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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아람 May 03. 2024

엮으면서

-남해를 사랑한 말꽃 서문 -

생활 속에 파묻혀 살다 보면 문득 한 번씩 쏟아지는 그리움이 있다. 마치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 오랜 친구처럼 일상의 시계를 탁 멈춰버리게 하는 이 거대한 그리움의 실체는 내가 나고 자란 도툼바리 마을, 남해 미조항의 풍경이다. 그 갯마을의 냄새와 사시사철 달라지는 공기와 바다 빛깔과 한 달에 한 번씩 부풀어 오르는 바닷물의 높이다.


북방에서 달려온 19번 국도는 미조리에 와서야 지친 발걸음을 멈춘다. 절절히 그리운 사람은 19번 국도를 얻어 타고 왔으리라. 강원도 횡성에서 달려온 446.3킬로미터는 이념의 생채기로 겨우 남은 반토막이어서 한정없이 아플 대로 아플 터이지만, 길이 끊기어 짧아진 만큼 그리움은 더 깊어졌으리. 저리는 그리움으로 달려온 사람들은 기어이 바다 앞 땅끝에서 삶을 잠수한다. 그래서 미조리 포구는 아직 물속이다.


동구 밖 언덕에 올라서면, 바다 사립문 밖으로 멀리 수평선이 울렁이고, 가까이는 갯지렁이처럼 꼼지락거리는 마을 고샅길과 담장들이 보인다. 무너진 성벽 곁에 초등학교가 따개비같이 붙어 있고, 처녀 귀신이 머리 풀고 빗질하던 상록수림 아랫길과 왜정 때 지었다는 호롱불 닮은 등대가 그 숲 발치에 떠 있는 것도 내려 뵌다. 오늘도 광풍에 쫓겨 온 고깃배들은 요강 속 같은 북항에 들어앉아 배를 묶고 밤새도록 불을 밝힐 것이다.


단청이 바랜 사당은 육백 년의 원혼을 여태 삭이고, 망운산 동제 터엔 아직도 사람, 산짐승 가릴 것 없이 마실 물이 넘치는데, 세월은 풍속을 녹이고 세상은 추억을 버렸는지 점점 마을 사람은 줄어든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던 옛 시인의 시구처럼 해무 속에 들어선 듯 희미해져 간다. 보무도 당당하던 새마을 운동의 흔적 그 헌 신작로도 이젠 동강 나서 버려지고 새 길이 난 지 오래다.


나는 이 땅 이 바다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당신이 짜던 길쌈인 양 정성스레 잘 삼긴 인생이란다. 자그마한 망운산과 동그마한 미조만을 날줄로 삼고, 고기 비린내 묻어나는 미조 사투리며 고색한 갯가 풍속을 씨줄로 삼아 한올한올 잘 삼은 삶이란다. 세상 이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10년 전, 동유럽 여행 중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문득 미조가 몹시 그리워졌다. 짤츠캄머굿이라는 그림같이 예쁜 그 이국의 마을에서 나는 내가 몇 살이었을지 모를 꼬마일 때, 낡은 성당공소의 마룻바닥에 꿇어앉아 기도하던 중에 들었던 그 바다의 철썩이던 소리가 느닷없이 그리워진 것이다. 그 느낌은 불쑥 솟아나 버린 것이어서 나로서도 어쩌지 못하는 퍽 난감한 감정이었다. 고향보다 아름다울 것 같았던 이국의 산천 풍경 앞에서, 쏜살같이 달려와 냅다 안겨버리는 고향의 절절한 그리움, 그 사무침은 도무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는, 말하자면 다소 혼란스럽기까지 한 감동이었던 것이다.


여기 남해에서 태어났거나 혹은 나서 자랐거나, 아니면 잠시 들렀거나 더러는 오래도록 머물다 간, 몇몇 글쟁이들이 남해를 노래하고 이야기한 말꽃을 모아 엮었다. 노래를 앞에 세우고 이야기를 뒤에 놓았다. 같은 노래, 이야기라도 옛글은 앞에 두고 요새 글은 뒤따르게 하였다. 남해문견록은 엮은이가 손수 주석을 달았으니 잘못된 곳이 있을 것이고, 엮은이가 아둔하여 걸작 중에 빠트린 글도 많을 것이다. 두고두고 채워갈 것이라 다짐하며, 도움을 주신 ‘전문적학습공동체’ 선생님들께 고마움을 전한다.


                                                                                                                                                         2024. 4. 17

                                                                                                                 무민사 앞 계단에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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