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크로아티아

10 제3의 시선

by 글마중 김범순

버스 트렁크에 가방을 싣거나 내릴 때가 되면 잘생긴 기사는 힘 없이 머리를 짚었다.

엄살인 줄 훤히 알면서도 밉지 않아 일행 몇 명이 앞다투어 열일곱 개의 가방을 번쩍번쩍 들어 옮겼다.

돌아오는 길에 슬로베니아로 재입국했다.

운전기사가 차 유리를 내리고 유창한 영어로 자기만 빼고 전부 여자라고 했다

검문소 직원은 여권 검사도 하지 않고 그대로 통과시켰다.

우리가 대단하다고 손뼉을 치며 환호하자 기사가 시크하게 말했다.

"저들이 한 일이라 나는 칭찬받을 이유가 없어."

작은 칭찬에도 호들갑스럽게 기뻐하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공원처럼 깔끔하게 조성된 슬로베니아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스가 멈췄다.

이곳 화장실도 유료였다.

줄이 너무 길어서 매점으로 갔다.

아이스크림을 주문하니까 화장실 쿠폰을 달라고 했다. 가격을 할인해 준다고.

아이스크림부터 사는 바람에 할인받지 못한 몇 푼의 돈이 아깝기 짝이 없다.


잘 가꿔진 폭신한 잔디밭을 걸으며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아이스크림은 역시 슬로베니아가 최고였다.

멀리 작은 팻말이 보였다. 잔디를 밟지 말라는 건가?

- 뱀 조심! -

비구름이 내려앉으며 날씨가 싸늘해 뱀도 외출을 자제할 것 같아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풀밭에는 유년 시절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동생과의 이야기가 길어졌다.


산책 끝에 들른 화장실 바닥에는 휴지가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주차장에는 우리나라 여행사 버스 네 대밖에 없다.

어글리 코리언이라는 오명을 들을 것 같아 신경질적으로 휩쓸어 쓰레기통에 넣었다.

뮌헨행 비행기에서도 우리나라 승객이 앉았던 자리가 유독 지저분해서 얼굴이 뜨거웠었다.


버스에 오르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블레드 성에 갈 때 외에는 밤에만 비가 오고 여행 내내 날씨가 좋았다.

여행 중 가장 큰 축복은 날씨다.


여섯 시간의 승차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음악도 들려주고 유머로 배꼽을 쥐게 하며 최선을 다하는 프로다운 가이드 모습이 아름다웠다.

피아니스트란 영화 감상이 끝났다.

가이드가 고정관념을 깨트려 공감대를 불러일으킨 시로 유명한 하상욱 작품을 소개했다.


어떤 부탁이든 다 들어줄 수는 없다 해도

어떤 이야기든 다 들어줄 수는 있는 사람

친구란


차창 밖으로 비에 젖어 아련해진 풍경들이 지나갔다.

국경을 넘자 오스트리아는 눈이 내려 하얀 설국이 되어 있었다.

크로아티아 자다르의 초여름. 슬로베니아의 봄. 오스트리아 산악의 겨울!

하루에 세 계절을 모두 경험한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후타우에 도착했다.

KakaoTalk_20220301_231045691.jpg

후터 호텔 로비

저녁 식사 후 방부제를 넣지 않고 하얀 밀로 만들어 유명해진 독일 맥주를 마셨다. 아주 맛있었다.

동생과 나는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운무에 쌓인 동화 같은 마을을 감상하며 산책하기 위해서였다.

여행 마지막 밤을 보낼 후타오 마을에 비구름이 반쯤 내려앉았다.

KakaoTalk_20220301_222103185.jpg

후타오 기차역 앞 후터 호텔 옆문 정경

모락모락 저녁연기가 피어올라 정겨움이 더했다.

이곳에서라면 석 달 열흘 하고도 며칠 더 머물러도 좋을 것 같다.


오전 5시 30분.

가이드가 방문을 부서지게 두드리며 일행을 깨웠다.

고속도로가 막혀 비행기를 못 타게 될까 봐 서둘러 출발하기 위해서였다.

호텔에서 정성스럽게 싸준 아침 도시락은 버스 안에서 창밖 풍경을 보며 먹었다.

뮌헨 공항 매점에서 검정 산딸기와 아이스크림을 샀다.

KakaoTalk_20220308_204133710_06.jpg

독일 아이스크림도 슬로베니아를 따라가지 못했다.

공항 화장실에서 놀랍고 꼭 배워야 할 것을 발견했다.

티슈를 뽑아 손을 닦았더니 드르륵하고 되감기며 말려 들어갔다.

다시 풀어서 자세히 보니 종이가 아니고 천이었다.

수분 제거와 소독된 천은 뽀송해서 기분 좋고 위생적이며 경제적이고 무엇보다 친환경적이었다.


비행기에 올랐다.

통로 측에 동생이 앉고 가운데에 자리 잡으며 창가 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사람들이 번호를 확인하며 연이어 들어왔다.

제발, 이 자리는 오지 마!

급성 디스크로 호되게 고생한 지 얼마 안 된 나였다.

못 견디게 허리가 아프면 옆 의자 쪽으로 비스듬히 눕고 싶어서다.

어림없는 소리. 무슨 일에나 머피의 법칙이 적용되는 주제에 그런 행운을 바라다니!

여태껏 행운권 한번 당첨된 없고 하다못해 대형 마트나 백화점에 가면 직원이 앞사람한테만 인사를 했다.

주차 복도 없다. 자리가 없어 옆 동에 주차하면 출구 앞 로열석이 비어 있다. 재빨리 차를 몰고 와보면 고새 누가 대서 약이 올라 팔짝팔짝 뛰었다. 그랬는데 아직 비어 었다.

이륙 직전 헐레벌떡 남자가 뛰어왔다.

그러면 그렇지!

비켜주기 위해 동생과 엉거주춤 일어서는데 빠르게 우리를 지나쳐 뒤로 갔다.

야호!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있다.


뮌헨 공항에서 정오 12시 20분에 출발했다. 인천까지 8960km. 시속 약 900km.

인천에서 뮌헨으로 갈 때는 12시간. 돌아올 때는 날짜변경선과 기류 영향으로 10시간 소요.


혈압약을 먹어서 화장실을 자주 가고 동생과의 산책이 길어 매번 버스 시간에 늦었다.

그런데도 소리 없이 기다려주던 고마운 일행 열일곱.

옷깃만 스쳐도 억겁의 인연을 맺어야 한다는데

우리는 전생에 어떤 인연이 있었기에 8박 9일이나 함께 했을까?

인도 공주를 닮은 김해 김 씨를 만나 수로왕이 어쩌고 하며 종친회 기분도 냈다.

마지막 밤을 보낸 오스트리아의 별장 같은 호텔에서 종씨가 사준 독일 맥주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피곤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평화롭게 가는 코를 골며 잠든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든 소중하고 귀한 존재.

어머니가 주신 유산 동생!

동행해줘서 고맙고 많은 선물을 사줘서 더더욱 고맙다.


♣ 여행은 나라와 가족과 보금자리와 나의 소중함을 제3의 시선으로 보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이전 09화신들의 정원 크로아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