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피스 주문 생산 <도바 위에 뜬 별 1부 제20화>
악어형님의 깊게 파인 이마주름
여름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장귀자 대표와의 작별은 한편으론 시원 섭섭했으나 미련은 없었다. 그녀가 가진 재력과 내 앞날에 대한 보장은 어차피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내 것이 아닌 것에 무슨 의미가 있으랴. 하지만 윤지혜로부터 계속 연락이 없는 것은 마음이 너무 아렸다.
나는 악어형님을 모시고 여름 상품도 의논할 겸, 최근 기력이 떨어져 보이는 형님 보신도 시켜드릴 겸, 그가 좋아하는 보신탕 집에 갔다. 그 당시만 해도 보신탕을 먹는 것이 그다지 흉 되는 일은 아니었다.
형님은 민망할 정도로 대부분의 수육을 내 접시 쪽으로 많이 옮겨주었다
그리고 국물 한 숟가락을 뜨더니, 거제사람 특유의 억센 발성으로 말을 꺼냈다.
“ 성호야. 나아(나)가 생각하기엔, 이제 우리가 공장에 직접 주문을 넣는 게 어떻겠노. 서울서 차떼기로 원피스 사 와서 깔아봤자 운송비에 원가에 남는 게 없다 아이가.”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형님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형님, 부산 쪽 공장에 주문 넣으면 원단 질이나 디자인이 떨어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거는 우리 둘이 동대문 올라가서 샘플 스무 벌쯤 골라 오면 된다. 괜찮은 것만 집어 오면, 공장에서 그대로 찍어 내줄 것 아이가.”
형님의 눈빛에는 단단한 결심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망설였다.
“형님… 그렇게 하시려면 원피스를 팔아 줄 도바가 얼마나 확보돼 있는지부터 제대로 따져봐야 합니다. 예상 매출, 자금 계획, 외상 비율, 원가 대비 수익률까지 다 계산해 봐야지요. 괜히 잘못짚으면 앞에서 벌고 뒤에서 다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나는 은행에서 업체 경영분석 할 때 버릇대로 걱정을 덧붙여 말씀드렸다.
형님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친김에 몇 마디 더 덧붙였다.
“이 바닥이 그렇지 않습니까. 도매상들이 소매상 목줄을 쥐고 있잖습니까? 소매 노점상들이 도매상에 물건을 떼오면, 도매상 밑에 붙어 있는 부장들이 중간에서 10%씩 챙겨갑니다. 부장들은 자기네가 좋은 도바를 쥐고 있으니까, 그 조건으로 ‘우리 물건만 팔라’고 강요하지요. 결국 소매상들은 선택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소매상들이 형님과 함께 할라 하겠습니까?”
형님은 내 말이 끝날 때까지 묵묵히 듣고 있다가 본인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래, 니 말이 맞다. 내가 그 꼴을 수십 년 봐 왔다. 부장 놈들이 시장통 제일 좋은 도바는 다 쥐고, 소매상들은 거기에 목줄 잡혀 살고. 장사꾼이 장사할 자유도 없다, 그야말로 기가 막힌 판이지. 내가 그래서 공장 직구를 생각하는 기다. 우리끼리 힘을 모아 오이엠 방식으로 물건을 직접 찍어내면, 도매상에 종속 안 돼도 된다. 소매상들이 제 발로 서는 길, 그거 한 번 열어보자는 기라.”
나는 그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형님은 늘 후배 노점상들을 먼저 챙기는 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스쳤다.
“형님, 말씀은 맞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잘못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꺼. 큰 도매상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형님이 선두에 서면, 제일 먼저 형님이 그 타깃이 될 건데.”
형님은 쓴웃음을 지으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동생아, 세상이 언제 공평했더냐. 내 한 몸만 생각하면, 부장 자리 앉아서 월급 타먹어도 된다. 하지만 내가 그 자리를 안 맡는 이유가 뭐겠노. 내 밑에서 장사하는 놈들이 죄다 손해 보면, 그건 내 죄 되는 기다. 나는 그런 꼴 못 본다.”
그의 말에 나는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장터에서 수많은 몰락을 목격했다. 한철 대박 난 물건이 나오면, 대형 도매상이 금방 카피해 더 싼 가격으로 풀어버렸다. 결국 소매상들은 순식간에 손님을 빼앗겼다. 무리해서 대량 매입한 사람들은 결국 고물상에 헐값으로 넘기며 파산했고, 집 담보까지 날린 경우도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 형님이 선택한 방도가 얼마나 힘들지,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래서 더더욱 형님이 존경스러우면서도
가슴 한구석은 자꾸 불안이 일었다.
그날, 나는 묵묵히 국물만 들이키는
형님의 깊게 파인 주름을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그래, 나도 한때는 형님처럼 모든 것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 길은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한 길이었다.
길은 혼자 가면 흔적일 뿐이고,
함께 걸을 때에야 비로소 길이 된다는 걸
나는 노점에서, 그리고 악어형님에게서 배웠다.
악어형님, 기로에 서다
부산 중구 창선동 2가 세명약국 옆 골목.
모처럼 날이 개었다. 먹자골목 안 분주한 시장 소음과 어울려, 여기저기 도바에서 울려 퍼지는 당가 소리가 골목 안을 가득 메운다. 그러나 날이 더워지면서 여성 반팔 니트 상의 매출이 뚝 떨어져 버렸다.
나는 승부수를 걸기로 했다. 상품을 ‘사람처럼’ 의인화하는 당가, 구포장과 울산 만세대에서 구 씨 형님이 즐겨 쓰던 단골 메뉴였다.
“아이고, 거기 지나가시는 예쁜 사모님요! 잠깐만 이리 와 보이소. 뭐 땀시 바쁜 사람 불러 세우는 게냐고요? 아이고, 내가 미친 놈도 아닌데 와 그라겠습니까!”
사람들이 킥킥 웃는다. 나는 아랫배에 힘을 주고, 중저음의 익살스러운 목소리를 골목시장 한 가운데로 쏘아 올렸다.
“여기 이 예쁜 아가씨들, 공장에서 막 나온 따끈한 신상 아이 들어라 예. 여태까지 아침밥도 못 먹고 목 빼고 손님 기다리는데, 그냥 지나가면 이 애들 눈에 눈물 납니더. 아이고, 봐라 봐라, 이 얼굴 좀 보소! 하마 울고 있다 아입니꺼”
무심코 지나던 아주머니가 고개를 돌린다. 내가 연보라색 니트 한 장을 들고 그녀를 향해 흔들자, 피식 웃으며 발걸음을 멈추더니 도바 쪽으로 다가왔다.
“아이고, 내 새끼 순자야! 니는 인자 살았다. 이 사모님이 너랑 옆에 있는 네 친구까지 데려가실 거 아이가? 사모님, 맞지예?”
지나치다 이 장면을 본 행인들은 웃음을 참지 못한다.
“호호, 한 장 사러 왔다가 두 장이나 들고 가라는 건 파는 아저씨 욕심이지예.” 하면서도, 결국은 지갑에서 지폐 두 장을 꺼내든다.
나는 옆에 선 다른 여자손님을 보면서 목에 더 힘을 준다.
“쉬는 입에 밥 안 들어오고, 노는 손에 복 안 들어온다 안 합니꺼! 사모님, 이 아가들 한번 만져 보이소. 을매나 부드럽습니꺼? 깔이 살아 있다 아이니껴. 아이고, 얘야, 친구들만 시집간다고 울지 마라. 곧 니 차례다!”
사람들은 또 폭소를 터뜨린다. 웃음이 끊기지 않는 가운데, 지갑이 열리고 옷은 날개처럼 팔려 나간다.
장사의 비밀은 결국 타이밍이었다. 오전 열한 시에서 열두 시, 그리고 오후 세 시 반에서 네 시 반. 딱 두 번뿐인 그 황금 한 시간을 붙잡아야 했다. 그 시간에 손님을 모아, 구수한 입담으로 분위기를 끊지 않고 이어가야 했다. 몰입과 웃음을 공유하는 그 순간, 당가는 곧 최면이 되고, 지폐는 손님 손에서 내 손으로 흘러들어왔다.
한나절이 지나자, 그렇게 화창하던 하늘이 다시 흐려졌다.
“아이고, 또 비 오려 카네. 성호 씨, 이거 우짜노.내일도 장사 못하는 것 아닐까?”
말숙 아주머니가 옷을 박스에 급히 담으며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합시다. 어차피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인생 아닙니까. 색깔 빠진 물건 몇 개 채워야 하니, 아침에 도매상 들르면서 전화드릴게요.”
그날 저녁, 장사를 마친 노점상들은 대각사 뒤편 왕비다방으로 모여들었다. 이층 창가에 앉으면 먹자골목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자리. 악어형님의 단골 자리이자, 노점상들의 정보가 가장 활발하게 오가는 곳이었다.
영숙 씨가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머리에 쪽을 틀고 개량한복을 곱게 입고 있었다.
“어머나, 성호 씨. 오늘은 늦으셨네? 요즘 소문 들리던데? 이쁜 코스 아줌마 데리고 장사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면서, 호호, 나를 너무 서운하게 하는 거 아니에요?”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다방 뒤 편에 이미 스무 명 남짓한 노점상들로 가득했고, 서로 열띤 토론이 전개되고 있었다. 담배 연기와 진한 커피 냄새 속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악어형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동생들아, 내 결론은 딱 하나다. 우리가 더 이상 도매상 밑에서 끌려다니지 말자. 이제 우리가 공장에 직접 주문 넣어 원피스를 찍어내면 된다. 도매상한테 줄 수수료도, 부장 놈들한테 줄 자릿세도 필요 없다. 우리 힘으로 우리 몫을 챙기자는 기다.”
처음엔 술렁거리던 회의장이 곧 불안한 목소리로 가득 찼다.
“형님 말씀이야 고맙지만, 잘못되면 쫄딱 망합니다.”
“도매상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시장마다 자리 막아버릴 거라.”
“결국 물건 쌓아두고 있다가 팔지도 못하고 고물상에 다 넘기게 되는 거 아이겠습니까.”
회의 분위기는 결렬 쪽으로 기울었다.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대로라면 형님만 고립될 게 뻔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외쳤다.
“선배 노점상님들, 다들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악어형님이 그동안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오셨는지 다들 아시잖습니까? 부장 자리도 마다하고, 늘 후배들을 챙기셨습니다. 형님이 없었다면 이 바닥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지난번 먹자골목 노점 폐지 발표 때도 형님은 웃통을 벗고 휘발유를 몸에 끼얹은 채 시청에서 똥물 뒤집어쓰가며 몸부림치셨습니다.
정말 처절하게 싸워 도바들을 지켜낸 분이 형님 아닙니까. 도매상들이 누구 덕분에 지금까지 버텨왔습니까? 그런데 그때 도매상 부장들은 전부 뒷짐만 지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형님이 구속되었을 때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면회 한 번 다녀오신 분이 몇이나 되십니까. 어려운 일 생길 때만 형님을 찾지 말고, 이번 일에는 함께 동참해 주십시오.
선금 내시는 분들은 그만큼 물건을 더 저렴하게 받으니 이익이고, 저처럼 밑천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단기 외상을 주시겠다지 않습니까. 무엇을 더 망설이십니까. 이번에도 형님은 자기 몫을 챙기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도매상 밑에서 벗어나 자립할 수 있도록 길을 여는 일입니다. 저는 그 의리를 믿습니다!”
순간, 방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모든 시선이 나와 악어형님을 향했다.
그때, 문이 열리며 낯익은 얼굴이 들어섰다. 바로 신부장이었다. 지금은 부산에서 가장 큰 대형 도매상 상무 자리에 있다고 했다.
그가 내 쪽으로 다가와 친근하게 내 등에 손을 얹으며 한마디 했다.
“얘들아, 나도 여기 성호 씨에게 물건 대 주면서 장사같이 해봤다. 국제시장 난전에서 누구보다 머리 잘 쓰고 성실한 사람이다. 그리고 악어형님? 내가 이 바닥에서 본 사람 중에 가장 믿을 만한 분이다.
나는 이 제안을 지지한다. 나도 딸딸 긁어 2천만 원 투자하겠다
. 웬만하면 우리, 이번에 악어형님 좀 밀어드리자.
까놓고 말해, 다들 도매상 눈치를 안 볼 수 없다는 거 안다. 그래도 이번엔 한 번 밀어주자. 디자인은 내가 확인했다. 그 정도면 웬만한 도바에선 충분히 승산 있다. 내가 보증한다.”
순간 술렁이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몇몇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지만, 결국 합의가 도출됐다.
“직접 공장에 주문을 넣는다. 세부 사항은 악어형님과 신상무에게 일임한다.”
며칠 뒤, 각각의 도바에서 모은 선금이 모였으나 턱없이 부족했다.
악어형님은 나를 따로 불러 세웠다.
“동생아, 은행 좀 알아봐라. 내가 사는 집 담보로 대출 받을 수 있는지.”
“형님, 집 담보는 신중해야 합니다 ”
"이미 내가 결정했다. 지금 아니면 다시는 기회 없다.”
나는 말을 잃었다. 결연한 눈빛 뒤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나를 괴롭혔다.
‘집까지 걸고 나서는 게 옳은 길일까. 나는 끝까지 따라가야 하는 걸까.’
소문은 금세 퍼졌다. 도매상들이 압박을 시작했다. 장터마다 회유와 협박이 오갔다.
“우리 물건 계속 떼면 자릿세 반으로 깎아주겠소.”
“악어팀에게 했던 주문 취소하면 지난 외상도 탕감해 주지.”
일부 장사꾼들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이탈했다. 가뜩이나 부족한 돈에서 우리는 환불을 해주어야 했다.
공장 주문은 이미 진행 중, 형님 집은 이미 담보가액이 넘게 기존대출이 있어 추가 대출이 안되었다. 계약금을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 사업은 다시 기로에 섰다.
악어형님은 말없이 담배만 태웠다.
그날따라, 형님의 이마에 드리운 주름은 유난히 깊게 패어 보였다.
파국으로 가는 길
원피스 공장 전무가 왕비다방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잔금 기일이 지난 며칠 후였다.
무척 깐깐한 인상의 중년 신사였다.
회색 정장에 광이 나는 구두, 한 치의 움직임도 허투루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카운터 앞에서 잠시 멈추더니, 우리 쪽 테이블로 곧장 걸어왔다.
“악어 선배님 찾습니다.”
악어 형님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전무는 명함을 내밀고도 악수하지 않았다.
대신 단정하게 접힌 서류 봉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기일이 지났습니다. 오늘까지는 대금 일부라도 들어오는 줄 알았는데요.
전혀 움직임이 없더군요.”
형님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사정이 좀 꼬였습니다. 사흘만 시간을 더 주세요.”
전무가 짧게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순간 다방 안의 말소리가 모두 멎었다.
함께 있던 대팔이, 구 씨 형님, 누구도 커피잔을 내려놓지 못한 채, 그의 입술만 바라보고 있었다.
“사흘. 딱 사흘입니다. 그 안에 잔금 전액 입금이 없으면 계약은 불이행으로 처리됩니다. 그 경우, 생산된 상품은 전량 폐기. 원단비, 임금비, 설비 기회비용까지 손해배상 청구 들어갈 겁니다. 내용증명은 오늘 발송합니다.”
그가 꼿꼿한 자세로 돌아서서 나가고 난 후,
악어형님이 깊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흘. 끝장으로 가자는 거군.”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형님의 꽉 쥐어졌던 주먹이 테이블 밑에서 천천히 웅크렸다 펴지는 게 보였다.
그날 저녁, 자갈치 쥐약장수 양사장이 다방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바닷바람이 묻어난 비린내와 소금기, 자갈치 사람 특유의 냄새가 풍겼다.
“악어동생! 내가 사람 하나 붙여놨다. 진주 중앙시장 양세영, 내 친동생 아이가.” 양사장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말했다.
“서부경남 라인 제일 큰손이다. 조건 맞으면 현찰 박치기 가능하다 카더라.”
악어형님 눈에 스파크 같은 게 번쩍했다.
“조건은요?”
양사장이 검지, 중지 손가락 두 개를 차례로 펴면서 말했다
“하나, 서부경남 쪽으로는 저거들 말고는 니들 물건 절대 안 푼다. 둘, 공장 원가에 십 프로만 붙인다. 대신 공장 앞에서 물건 출하되는 즉시 현장 인도. 잔금도 그 자리서 현금으로 박는다.”
나는 다시 한 번 묻듯 정리했다.
“정리하면, 내일 공장 앞에서, 바로 양 사장님 동생 쪽으로 물건 인도. 그 대금으로 공장 잔금 메꾼다, 맞죠?”
양사장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맞다. 구두로 가자. 이 판 급하다 아이가. 계약서 들이밀 시간 없다.”
악어형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양사장께 머리를 숙이며.
“고맙습니다. 양사장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양사장이 씩 웃었다.
“ 인사는 무슨, 고마 내일 아침, 진주 쪽 트럭 둘, 기사 셋 준비해 놓을 기다.”
그날 밤, 우리는 양사장과 함께 공장으로 보낼 연락처를 정리하고, 트럭 기사들과 시간과 장소를 다시 맞췄다.
“아침 여섯 시까지 공장 앞에 대기하겠습니다.” 기사들의 굵은 목소리가 전화선 너머로 이어졌다.
안도의 기색이 서서히 번져갔다.
배영숙의 자금 마련
다음 날 새벽, 우리는 진구 당감동 용사촌 입구 공장 마당에 섰다. 새벽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고, 포크리프트가 후진할 때마다 ‘삑—삑—’ 경고음이 공장 마당을 쪼갰다. 투박한 비닐에 감싼 박스들이 허리에 물린 벨트처럼 줄을 섰다.
양세헌 쪽 트럭 두 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마당으로 들어왔다. 운전기사가 차문을 박차고 내려 담배에 불을 붙였다.
“진주서 새벽 세 시에 나왔심더.” 기사 하나가 말했다.
“인도 서류만 나오면 바로 실을 수 있심더.”
나는 시계를 봤다. 08:12. 약속된 기사들이 모두 도착했다는 소식이 돌았다.
곧 물건이 우리 손에 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몇십 분이 지나도록 잔금은 입금되지 않았다.
은행에서도 “입금 예정이 없다”는 답만 돌아왔다.
전화선 너머로 한동안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왕비다방으로 돌아왔을 때, 창밖에는 여름비가 갑자기 쏟아지고 있었다.
배영숙이 계산대 뒤에서 조용히 장부를 덮었다.
“내가 마련하겠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이 다방 보증금, 권리금… 담보로 잡히든 선계약으로 넘기든,
오늘 바로 움직이면 모레까지는 그 돈 준비됩니다.”
악어형님이 벌떡 일어섰다.
“영숙아, 그건—”
“오늘은 내가 당신을 지킬 차례야.” 그녀가 말을 끊었다.
그녀는 곧장 광복동 사채시장 김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가 보증금과 권리금 담보로 급전 필요해. 내일 안에 실행되야 해요”
짧은 대화 끝에 ‘내일 오후 실행 가능’이라는 답을 받아냈다.
이어 원금회수가 늦어질 만약의 경우를 예상해, 다방 급매로 부동산에도 전화를 돌렸다.
“지금 들어와. 내일이면 늦어.”
악어형님은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영숙아, 내가 약속한다. 이 돈, 반드시 살아서 갚는다.”
“약속은 하지 마세요. 지금은 살아서 버티는 게 먼저야.”
비가 다방 유리를 아까 전 보다 더 세차게 때렸다. 그 순간 우리는 모두 알았다.
이 싸움은 더 이상 장사 수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로 버티는 마지막 다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