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나락의 끝
사진 : 김범순 - 몬세라트 스페인 발렌시아주
지나가는 사람들이 맨발의 김 여사를 힐끔거리며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자주 들렀던 아파트 상가 옆 카페 여사장이 호들갑스럽게 뛰어나오며 어서 들어오라고 했다. 카페 주인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거리며 김 여사가 즐겨 마시는 커피를 건넸다. 돈 없다니까 그런 줄 안다고 했다.
“이거 드시고 화 푸세요. 부부싸움 하셨지요? 저도 얼마 전에 그이랑 싸우다 홧김에 맨발로 뛰쳐나온 적이 있었거든요.”
넋이 나간 김 여사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말은 없고 우선 이거라도 신으세요. 저녁 알바 거라 일곱 시 전에 돌려주시면 돼요.”
돌려줄 수 없었지만 김 여사는 커다란 삼선 슬리퍼를 신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정신이 늪에 고인 혼탁한 물 같아 도무지 가닥을 잡을 수 없다. 그때 반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카페 주인한테 남편과 통화해야겠다며 핸드폰을 빌려달라고 했다. 카페 사장은 무제한 요금제니까 마음껏 쓰라고 했다. 공원으로 나와 전화를 걸었다.
“나 며칠 데리고 있으면서 일자리 좀 주선해 주세요.”
어렵사리 알게 된 언니였다.
“내가 미쳤니? 소개비 떼 처먹고 싶어 환장하는 도둑년을 집에 들이게?"
"이렇게 부탁할게요."
"그러게 처음에 내가 뭐랬니? 한 사장 믿지 말고 나를 믿으라고 했지!”
기대가 무너지자 김 여사는 악감정이 치받쳤다.
“그게 싫으면 한 사장이랑 여섯 달 만에 깨졌으니까 이천만 원 뱉어내!”
“어쩌니? 나는 한 번 받은 소개비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뱉어내지 않거든. 정 억울하면 고소해!”
전화가 딱 끊어졌다.
이런 천벌 받을 여편네!
억울하고 분해서 땅이 폭삭 꺼지도록 발을 구르고 싶었다.
어떡하나?
당장 오늘 밤 잘 데가 없다.
아 참 선희가 있지.
선희 핸드폰 번호가?
언제나 선희만 눌러 통화했으니 번호는 까맣게 모른다. 미치고 팔짝 뛰겠다. 어렵사리 알게 된 언니 번호는 하도 소개비 재촉을 해대서 세뇌되었던 것.
어쩔 수 없어 미숙이 근무하는 식당을 검색해 전화를 걸었다. 재워 줄 수 없는 처지인 줄 뻔히 알지만 의지할 데가 미숙이 밖에 없다.
미숙은 아들 간수를 잘했어야지 어쩌다 그 꼴을 당했느냐며 부옇게 퍼붓고 나서 일단 식당으로 오라고 했다. 풀 죽은 김 여사가 힘없이 말했다.
“안 재워 줄 거면 갈 것도 없어.”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미숙이 소리쳤다.
“그래 그럼 오지 마!”
미숙이 근무하는 식당은 은평구 신사동에 있었다. 반포에서 걸어가기는 아득하게 먼 거리다. 얇은 티셔츠와 무릎길이의 치마만 입은 김 여사가 와들와들 떨며 한강대교를 건널 때 기어이 발등이 까졌다. 이대로는 도무지 안 될 것 같았다.
지나가던 승용차를 얻어 타려고 손을 들었다. 본 척도 하지 않고 쌩쌩 지나쳤다. 절룩거리며 용산역 근처를 지나는데 길 가던 중년 남자가 측은하게 쳐다보았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저, 죄송하지만 전화 좀 한 번 쓸 수 있을까요?”
남자가 선선히 핸드폰을 건넸다. 식당으로 전화를 걸자 미숙이 냉큼 받았다.
“빨리 안 오고 뭐 해?”
“야, 나 도저히 못 걷겠다. 택시 타고 갈게 차비 좀!”
미숙은 김 여사 행색을 보고 혀를 찼다.
“속상해 죽겠다 정말! 한 사장 만나게 해 줘서 고맙다고 선물한 명품 가방 상표도 안 뗐는데 도대체 이 꼴이 뭐냐?”
미숙은 얼른 담요로 김 여사를 감싸주고 식당 주인 눈치를 보며 밥과 반찬을 가져와 따뜻한 국에 말아서 천천히 많이 먹고 힘내라고 했다. 한 사장과 맛있게 먹으려고 아침도 거른 김 여사였다. 막 점심 먹으려다 그 난리가 나는 바람에 4시 반 훨씬 넘은 그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국에 만 밥을 허겁지겁 퍼 먹고 있는데 미숙이 앞으로 어떡할 거냐고 물었다. 김 여사는 수저질을 멈추고 힘없이 대답했다.
“몰~라!”
정말 어떡해야 좋을지 막막했다. 밥을 다 먹자 미숙이 패딩 점퍼와 두꺼운 바지, 폭신한 털 신발을 건넸다. 체격이 비슷해서 딱 맞아 천만다행이었다. 식당을 나서며 김 여사가 고맙다고 했다. 미숙은 재워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똘똘 말린 돈을 쥐어주고 눈물을 훔치며 문을 닫았다.
- 어디로 가지? -
손을 펴고 물끄러미 미숙이 건넨 전 재산을 들여다보았다. 한 사장과 살면서 누렸던 풍요의 시간이 십만 원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며 드넓고 허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태어나서 이날까지 가진 것 없이 살아온 김 여사였다.
- 그래, 아프지만 않으면 돼! -
절망 끝에 다다르니 새로운 용기가 솟았다.
23. 사는 게 즐겁다
사진 : 김범순 - 파리 오르세 미술관 식당
김 여사는 아파트 단지와 빌라, 주택이 밀집한 사거리 장터로 갔다.
또래로 보이는 여자가 마트에서 할인하는 여섯 개 묶음 무 다섯 다발과 배추 열 포기, 총각무 세 단, 파 네 단, 갓과 미나리를 사는 게 보였다. 김 여사는 얼른 옆에 서서 배추가 단단한지 만져보며 아주 싱싱해서 좋다고 혼잣말을 했다. 또래 여자가 냉큼 그렇다고 말을 받았다.
됐다!
김 여사는 쾌재를 부르며 말을 걸었다.
“벌써 김장하시게요? 우리 집은 저기 아파트 앞에 있는 빌라 촌이에요.”
여자는 김장은 아니고 가족 모임이 있다며 배추 세 통씩 묶은 다발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뛰었다. 김 여사가 얼른 오른손에 있는 배추묶음을 받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천천히 가요. 넘어지면 큰일 나요. 뭐 빠트린 것은 없고요? “
“아 참, 젓갈하고 마른 고추!”
“내가 천천히 차에 옮겨 놓고 있을 테니 사 가지고 와요.”
“아유, 고마워요!”
“고맙긴요. 나는 혼자 살아서 시간 죽일 일만 있으면 이렇게 신이 난답니다!”
장을 다 본 여자가 운전석에 앉았다. 김 여사가 조수석 문을 열고 말했다.
“2년 전까지 솜씨 좋은 찬모로 일했어요. 아들이 대기업 다니는데 과장으로 승진하더니 일을 못 하게 해서 놀고 있는데 심심해 죽겠네요. 김치 명인이 울고 갈 정도인데 도와줄까요?”
여자가 좋다고 했다.
차가 아파트 옆 자그마한 주택 앞에 멈췄다.
열 포기 배추김치에 나박김치, 무 세 개 석박지, 총각김치 거리 세 단, 쪽파김치 거리 세 단. 김 여사한테는 소꿉놀이나 다름없었다.
마당에 있는 수도 가에 자리 잡고 앉아 여자가 손댈 것 없이 배추부터 겉잎을 떼어 반으로 갈라 절이고 채소와 쪽파를 다듬고 마늘을 깠다.
대인 관계에서는 아랫사람 노릇이 편하다는 걸 아는 김 여사였다. 여자가 두 살 적었지만 깍듯하게 언니라고 불렀다. 자리가 사람 만들더라고 여자는 언니 노릇을 하기 위해 김 여사를 살뜰하게 챙겼다.
이튿날 오후 뒷설거지까지 깔끔하게 끝낸 김 여사가 이젠 집에 가야겠다고 했다.
여자가 고마웠다며 골고루 담은 김치통 네 개를 장바구니에 담아 건넸다. 골칫거리나 다름없어 싫다고 하려다 그래도 혹시 몰라 못 이기는 척 받았다. 아무리 가까워도 김치 통이 있으니 택시 타고 편하게 가라며 여자가 만 원을 건넸다. 품삯을 제대로 받자면 이십만 원도 모자랐지만 어쩌다 하룻밤 신세 질 곳을 확보한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동생, 심심하면 또 놀러 와. 집에 없을 수도 있으니까 꼭 전화하고. 아 참. 번호를 알아야 서로 연락하지!”
김 여사는 깜빡하고 핸드폰을 놓고 나왔다며 번호를 적어달라고 했다.
김 여사는 전날처럼 마트 앞에서 장 보는 중장년 아낙들을 살폈다. 한 시간 넘게 서성였으나 할인 행사가 끝나서 어제와 달리 한산했다. 그때 나이 지긋한 노부인이 커다란 배추 묶음 세 다발을 한꺼번에 들려고 낑낑거리는 것이 보였다.
고집으로 똘똘 뭉친 꼬장꼬장한 얼굴이었다. 저런 사람이 오히려 속정 깊고 의리가 있다. 김 여사가 재빨리 다가갔다.
"제가 들어드릴까요?"
노부인은 화를 벌컥 냈다.
"힘들어 죽겠어 말 시키지 마!"
차 트렁크에 배추, 무, 파를 실은 노부인은 꼿꼿한 뒷모습을 보이며 시장으로 들어갔다.
얼마 뒤 노 부인은 양손에 올망졸망한 비닐봉지를 잔뜩 들고 나타났다. 마트 앞에 쌓인 무를 골라 한쪽에 놓는 척하고 있던 김 여사가 큰 소리로 물었다.
"차 키 꺼내시게 오른손에 있는 봉지 받아 드려요?"
“그러던가!”
말하는 품새가 만만치 않다. 김 여사가 손에 든 봉지들을 꼼꼼하면서도 능숙한 솜씨로 차 안에 쌓으며 말했다.
“사모님, 저 전철역까지만 태워주세요?”
“여기서 가까워 걸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차를 얻어 타야 했다. 일단 차만 타면 찰거머리가 되어 저 집에서 하룻밤을 보낼 것이었다. 노부인이 차 문을 열었다. 김 여사가 조수석 문을 열고 얼른 발을 올렸다. 노부인이 버럭 소리쳤다.
“여기서 15분도 안 걸린다니까!”
“신이 작아서 발 뒤꿈치가 까져서 그래요.”
“얼른 차 문 닫아!”
노부인은 차 문이 열려있는 채로 출발했다. 김 여사가 재빨리 발을 내리지 않았으면 크게 다칠 뻔했다. 김 여사가 욕설을 퍼부었다.
- 빌어 처먹을 할망구 같으니라고. 가다가 똥차 빵꾸나 나라! -
11월 짧은 해가 저물어 사위가 깜깜했다.
오늘은 어디서 자야 하나?
정말 큰일 났다.
그때 요란한 광고 음악을 켠 쇼핑몰 차가 김 여사 앞에 딱 멈췄다. 김 여사가 지금 누구 약 올리느냐고 길길이 날뛰며 차를 향해 주먹질을 했다.
차 옆면의 커다란 로고가 형광색으로 빛나며 김 여사를 한껏 비웃었다.
- 사는 게 즐겁다 -
終
참고 자료 : 네이버 동물 공감 동그람이.
네이버 지식백과, 네이버 지식인.
네이버 블로그 jobsN.
네이버 블로그/ happinggo/220908291421.
국민일보 2014. 04.04 네이버뉴스.
네이버 블로그 INFORMATION FACTOR.
blog. naver.com/ cyjsum in/220885748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