진 "성경공부모임"이라는 포스터를 보게 되었고 그날부터 그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기 위한 나만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난 성경공부모임을 하면서 내가 정작 용서할 대상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느 순간은 살짝 허무한 감정마저 들었다.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용서해야 할 대상이 사라지고 나니 내가 위로해야 하는 건 상대를 미워하는 감정으로 피폐해진, 상처 투성이인 나의 마음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뒤돌아 보니 정말로 그랬다 내가 미워했던 대상은 "그 사람의 얼굴에 묻어 있던 삶의 고단한 먼지, 때, 얼룩"이었지 그 사람이 자체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를 미워했던 건 원재훈 시인의 시처럼 "상대의 아픔이거나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나의 상처"였던 것이다.
<이 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