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푸름 Jul 23. 2021

너의 피는 나에게 효율적이다.

수 코우 <잔혹 Cruel>

수 코우 Sue Coe, <잔혹 Cruel>, 2011, © Sue Coe


 직관적인 그림입니다. 작가가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지 크게 고민할 필요 없이, 그림이 보여주고자 하는 바를 쉽게 파악할 수 있지요. 작가는 수 코우, 영국 출신이며 주로 페미니즘과 비거니즘, 전쟁 등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립니다.


 강렬한 흑백의 대조가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수 코우의 그림을 보면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 1867–1945)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물론 코우의 그림은 흑백 위로 포인트가 되는 색상들이 얹혀 있지만요. 두 작가 모두 여성이고* 전쟁을 비판하며 인간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더욱 유사한 것 같기도 합니다.


 더 설명할 것도 없이 이 그림은 비거니즘을 주제로 한 작품이 되겠네요. 야위었기 때문인지, 송아지에 가까워 보이는 몸집을 한 소의 목에서 피가 쏟아져 나옵니다. 그 피는 어느 순간부터 금전으로 바뀌어 탐욕스러운 얼굴을 한 인간의 손으로 들어오게 되지요. 인간의 왼편에는 동물들의 두개골이 무더기로 쌓여 있습니다. 오른편에는 비슷한 규모의 돈주머니들이 쌓여 있네요. 동물의 사체는 인간의 돈이 됩니다.


 그림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소의 뿔이 잘린 상태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축산업에서 소의 뿔을 제거하는 일은 빈번히 일어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육우’는 뿔이 잘리고, 뜨겁게 달구어진 쇠로 소인이 찍히며, 수컷 소는 거세를 당하지요. 소가 다른 소에게 상처를 입히면 안 되고, 어떤 것이 어떤 인간의 ‘소유’인지 알아야 하며, 거세한 소의 살점이 안 한 소의 살점보다 부드럽기 때문입니다. 아 물론, 위의 모든 과정은 마취 없이 행해집니다. 그것이 경제적으로 ‘효율적’이기 때문이지요.


 또한, 그림 속 소의 다리는 어딘가 아파 보이는 듯합니다. 저는 이것을 ‘송아지 고기’가 되기 위한 송아지의 성장 환경을 고발하는 것으로 보았는데요, 실제로 어린 송아지 고기인 ‘빌(veal)’은 비싼 가격에 거래됩니다. 고기의 색이 엷고 식감도 부드럽기 때문이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빌’은 풀을 먹기 전에 도축된 송아지 고기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어미로부터 떼어진 후 콘크리트 바닥 위에 깔린 널빤지 위에서 ‘살게’ 됩니다. 폭 56cm, 길이 137cm 정도의 우리에 갇혀서 말이지요. 그곳에서 그들은 성장촉진제가 첨가된 탈지분유로 된 액체 사료만을 섭취하며 16주 정도를 살게 됩니다. 태어났을 때의 무게인 41kg에서 몸집이 불어나 181kg이 될 때까지 말이지요. 물론, 그 과정에서 다른 우리로의 이동은 없습니다.


 평생 풀은 먹을 수 없습니다. 풀에는 철분이 함유되어 있는데 철분은 고기의 식감을 질기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딱딱한 바닥의 비좁은 우리 속에 갇혀서 평생 몸 한 번 돌리지 못한 채 말 그대로 숨만 쉬며 ‘살아’ 가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평생은 16주입니다. 참고로 소의 자연적인 수명은 약 20년 정도입니다. 그저 생명을 유지할 뿐인 이들의 다리 역시 제 기능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요. 필요한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그저 서있는 행위조차 힘겨운 일입니다.


 이러한 송아지 고기는 ‘식감이 좋기’ 때문에 비싼 가격에 팔립니다. 그렇게 ‘산업’은 계속될 수 있지요. 수지타산에 맞는 참 ‘효율적’인 사업이니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성장과 경제적 효율성은 ‘무조건적 선’으로 여겨지는 현대사회에서, 우리의 효율성은 누군가의 고통이 되고 있지는 않나요? 나의 편리함은 누군가의 불편이니 말입니다. 


 물론 저라고 하여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람은 아닙니다. 윤리적으로 완벽할 수 있는 인간은 없지요. 그러나 이러한 고민을 하는 것은 항상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수 코우의 그림과 제 설명이 인상 깊었다면,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정보 역시 해당 텍스트를 참고하였습니다.




*덧붙이는 말

- 케테 콜비츠와 수 코우의 공통점에 굳이 붙일 필요 없어 보일 수 있는 두 작가의 생물학적 성별을 덧붙인 것은, 미술사 기록은 여성에게 각박한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남긴 그들에 보이는 일종의 존경심입니다. 성별과 무관한 실력으로 뛰어난 작가들이지만, 차별을 딛고 넘어선 이들이기에 더욱 빛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림 정보

수 코우 Sue Coe, <잔혹 Cruel>, 2011, unknown medium and dimensions, Courtesy Galerie St. Etienne, New York, © Sue Coe


*참고도서

피터 싱어, 김성한 역, 『동물해방』, 연암서가, 230p ~ 258p

매거진의 이전글 피망은 말이 없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