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이 인간 보고서 - 1
여러분들 안녕하신가? 나는 동동족 오동통 대학 인간학 박사 ‘오동이’라고 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어떤 종인지 모르지만, 인간학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번 지구별 정기 탐사선이 ‘불안’이라는 서적과 함께 무사 귀환했다. 해석에 난해함이 있었지만, 인간학 학자들 사이에선 이 책을 흥미롭게 해석했다. 이 글을 통해 탐구한 내용을 공유해 보려고 한다.
인간이라는 종은 항상 타인의 사랑에 목말라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겉으로 관찰했을 때는 돈, 예술, 기술, 학문 등 사람마다 원하는 것이 다른 듯했지만 아니었다. 돈을 모으기 위해 몸을 파는 인간은 충분한 돈을 벌고 있는데도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훌륭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예술가는 타인에게 작품이 인정받지 못하자 입에 총구를 갔다 댔다. 군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인간 종들은 그들의 행동이 인간 사회에서 명예롭다고 인식되자 몫숨까지도 기꺼이 희생했다. 놀랍지 않은가? 가장 중요한 몫숨까지도 타인이 사랑을 준다면 기꺼이 희생하는 것이다! 그들이 하는 행동들은 각기 달라 보였지만 결국 목적은 하나였다. 그들은 타인의 존경, 관심 즉 사랑을 위해 행동했다.
그들은 사랑을 항상 탐하지만, 그들이 사는 사회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랑을 주고받는데 인색한 듯했다. 어렸을 때 울고, 떼쓰고, 괴상망측하게 행동해도 아이들은 사랑을 받는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랑은 조건부가 된다. 예의를 지켜야지 사랑을 주고, 공부를 잘해야지 사랑을 준다. 어른이 될수록 돈, 명예, 권력 등의 상징이 있어야만 구성원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상징이 없는 자들은 인간 사회에서 철저하게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식당 주인은 손님의 지위가 낮아 보이면 식당에서 가장 안 좋은 자리로 안내한다. 노숙자는 돈이 없어 이미 충분히 힘든데, 그를 동정하기는커녕 멸시하는 자가 많았다. 지구 별에 갔을 때 엄마와 딸의 대화를 엿들었었는데, 꽤 충격적이었다.
“(저 남자가) 우리와 사귀고 싶어 죽을 지경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부르는 게 좋을까요?”
“안 되지, 애야. 우리와 사귀고 싶어 죽을 지경인 사람들은 우리가 사귈 만한 사람들이 아니야. 우리가 사귈 만한 사람들은 오직 우리를 사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뿐이란다!”
현대가 되기 전 그들에게는 불변하는 계급이라는 것이 있었다. 하나, 현대에 오면서 계급은 상승 가능한 것이 됐고, 실력에 따라 계급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됐다. 따라서 가난한 인간이 자수성가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들은 “당신들도 할 수 있다!”라고 말하며 책과 강연에서 외치고 다녔다. 하지만 이런 시류는 능력 없는 자에게는 사형선고와 같았다. 과거에는 태어나면서부터 운으로 정해지는 계급이 이제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정해진다. 이제 계급이 낮은 사람은 운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능력을 개발하지 않아 낮은 계급에 있는 것이다. 과거 낮은 계급은 운의 영역이었기에 비난의 영역이 아니었지만, 현대에 들어오면서 낮은 계급은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됐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사회는 문제는 있지만, 그래도 중세보다는 나아 보일 수 있다. 하층민으로 태어나 상승을 꿈꿀 수 없는 사회보단 꿈꿀 수 있는 사회가 낭만 있지 않은가? 하지만, 능력이라는 것이 항상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인간의 불안을 야기한다. 분명 과거에는 재능 있던 예술가가 어느 날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또한 사회 시류에 따라 유망했던 프로그래머가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설 자리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능력이라는 것은 개인의 컨디션에 따라, 시대에 따라 바뀌기 때문에 언제 지위를 잃어버리고 하층민으로 전락할지 인간들은 모른다. 따라서 인간들은 항상 불안해한다.
인간들은 타인의 사랑을 갈구한다. 그리고 사랑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불안을 느낀다. 인간들은 돈, 명예 등의 상징을 통해 사랑을 받을 수 있지만, 상징의 획득 가능성은 운에 의존하는 부분이 많다. 따라서 항상 사랑을 받지 못할까 노심초사하게 된다. 다음번에는 이런 ‘불안’에 대해 인간들은 어떻게 대처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