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크로아티아

2 슬로, 슬로, 슬로베니아

by 글마중 김범순

또 국경에 다다랐다. 오스트리아에서 슬로베니아로 입국하기 위해서다.

경찰이 차 안으로 들어와 여권만 확인하고 쉽게 통과했다. 이런 맛이 있어야지!

슬로베니아 크란에 도착한 것은 깜깜한 밤이었다.

크란은 슬로베니아에서 네 번째 큰 도시로 인구 약 오만 삼천 명 정도라고 했다.

여섯 시간 버스를 탔는데 풍경이 아름다워서 전혀 지루한 줄 몰랐다.

호텔은 깔끔했고 유리 양치 컵에 비닐 커버를 씌워 대접받는 느낌이 들게 했다.

샴푸와 치약은 없고 물비누만 있었다.

여기는 물비누 하나로 세수, 샴푸, 샤워까지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 생활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여행을 해보니 알겠다.

다행히 콘센트는 두 개씩 있어 핸드폰과 여행사에서 나눠 준 수신기 충전이 가능했다.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남편과 아침을 먹고

대전에서 5시 25분 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왔던 나는 곯아떨어졌다.

실컷 자고 깨어보니 새벽 2시였다. 우리나라는 오전 10시일 것이다.

항상 움직이던 시간이라 잠이 깬 모양이다. 피곤해서 다시 잠들었다.

자연스러운 시차 적응을 고려한 여행사의 완벽한 일정이었다.


슬로베니아 크란의 아침이 밝았다.

남이 차려준 식탁에 앉았다.

차려 줄 뿐 아니라 치워주기까지 할 것이다.

야호.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열일곱에 자취를 시작해 51년간 아침밥을 지었으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기분 좋게 우유와 수프, 요구르트, 치즈, 햄, 말린 과일로 푸짐한 아침 식사를 했다.

식당 밖 풍경에 홀린 발길이 테라스로 향했다.

동화 속 마을이 눈앞에 펼쳐졌다.

부슬부슬 비가 내려 더 몽환적이었다.

슬로베니아 크란의 몽환적인 아침 풍경

알프스의 눈동자 또는 보석이라 불리는 슬로베니아 최고의 호반 휴양지 블레드로 이동했다.

호수와 마을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블레드 성으로 올라갔다.

주인 없는 성은 박물관이 되어 우리를 맞았다.

전시물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중세 기사가 착용하던 철 갑옷이었다.

도대체 무게가 얼마나 될까?

무려 30kg나 된다고 했다.

그 무게 때문에 기동성을 잃어 가벼운 갑옷을 입은 적에게 전쟁에서 패했다고.

KakaoTalk_20220301_224619998.jpg

금장식과 전쟁 도구

KakaoTalk_20220301_224558333.jpg

블레드 성 전시관 벽화

지하에는 장인들이 수작업으로 만든 철제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독특하고 정교한 작품이 많았는데 가격이 비싸서 작은 촛대를 사기로 했다.

가격은 25유로(약 32,500원).

20유로로 깎아주면 두 개를 사겠다고 했더니 단호하게 안 된다고 거절해서 그냥 나왔다.

KakaoTalk_20220301_224434098.jpg
다양한 수제 촛대와 장식품
KakaoTalk_20220301_224124269.jpg

지하 기념품 가게 출입로

원형 경기장을 닮은 계단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고딕식 지붕, 높은 담장, 대리석 바닥, 이름 모를 낯선 꽃!

감탄사를 연발하며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

“오모나, 너모 너모 애뽀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 얼른 돌아보았다.

뚱뚱하고 거칠게 생긴 중년 직원이 내 말투를 흉내 내며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일행은 이미 다 내려갔고 비안개가 자욱한 해묵은 고성에는 나밖에 없었다.

두려운 느낌이 들어 구르듯 성문을 벗어났다.

그 남자로서는 어처구니없겠지만 어쨌거나.


미국 대통령 트럼프와 멜라니아가 스몰웨딩을 올린

성모승천 성당이 있는 작은 섬으로 배를 타고 갔다.

KakaoTalk_20220305_191712754.jpg

블레드 호숫가에 있는 집

줄리앙 알프스 빙하로 만들어진 블레드 호수는 투명한 수정처럼 맑았다.

청둥오리가 날고 홀아비바람꽃이 피어있는 산책로가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다.

KakaoTalk_20220306_115356018_26.jpg

홀아비바람꽃

KakaoTalk_20220301_224016591.jpg


신이 사람에게 선물한 최고의 정원이었다.

성당에서 거룩하고 장엄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군가가 소원의 종을 치고 있는 모양이다.

종소리는 언제나 무한한 감사기도를 드리게 하고 낮은 자세로 회개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김래원과 신세경이 주연했던 ‘흑기사’ 촬영지 프레드야마 성으로 갔다.

커다란 동굴 입구를 성으로 절묘하게 막아 놓은 모습이었다.

20190424_143207.jpg

흑기사 촬영지 프레드야마 성

프레드야마는 동굴 입구라는 뜻이고 12세기에 굴 안에 성을 지었다.

성을 이런 위치에 지은 것은 적군에게 공격당했을 때

동굴 뒤편으로 출입하며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김래원과 신세경이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가게를 꼭 가고 싶었는데 줄이 너무 길어서 포기하고

바로 옆 가게에서 슬로베니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품질 좋은 우유가 듬뿍 들어가서 그런지 유별나게 맛이 깊고 풍부했다.

성은 박물관이 되었고 입장료를 받았다.

동생과 나는 입장료가 아까워 비탈길을 따라 소담스럽게 핀 민들레 사진을 찍으며

초록 융단을 깐 것 같은 목초지를 산책했다.

미세먼지 한 톨 없는 공기는 다디달고 금실 같은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렸다.


이전 01화신들의 정원 크로아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