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이란 무엇인가
영화 ‘아이가 커졌어요’에서는 갓난아이가 거대하게 되어 일어나는 사건들을 그려 온 가족이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있다. 영화 속 아이는 몸집이 거대해지자 모든 세상이 다 장난감이 되어버렸다. 평소에는 몸이 작아 가고 싶은 곳도 못 가고 오르고 싶던 곳도 못 올랐지만 몸이 커지자 못 가는 곳이 없고 못 오르는 곳이 없어지게 되었다. 고압전류가 터지는 위험한 상황도 아이에게는 그저 불꽃놀이고 거대한 호수도 작은 물웅덩이처럼 물장구를 치고 논다. 건물도 아기자기한 사람들이 꼬물꼬물 거리며 드나드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인형의 집처럼 되었다. 단순히 크기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아이에게는 세상이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거스를 수 없는 크기를 가졌다. 물론 작은 크기의 건물과 마을을 만들면 되지만 우리와 같은 지능과 인격을 가진 작은 사람을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따라서 세상 속 우리는 크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이 세상에 살며 우리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나 없나로 그 공간의 크기를 가늠한다. 즉 세상에서 사람의 크기는 건축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유일한 척도 (스케일)이다.
‘건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건축을 하는 누구나 한 번씩은 가졌을 의문이다. 저마다 거창한 이론과 철학을 내세우며 정의를 내리지만 실은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스케일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의 크기를 가진 어떤 것. 그것이 건축이다. 공간이라는 보이지 않은 무언가를 다루지만 벽으로 둘러싸인, 지붕으로 덮여있는, 땅 위에 지어지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를 가졌다면 그것이 건축이다.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엄청나게 큰 조각을 만들었다.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지만 사람이 살 수는 없다. 그럼 이것도 건축이라 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건축이다.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순간 그 안을 바꿀 수 있다. “난 거대한 조각상에서 살고 있어. 아직 전기와 가스 수도가 없을 뿐이지.” 조각품으로 만들어졌지만 기능을 갖추지 못한 건축이다.
보지 못하는 눈
‘아이가 커졌어요’와 반대로 여기 망원경이 커졌다. 이것은 건축인가?
이것은 건축이다. 엄연히 평면과 단면으로 계획되었고 시공을 거쳐 완공이 되어 사람들이 회의를 하는 오피스 빌딩이다. 실제로 이 건물은 여행회사 건물이며 망원경 건물 안에 있는 회의실에서 회의를 진행한다. 이게 무슨 건축이야 하며 비웃는 건축학도와 건축가들이 많겠지만 프랑크 게리가 어떤 건축가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저 스페인 빈민가였던 구겐하임지역을 건물 하나로 명소로 만들고 생각지도 못한 공간창출법과 시공기술로 희귀한 건물을 마구 지어낸 건축계의 천재. 어설프게 가짜 르코르뷔제나 싸구려 안도 흉내 내며 으스대고 알아듣지도 공감하지도 못하는 말을 하는 건축가가 지은 건물보다 명쾌하고 유머러스까지 하지 않은가?
이처럼 공간을 점유하는 크기가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크다면 그것은 건축이다. 단순히 크기로만 건축을 논하는 것이 너무 무식하고 간단해서 필자를 건축가로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아 좀 걱정이다. 그러나 설계 수업 시 그리고 졸업 후 현장에서도 제일 먼저 배우고 중요시하는 것이 바로 스케일 아니던가?
그래도 “어찌 프랑크 게리 같은 건물을 보여주며 신성한 건축을 처리 천박하게 논하려 하는가” 하며 반박하려는 (형태에 집착이 큰) 르코르뷔제 신도들에게 한 장 더 보여줄 사진이 있다. 그리고 건축이 뭐가 신성해? 그냥 필요한 만큼 쓰임에 따라 건물 짓는 거지. 아무튼 사진 공개.
DES YEUX QUI NE VOIENT PAS…
르코르뷔제가 자신의 건축을 알리기 위해 사전작업으로 자신만의 기준으로 건축을 논하며 쓴 ‘건축을 향하여’라는 책에서 먼저 ‘보지 못하는 눈’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 가운데 있는 사진이다. 당시 산업시대를 맞아 ‘기계적 형태 (제 기능을 발휘하기에 갖춰진 최적의 형태)가 최고야’를 논하기 전에 선박과 당시 프랑스의 유명 건축물 (노트르담, 개선문, 오페라)의 크기를 비교하는 사진을 만들었다.
만약 사람 3600명이 들어갈만한 크기의 선박이 바다에 떠있지 않고 땅 위로 올라온다면 그것은 건축일까? 사진 밑에 불어로 쓰여있는 글씨로 말한다. 건축인데 ‘보지 못하는 눈’을 가졌구나 라며... 실제 저 말은 새로운 건축을 보지 못하는 당시 사람들의 안목을 알리고자 코르뷔제 본인이 한 말이다.
이와 같이 어떤 생각, 어떤 의도로 지었든 간에 땅을 점유하고 사람이 들어갈만한 크기를 가졌다면 일단 건축이다. 아니 인정 못하겠다면 건축적 입장에 놓였다고 하자. 건축이든 건축적 입장이든, 위 조건을 만족하면 좋든 싫든 건축으로 바라보며 건축이 가진 특성을 적용시킨다. 그것은 ‘공공성’이다. 커다란 물건, 조각, 건물이 놓이면 좋든 싫든 내가 봐야 하고 내가 사는 동네에 어울리네 안 어울리네 하며 생각해보지 않는가?
그래서 건축가는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건물을 짓지 않는다. 적어도 건물이 들어설 대지주위에 무엇이 있고 그들과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벽과 기둥으로 공간을 조직해 나간다. 물론 건물은 당연히 건축주의 사유물이고 그들의 요구를 충분히 들어주며 건물을 짓는다. 그러나 ‘나는 엉덩이 모양을 한 건물에서 살고 싶다’고 그 모양 그대로 건물을 올려 도시 미관을 어지럽힐 용자가 있느냔 말이다.
다음으로 크기가 갖추어졌다면 여기에 필요한 기능을 넣는데 여기에 ‘합목적성 ‘이 적용된다. 사무실이면 사무공간으로, 주택이면 주거공간으로, 레스토랑이나 카페 상점이면 상업공간으로, 교회면 종교 공간으로 각각의 목적에 맞는 기능을 감당하기에 필요한 형태를 갖추는 것. 그것이 합목적성이다. 왠지 교회면 오묘한 빛이 들어와야 하고 사무공간이면 모니터 때문에 직사광선은 싫지만 채광이 좋은 공간을 기대하지 않는가? 어떤 기능 (목적)을 떠올리면 모두가 똑같지는 않더라도 그 기능 (목적)에 맞추어 평균적으로 기대하는 기대치에 부합하는 형태, 그것이 합목적성을 갖춘 건축이다.
마지막으로는 ‘장소성’이다. 건물이 어디에 놓이느냐, 놓이는 대지와 함께 잘 어우러지는가? 크기를 당연시 여긴다면 건축은 장소성에서 시작된다. 대지 주변에 산이 있고 강이 있고, 주택가인지 아님 황량한 벌판인지와 같은 물리적인 조건이 있고 예전에 어떤 지역이었고, 어떤 건물이 있었고, 어떤 사람이 있었고 현재는 어떻게 변했는가 같은 인문학적 조건들도 있다. 건축가들이 초반에 많은 영감을 받고 설계의 결과물까지 영향을 끼치는 소위 ‘콘셉트’ (개념)이라는 것이 이런 조건들을 조사하면서 생기게 된다. 마치 한의학의 침술처럼 하나의 건물이 한 지역에 큰 파급력을 끼치기도 하고 인간의 몸 안에 있는 장기처럼 도시 안에 필요한 부분을 충족시키며 도시 조직의 하나로 도시가 잘 작동하도록 돕는 건축도 있다.
이 모든 건축의 네 가지 성질 (크기, 공공성, 합목적성, 장소성)을 고루 갖춘 것이 건축가들이 인정하는 좋은 건물이다.
모든 건축은 저마다 사연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가 모여 내가 사는 도시의 역사가 되고 현재 우리가 사는 삶의 모습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 된다. 크기 (스케일)에서 시작한 이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건축을 들여다보며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도 건축가들은 여러분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고 그 삶들과 관계된 건물을 짓고자 이야기를 꾸미고 있을 것이다. 내가 사는 동네 빵집이나 도서관, 주택이 그냥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와 관계된 이야기로 지어졌다는 것, 나의 삶이 나의 동네, 도시에 지어질 건물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꽤 매력적인 일이다. 또 내 삶의 역사와 철학이 담긴 작지만 나의 집을 갖는다는 것, 정말 멋지고 소망해볼 만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