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수상가옥
사진 출처 : 고은별 촬영 - 스페인 이비자 공항
누군가 벨을 누르며 주먹으로 현관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누구세요?”
문만 두드릴 뿐 대답이 없다.
김 여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누군가의 내연녀로 산다는 건 계속 물이 불어나는 수상가옥에 사는 것처럼 불안했다.
요즘 들어 아파트 광장에 수상쩍은 남자가 서성이면 한 사장 부인이 보낸 염탐꾼이 아닐까 긴장됐다. 어젯밤에도 꿈인지 가위에 눌린 건지 한 사장 부인이 가슴에 올라타고 목을 졸랐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괴로워하다 깨어보니 베개에 목이 받쳐있었다.
순간 김 여사는 한 사장 부인의 사주를 받은 폭력배가 쳐들어왔다고 판단했다. 심장이 졸아들며 온몸을 바들바들 떨렸다. 사는 게 즐겁다는 걸 이제 막 알았는데 여기서 끝내야 하다니! 절대 그럴 수 없었다.
- 끝까지 버틸 거야. 문만 열어주지 않으면 돼! -
한참 두드리던 사람이 빽! 소리를 질렀다.
“택배요, 택배!”
“아-!”
목주름 없애는 화장품이 오후에 배달된다는 문자 받은 게 그제야 생각났다. 안심하고 문을 열던 김 여사는 숨이 멎도록 놀랐다.
노숙자나 다름없는 행색의 아들이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
김 여사가 소리치며 거칠게 문을 닫는데 아들이 필사적으로 막아 가까스로 걸쇠만 걸었다.
“어서 가. 나 이제 니 에미 아니야. 죽었다고 생각해!”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물어물어 여기까지 찾아왔겠냐고요. 온종일 굶었더니 배고파 죽겠어. 밥 좀 줘요. 엄마 얼굴 봤으니까 밥 먹으면 금방 갈게.”
“뒤지게 생겼다고 지랄해서 봉급 받은 거랑 전세까지 빼서 몽땅 줬잖아. 1년도 안 됐는데 그 돈 다 어쩌고 굶고 다녀?”
“잘하려다 그렇게 됐지. 내가 얼른 돈 벌어서 엄마 호강 시켜줄게. 제발 한 번만!”
김 여사가 절대 들이지 않겠다고 버티자 아들이 협박했다.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어쩔 수 없네요. 달달 봉사 한 씨한테 엄마가 잠깐씩 살던 여러 남자 집에서 패물 슬쩍한 돈으로 내 빚 갚아준 거 까발릴 수밖에!”
자식이 아니라 원수나 다름없었다.
"좋아 니 마음대로 해!"
아들은 핸드폰을 꾹꾹 누르더니 문 사이로 팔을 쑥 디밀어 김 여사 코밑에 들이댔다. 한 사장 번호였다.
“너 정말 이럴래?”
“너무 한 건 엄마야. 지나가던 나그네가 배고프다 해도 밥 한 그릇은 주겠다!”
김 여사는 하는 수 없이 걸쇠를 풀고 문을 열었다.
“밥만 먹고 빨리 가. 그 사람 일찍 퇴근해.”
“알았어요.”
얼마나 오랫동안 안 씻었는지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김 여사는 코를 감싸 쥐고 아들을 욕실로 밀어 넣었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다. 아비는 화투로 도박을 하더니 아들은 게임 도박에 빠져 헤어나질 못한다.
김 여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아들 전화였다.
“엄마, 나 좀 살려줘! 돈 못 갚으면 간을 떼어 팔겠대!”
끔찍해서 진저리가 쳐졌다.
몇 번 속은 뒤에는 떼어갈 테면 떼어가라지 모르는 척하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다짐은 다짐일 뿐 막상 전화를 받으면 하나 있는 자식 당장 죽이는 것 같아 전전긍긍하며 빚을 얻으러 다녔다.
다람쥐 아줌마를 추천했던 미숙은 김 여사의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김 여사가 전세보증금까지 빼서 아들 빚 갚아주고 길로 나앉는 형편이 되자 미숙은 남편이 보름 동안 출장 갔다며 돌아올 때까지 있으라고 했다.
꼴딱꼴딱 시간이 흘러 떠날 날이 다가오자 미숙이 물었다.
“지낼 곳 정했어?”
“아니.”
“어쩌려고? 우리 집은 더 이상 안 돼!”
“알아. 벼룩도 낯짝이 있지. 단칸방 살이 부부한테 어떻게 더 신세를 지냐?”
“홀에서 잘 수 있는 식당 찾았어 거기서 일하자. 입주 요양보호사는 아무도 원하지 않으니까 재워주는 일자리는 식당밖에 없잖아?”
“이젠 엄두가 안 나서 못 하겠다. 아들 어렸을 때는 굶기지 않으려고 열심히 했고 열일곱부터는 게임 도박 빚 갚느라고 쉴 수 없었거든. 35년을 그렇게 살았더니 식당이라면 이에서 신물이 난다.”
“아이고 이 미련 퉁아. 그러게 작작 좀 하지. 사람 몸이나 하니까 이만큼이지 쇳덩이였어도 부서졌겠다!”
“돌이켜 보니 까마득한 게 어떻게 버텼나 싶다.”
그렇다면 어디서 지내며 무얼 먹고 산단 말이냐? 여기까지 생각하던 미숙이 발끈해서 한마디했다.
“그렇게 키운 아들 새끼는 에미가 이 지경인데 어디서 뭐 하고 자빠졌다니, 설마 지금도 도박에 미쳐있는 거 아니냐?”
김 여사가 힘없이 알면서 왜 그러느냐고 했다.
“자식이 아니라 웬수다, 웬수!”
수없이 원수라고 이를 갈았지만 막상 친구 입에서 아들 욕이 나오자 듣기 싫었다.
“신세 지고 있다고 함부로 내 아들 욕하지 마라. 네 아들딸도 별수 없더라!”
미숙은 김 여사가 오던 날부터 발 벗고 나서서 꼭꼭 숨어있는 뚜쟁이를 찾아냈다. 그 뚜쟁이가 바로 어렵사리 알게 된 언니였다.
김 여사는 씻고 나온 아들한테 한 사장 옷을 입혔다. 바짝 마르긴 했어도 인물이 훤했다. 그 훤한 얼굴이 반쪽 된 걸 보니 새삼 가슴이 미어졌다. 저 아들 하나 바라고 살았고 속 썩이기 전까지는 쳐다보기도 아까웠었다. 아들은 며칠 굶은 것처럼 허겁지겁 밥을 퍼먹었다.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
가슴을 찢어발기는 것 같았다.
아기 때는 맡길 데가 없어 업고 출근했다. 성격이 온순해서 식당 한쪽에 뉘어 놓으면 온종일 벙싯거리다 잠들곤 했다. 주방 보조 때라 성질 더러운 찬모한테 온종일 욕먹으며 정신 못 차리게 시달려도 아들을 업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꽃길보다 더 환했다.
- 지금부터라도 손 벌리지 말고 제 앞가림이나 했으면! -
가물었던 논에 물들어 갈 때와 자식 입에 밥 들어갈 때가 가장 흐뭇한 법이다. 김 여사는 고새 갖은 시름을 다 잊고 뭐가 맛있어 어떤 거 더 줄까? 묻고 있었다. 아들은 밥을 실컷 먹고 나더니 과일을 달라고 했다. 퍼뜩 정신이 돌아온 김 여사는 조금이라도 더 있으려는 수작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얼른 가! 이러고 싶었으나 과일 좀 먹겠다는데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김 여사가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과일만 먹고 얼른 가-!”
아들이 퉁명스럽게 알았다고 했다. 과일을 다 먹고 의자에서 일어나며 아들이 아 참, 어떡하지? 했다. 왜? 하고 묻자 입고 갈 옷이 없다고 했다. 김 여사가 화를 내며 입고 온 옷 있잖아! 하니까 저렇게 냄새나는 옷을 어떻게 입느냐고 발칵 성질을 냈다.
너 때문에 정말 못 살겠다! 김 여사는 아들 등짝을 마구 후려쳤다.
아들은 얼른 세탁기에 옷을 넣으며 옷이 마르면 곧바로 가겠다고 했다.
17. 칭찬
사진 출처 : 고은별 인스타그램 - 샤를드골 공항 파리
“누가 왔나?”
한 사장이 현관문을 열며 물었다.
아들 신발을 치우지 않았던 김 여사가 찔끔 놀라 얼른 신발장에 넣으며 대답했다.
“오긴 누가 와요? 택배 기사한테 여러 식구가 사는 것처럼 보이려고 당신 슬리퍼랑 구두 다 꺼내놓아서 그렇지.”
한 사장은 집안을 서성이며 자꾸만 이상하다고 했다.
“왜요. 왜 그러는데요?
“집안에서 낯선 냄새가 나!”
김 여사는 냄새는 무슨 냄새가 나느냐며 탄탄이 보내고 울적하다고 이런 식으로 사람을 들볶으면 어떡하느냐고 쏘아붙였다.
한 사장이 천천히 안방을 거쳐 작은방 문을 열어보고 아들이 있는 건넌방으로 다가갔다. 김 여사 얼굴이 새하얗게 바랬다. 한 사장은 건넌방 문까지 열어보고도 못내 의심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마디 했다.
“당신이 안절부절못하니까 더 이상하잖아!”
김 여사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내가 뭘요?”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꾼 김 여사가 말했다.
“얼른 밥 먹어요. 당신이 좋아하는 전가복 만들었어요.”
한 사장이 수저를 들었다. 김 여사가 전복을 골라 수저 위에 올려주며 말했다.
“나는 오로지 당신 오는 날만 기다리며 사는 사람이에요. 당신한테 최고의 요리를 먹이려고 장 봐다가 다듬어서 찌고 볶았는데 엉뚱한 소리 하면 살맛이 안 나잖아요. 그래요, 안 그래요?”
한 사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 요리 어때요 맛있지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리 언짢은 일이 있어도 맛있는 음식만 내놓으면 해결되는데 단단히 틀어진 모양이다. 어떻게 하면 기분이 풀어질까? 앞을 못 보니 윙크도 할 수도 없고 치맛자락을 감아올리며 춤을 출 수도 없다.
어렵사리 알게 된 언니가 명심하라고 했다. 남자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항상 즐겁게 해야 하며 절대 기분 나쁜 채 집을 나서게 하지 말라고.
갑자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 자꾸 잃어버려서 말 못 한 게 있어요.”
한 사장이 마지못해 뭔데 했다.
“사모님이 가지고 있는 상아 큐브 말고 일반 점자 큐브도 있나요?”
“독일 디자이너가 만든 거 하고 레고로 만든 루빅큐브가 있고 국내 생산 업체도 두어 군데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왜?”
“어쩜 당신은 모르는 게 없어요? 참 대단해요!”
칭찬을 해도 한 사장 얼굴은 변화가 없다.
“사모님 보니까 큐브 맞추면 심심하지 않고 두뇌 회전도 되고 아주 좋더라고요. 비싼가?”
“모르긴 해도 꽤 비쌀걸.”
“당신 이 집 줄이고 그 돈으로 시각장애 협회 회원들한테 점자 큐브 하나씩 선물하면 어때요?”
한 사장이 탁!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내가 왜 여태 그 생각을 못 했지?”
한 사장은 언제 시무룩했었느냐는 듯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 정도는 이 집 안 줄여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고마워. 정말 고마워. 역시 당신뿐이야!”
김 여사가 얼른 수저에 해삼을 올려주며 맛있지요? 하고 물었다. 한 사장이 활짝 웃으며 아주 맛있다고 했다.
자신감을 회복한 김 여사가 TV에서 보았던 난센스 문제를 냈다.
“여보, 여보. 귀로 먹는 보약이 뭐 게요?”
한 사장이 피식 웃으며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했다. 그러지 말고 맞춰 봐요. 당신은 머리가 좋아서 조금만 생각하면 금방 맞출 수 있어요. 한 사장이 나는 머리 안 좋아. 정답이 뭔데? 했다.
“안 알려줄 거예요. 빨리 맞춰 봐요. 못 맞추면 모레 점심 없어요!”
한 사장이 김 여사의 어리광 섞인 협박에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김 여사가 교태 어린 손길로 한 사장 얼굴을 쓰다듬으며 당신은 내 칭찬할 거 없느냐고 물었다. 한 사장이 아주 많다고 했다.
“그 칭찬거리가 뭔데요?”
“보배 엄마 먹고 싶다는 음식 정성껏 만들어 보내줘서 고맙고 부모 산소와 제삿날을 찾아줘서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맙지.”
“그건 고마운 거지 칭찬이 아니잖아요?”
“사람도 참. 그게 그 거지 뭐가 달라?”
“다르죠. 칭찬은 이렇게 하는 거예요.”
한 사장이 수저를 멈추고 어떻게 하는 건데? 했다.
김 여사가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보기 드문 미남이에요. 장애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살아서 칭찬해주고 싶고, 불우한 이웃을 소리 없이 도와주는 모습에 감동했어요. 다른 사람은 열 번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사후 장기기증까지 해서 존경스럽고 무엇보다 더 칭찬하고 싶은 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고요.”
한 사장이 김 여사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당신은 얼굴이 예쁘고 얼굴보다 목소리가 더 예쁘고 손목이 굵고 튼실해서 좋아요. 더 예쁜 건 앞 못 보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것이고요.”
김 여사가 깔딱 숨넘어가는 시늉을 하면서 내가 언제 그랬느냐고 한 사장 넓적다리를 세게 꼬집었다.
“자 그럼 퀴즈 정답이 뭘까요?”
한 사장이 푸르르 골을 냈다.
“당신이 자꾸 말 시키는 바람에 생각할 여유가 없었잖아!”
“힌트 아주 많이 나갔거든요.”
한 사장이 밥을 맛있게 먹고 기분 좋게 집을 나섰다. 김 여사가 답 못 맞추면 내일 1박 2일로 남해안 여행을 떠나겠다며 모레 점심은 진짜 안 하겠다고 했다. 장난기가 발동한 한 사장이 히죽거리며 뽀뽀 백 번 해주면 정답을 말하겠다고 했다.
김 여사가 병아리처럼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한 사장이 소리 내지 않고 입술만 크게 움직여 말했다.
“치~ㅇ 차~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