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크로아티아

4 검투사의 아내

by 글마중 김범순

길가에 노란 스플릿 꽃이 들국화처럼 무리 지어 피어있는 해안을 따라 피란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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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플릿 꽃은 우리나라 골담초와 비슷했다.

꽃 모양은 같은데 바닷바람에 시달려 나무와 꽃이 작고 갖은 풍상을 겪은 듯 모질고 거칠었다.

피란은 슬로베니아 남서쪽에 있는 도시로

15세기에 지어진 고딕과 비잔틴 양식 건물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피란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성 조지 성당을 향해 올라갔다.

좁은 골목은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줄지어 있어 혼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동생과 나는 아무도 가지 않는 한적한 오른쪽으로 접어들었다.


정상에 있는 성 조지 성당에 다다랐다.

수녀와 수사들의 고난을 풀어주던 호수처럼 잔잔한 아드리아해가 숨쉬고 있었다.

성당이 끝나는 자리에 튤립이 피어있는 긴 화단이 있고 주택앞 담벼락에는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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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열면 튤립과 벽화와 벽화 너머로 드넓은 바다가 펼쳐진다.

이 모든 풍경을 날마다 볼 수 있는 집에 사는 이들은 틀림없이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것이다.

헐벗은 소년들과 마술피리 소리를 기다리는 생쥐가

우글거리며 살고 있을 것 같은 좁고 누추한 골목을 따라 광장으로 왔다.

화장실을 이용하려고 일부러 아이스크림을 샀는데 시장 안에 있는 무료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란다.

몹시 기분 나빴는데 아이스크림 맛이 훌륭해서 금방 용서가 되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국경에 다다랐다.

여자 경찰이 버스에 올라와 여권을 보고 쉽게 통과시켰다.

크로아티아에서는 우리나라 국민들을 환대한다고 했다.

국경 초소 뒤쪽 벽에 화살표가 붙어 있고 한글로 화장실이라고 적혀 있어 왠지 어깨가 으쓱했다.


인구 만 명이 채 안 되는 작은 도시 로빈은 성 유페미아 성당의 천장화가 유명했다.

목을 젖혀 성스럽고 우아한 그림을 감상했다.

잠깐 쳐다보는 것도 힘든데 화가는 저 높은 곳에 어떻게 저토록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을까?

성당 뒤쪽 광장에는 거리의 악사가 신들린 듯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선율이 발걸음을 리본 모양으로 묶고 풀어주지 않았다.

아는 곡인 것 같기도 하고 처음 듣는 것 같기도 했다.


물가가 싸기로 유명한 인구 약 육만 명의 풀라에 도착했다.

드문드문 아열대성 기후를 상징하는 종려나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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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라에는 로마제국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신격화하고 국민의 절대복종을 위해 신전과 성을 지었다.

신전과 성은 노예들의 강제 노역으로 이루어졌고 한때는 성당이었다가

곡물 창고로 쓰였고 지금은 박물관이 되었다.

1세기에 건축해 25,000명을 수용했던 풀라의 상징인 원형경기장이 위용을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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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형 계단은 최신식 경기장과 같은 건축 공법으로 축조되었으며 놀랍도록 원형을 거의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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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경기장 내부

4세기까지 노예와 동물과 싸우게 했으며 많이 배운 노예는 검투사로 양성했다.

굶주린 사자와 싸우러 간 검투사 남편을 둔 아내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차마 눈뜨고 지켜볼 수 없어 경기장은 가지 않고 주먹만 깨물며 기도했을 것이다.

나는 검투사의 아내처럼 절실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으고 가이드 설명을 들었다.


실내를 로코코 양식으로 꾸민 멋진 식당에서 점심으로 해물 스파게티를 먹었다.

홍합이 잔뜩 들어있어 맛이 아주 훌륭했다.

동생한테 얻어 마신 화이트 와인 한 모금에 기분이 한껏 고조되었다.

풀라에서 환상적인 해안도로를 1시간 30분 달려

인구 팔천 명이 채 안 되는 휴양지 오파티야로 왔다.

한겨울에도 지중해성 기후로 온난해서

오스트리아 왕과 귀족들이 별장을 짓고 피한해서 명성이 높은 곳이었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은 무엇일까?

뱃사공이라고 했다. 동생이 뱃사공 동상 팔을 잡고 포즈를 취했다.


뒷모습이 유난히 매혹적인 갈매기를 든 여인상에 얽힌 이야기다.

젊은 백작이 죽자 부모는 아들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바닷가에 성모 마리아 상을 세웠다.

크로아티아가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면서 성모 마리아상은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유명한 조각가가 갈매기를 든 소녀상을 만들어 세웠다.

소녀상의 모델이었던 여인은 육십이 되었을 때 털어놓았다.

이웃에 사는 조각가가 자신을 모델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대숲을 지나자 아인슈타인 등 낯익은 인물을 그려놓은 벽화가 나타났다.

호텔과 식당 건물은 현대적이면서도 중세 건축물들과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유럽인들이 동전을 들고 공중화장실 앞에서 길게 줄지어 서있었다.

우리는 관록 있는 가이드 덕분에 고급 화장실을 무료로 편안하게 이용했다.

내 마음 한쪽에서 기회를 노리던 악마가 쾌재를 부르며

지치고 찌푸린 얼굴로 차례를 기다리는 유럽인들을 마음껏 야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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