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화범이 된 구 씨 형님 <도바 위에 뜬 별 1부 제19 화>
구 씨 형님
구 씨 형님은 키가 크지도, 그렇다고 아주 작지도 않았다.
몸은 마르고, 늘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버릇이 있어
처음 보는 사람은 괜히 챙겨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필요할 땐 누구보다 매서운 사람이었다.
자그마한 눈은 언제나 바쁘게 움직였다.
남들보다 먼저 손님 눈치를 살피고, 잘 팔리는 물건이 보이면 곧장 같은 품목을 떼 와서는 아무렇지 않게 바로 옆에서 팔았다.
약삭빠르고 얄미운 구석이 있었지만, 장사판이란 원래 살아남는 사람이 이기는 법이었다.
나도 속으론 혀를 찼지만, 이상하게 미워할 수는 없었다.
지난 봄 장마 때 였다.
장사가 풀리지 않아 집세는커녕 삐삐 요금까지 밀려,
외부와 연락이 끊긴 채 며칠을 버티던 때였다.
일당 자리라도 없을까 싶어 시장 골목을 헤매다 초량 반지하 방으로 돌아와 몸을 눕히려는 순간,
문이 덜컥 열렸다.
구봉성당 앞에 봉고차를 세워두고, 우산을 접은 채 들어온 사람은 구 씨 형님이었다.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한 그릇, 김치 한 봉지,
그리고 갈비탕이 담긴 주전자가 들려 있었다.
“성호야, 와 여기 찾느라고 내가 식겁했네.”
“어, 형님이 여긴 어떻게...”
“전에 니 데려다준다고 한번 왔었다 아이가. 그땐 밤이라 잘 몰랐지.
근데 이 사람아, 니는 왜 그리 연락이 안 되노
. 삐삐는 꺼져 있고. 장사하는 사람이 연락 끊기면 큰일 난다, 서로 사정도 모르잖아. 혹시 통신비 밀려서 끊긴 거 아이가?”
말끝은 투박했지만, 갈비탕 냄새며 김치 봉지에서 새어 나오는 매운 향이 그 마음을 대신했다.
그는 자기도 빠듯할 텐데, 통신비랑 당장 쓸 돈을 억지로 내 손에 쥐여주고 갔다.
그날 이후, 나는 그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도바판의 얍삽한 장사꾼이 아니라,
진짜 형님으로.
그 후로도 형님은 종종 갈비탕 냄새를 들고 내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기 전부터 그 냄새가 먼저 들어왔고,
그 냄새 속엔 늘, 말보다 깊은 정이 배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갈비탕 같은 육류 음식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부터 갈비탕은 내 애호 음식이 되었다.
음식은 결국 추억과 인정이다.
지금도 ‘갈비탕’이라는 말만 들으면,
그날 형님이 들고 왔던 진한 한우 육수의 구수하고 깊은 내음과 함께
그 시절의 훈훈했던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그는 마흔을 훌쩍 넘긴 딸 하나를 둔 홀아비였다.
장흥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떠돌며 살았고,
잠깐 정 붙이고 살았던 여자와는 일찌감치 헤어졌다고 했다.
그녀와의 사이에 서울대 의대 진학 안정권에 든다는 명석한 고3 딸이 있었다.
한때는 그는 전국 노래자랑대회에서 입상한 적도 있었다.
그의 꿈은 언제나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틈만 나면 봉고차 안에서 라디오를 켜놓고 신곡이 나오면 따라 부르곤 했다.
가끔은 『논어』나 『대학』 같은 고전 책을 꺼내 메모를 하며 읊조리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도바의 철학자’라 불렀지만, 그는 남의 평판 따위엔 무심했다.
겉보기엔 얄밉고 속물 같았지만, 결코 속물이라고 쉽게 부를 수 없는
그의 마음속엔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는 서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서정의 중심엔 분식 포차를 하는 미선 어머니가 있었다.
시장 여자들답지 않게 미선 어머니는 늘 조곤조곤 이야기했고,
손님들과도, 상인들과도 언성 한 번 높이지 않았다.
구 씨 형님은 그런 그녀를 좋아했다.
분식 포차 근처를 서성이며 젓가락이 떨어지면 슬그머니 주워주고,
손님이 몰리면 말없이 테이블을 닦았다.
분식 포차 근처를 서성이며 젓가락이 떨어지면 슬그머니 주워주고,
손님이 몰리면 말없이 테이블을 닦았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행복한 듯이 보였다.
술자리에서 그는 무심한 듯 내게 말했다.
간혹 손님이 뜸할 때면 미선 어머니와 따끈따끈한 국수와 몇 마디의 담소.
그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행복했다.
“성호야,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더라.
몸뚱이는 도바 판에 붙어 있는데,
내 눈은 늘 그쪽으로만 가는기라.”
그의 눈길은 언제나 분식포차를 향했다.
미선 어머니가 웃으면 함께 웃고,
그녀가 고단해 보이면
구 씨 형님의 한숨이 먼저 흘러나왔다.
그는 단 한 번도 직접 말하지 못했다.
“같이 살자”는 고백이 목까지 차올라도,
봉고차에 붙은 주차위반 딱지며 연체된 카드 대금이
그 말을 삼키게 했다.
그래서 그는 고백 대신,
곁에서 지켜보는 사랑을 택했다.
누가 봐도 지극한 짝사랑이었다.
나는 그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하지만 언젠가 그 사랑이
그를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늘 하고 있었다.
장터에선 바람보다 소문이 더 빠르게 돈다.
얼마 전부터 일수 아주머니가 뻔질나게
미선 어머니의 포장마차를 드나들었다.
둘 사이에 뭔가 남모르는 이야기가 오가는 눈치였다.
그 무렵부터 미선 어머니는 종종 어둔 기색으로,
분식 포차를 평소보다 훨씬 일찍 마치곤 했다.
손님이 한창 몰려들 시간인데도,
무언가에 쫓기듯 서둘러 마무리하고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미경이, 요즘 수정찻집 자주 들락거린다 카더라.”
“송도 여관 쪽에서도 봤다 안 카나.”
“허어, 염소대가리 그놈 손 안 탄 데가 없지. 그 반반한 얼굴을 그냥 두겠나.”
부평 국밥집에서 점심을 해결하던 시장 여인들 사이에 소문이 먼저 떠돌았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남의 일이지만 저으기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지난번에 벨트 장사 미옥이 그 가시나 꼴 나는 거 아니겠나.”
“글쎄 말이다. 요새는 또 토성동 술집 나간다 카더만.”
“그 술집도 염소대가리 거 라더라. 수정찻집도 지 꺼고,
그 찻집 마담하고도 그렇고 그런 사이라 카더만.”
국밥그릇이 비워지며 잠시 말이 끊겼다.
점심값을 계산하며 바스락대는 소리 사이로 누군가 낮게 덧붙였다.
“미경이 그 애가 그럴 줄이야... 참 착했는데, 사람 속은 알 수 없제.”
낮은 목소리들이 국밥집 김처럼 골목 안 여기저기 피어올랐다.
구 씨는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 말들이 자꾸 귓속에서 되살아났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식은 국밥 그릇을 오래 바라봤다.
그날 밤, 그는 평소보다 일찍 리어카를 보관시키고 오다 우연히 그 장면을 보게 되었다.
야한 색의 네온 간판이 이른 저녁부터 번쩍이는 수정찻집 앞,
문이 열리더니 먼저 염소대가리가 나왔다.
그리고 곧이어 미선 어머니, 미경이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따라 나왔다.
두 사람 사이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나 말없는 침묵은 말보다 더 크게 구 씨에게 와닿았다.
구 씨는 골목 모퉁이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생각이 정지된 채 오늘 쪽 손만 코트 주머니 안의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내가 멀리서 “형님—” 하고 불렀지만,
그는 듣지 못한 듯 고개만 깊이 숙였다.
그렇게 형님의 순정은, 단속반원들의 발에 차여 쏟아지던 힘없는 국수 가락처럼
아무렇게나 부평동 길바닥에 흩어져 버렸다.
그날 밤 이후, 구 씨의 눈빛은 달라졌다.
늘 포차 불빛을 향해 머물던 시선이,
이제는 어둠을 더 오래 붙잡고 있었다.
며칠 뒤, 또다시 깊은 밤이었다. 그는 봉고차 뒷좌석에서 검은색 석유 말통을 꺼내 들었다.
석유통이 흔들리며 내부의 묵직한 액체가 출렁일 때마다,
그의 몸도 함께 흔들렸다.
그의 발걸음은 국제시장 끄트머리, 수정찻집 근처 보관소 쪽으로 향했다.
찬 밤공기 속에서, 낮부터 쉬지 않고 들이킨 소주 냄새가 숨결에 섞여 흘렀다.
겨울밤의 바람이 살을 에듯 불어왔지만,
그는 느끼지 못했다.
눈앞에는 오직 두 장면이 엇갈리며 번쩍였다.
포차에서 가락국수가 목에 걸려 캑캑대던 그를 보고 웃던 미경이의 얼굴.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염소대가리 뒤를 죄인처럼 따르던 그녀의 뒷모습.
그 두 장면이 겹쳐지며, 그의 가슴 한가운데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무너진 가슴의 저편에서 이제 노래 대신 불길이, 사랑 대신 증오가 불타고 있었다.
“나는, 끝내 고백 한마디 못 했지….”
술에 젖은 혼잣 목소리가 노래처럼 허공에 흘렀다.
그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장사판에서 굳은살이 덕지덕지 박인 손.
그 손으로 무엇을 지켰던가. 결국 여자 하나도 지켜내지 못했다.
방화범으로 몰린 구 씨 형님
그는 보관소 철문 앞에 바짝 다가섰다.
석유통을 내려놓고 라이터를 꺼냈다.
그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차가운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
“불로 다 태워 버리면, 내 가슴속 응어리도 끝날까….”
속으로 삼킨 말이 허공에서 메아리처럼 번졌다.
그는 알았다. 불길 하나로 미경의 마음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태워 없애야만 견딜 수 있었을 것 같았다.
여자를 빼앗아 간 염소대가리,
그놈에게 붙어사는 더러운 세상,
그리고 자신을 조롱하듯 돌아가는 시장의 냉혹한 질서까지.
그는 석유말통의 마개를 끝까지 돌렸다.
석유 냄새가 진하게 올라왔다.
석유냄새를 맡으니 약간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겨울바람이 차가웠음에도, 그의 등줄기는 달아올라 있었다.
“돌리면 끝이다. 불 하나면, 이 응어리,
내가 받은 굴욕, 돈에 짓밟힌 사랑도 모두 다 사라진다…”
속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지만,
그의 손가락은 차마 라이터 돌을 튕기지 못했다.
고3 딸아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해준 적 없는 아이였다.
저 혼자 태어나서, 저 혼자 자랐고, 저 혼자 공부했다.
그리고 그저께, 서울 의대 합격 통보를 받았었다.
며칠 뒤면 졸업식이었다.
라이터가 다시 주머니 속에서 미끄러졌다.
잠시 그대로 서 있던 구 씨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석유통을 끌어안고 돌아섰다.
그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부하들이 튀어나왔다. 발자국 소리, 몽둥이가 바닥을 치는 소리, 숨죽였던 그림자들이 일제히 골목을 메웠다.
“잡아라! 저 새끼”
좁은 보관소 골목에 낮고 거친 고함이 난무했다.
구 씨가 반응하기도 전에 석유통은 그의 품에서 낚아채였다.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며 붙잡으려 했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누군가의 팔꿈치가 그의 옆구리를 세차게 찔렀고, 숨이 막혔다.
“야, 이 새끼. 네 여자도 못 지키면서 불장난이나 하려고 했나!”
“인자 끝났다. 오늘 니는 우리 소장님 앞에서 개처럼 무릎 꿇어야 된다.”
비웃음과 욕설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구 씨는 이를 악물었다. 그 말들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부하 중 한 명이 석유통 마개를 거칠게 돌렸다.
찰랑거리는 액체 소리가 밤공기를 울렸다. 곧장 시커먼 기름 냄새가 골목에 진동했다.
그리고 바닥에 쏟아진 석유가 찰박거리며 콘크리트 바닥 위로 번졌다.
“이래야 확실하지.”
라이터 불꽃이 켜졌다.
짧은 푸른 불길이 이내 붉게 변하며 바닥에 튄 순간, 석유가 순식간에 타올랐다.
노란 화염이 번쩍, 보관소 입구를 물들이며 치솟았다.
구 씨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아니야… 내가 지른 게 아니야. 난 불 붙이지 않았어!’
가슴 깊은 곳에서 절규가 터졌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또다시 불길이 일순 번쩍이는 동안, 그의 심장은 폭발하듯 요동쳤다.
불타는 냄새, 타닥거리는 소리, 사람들의 놀란 고함.
그러나 동시에, 다른 부하들이 들고 있던 소화기가 요란하게 분사되었다.
하얀 분말이 쏟아져 나오며 불길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화염은 잠깐의 환영처럼 꺼졌지만, 남은 것은 타다 남은 냄새와 매캐한 연기, 그리고 그 모든 걸 지켜보던 부하들의 비웃음뿐이었다.
“됐지? 이제 119에 신고하고 경찰 부르면 된다.”
부하 중의 한 명이 휴대폰을 꺼내 급히 번호를 눌렀다.
구 씨는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기 아니다… 내가 불 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갈라지고 떨려서, 마치 제 발로 죄를 인정하는 변명처럼 들렸다.
심장은 미친 듯 뛰었지만, 발걸음은 굳어 있었다.
벗어나야 했다.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도망치면 진짜 방화범이 된다. 하지만 여기 서 있어도 믿어줄 사람은 없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마치 불길 속으로 자신이 삼켜져 버린 듯.
곧이어 사이렌 소리가 골목 저편에서 울려왔다.
“위이이이이이잉 위이이이이이잉”
119 소방차가 도착하자, 부하들이 호들갑을 떨며 외쳤다.
“여기예요! 저놈이 불 지르려다 실패한 거라!”
“우리가 빨 리 끄 지않았더라면 오늘 국제시장 다 탈 뻔했어요
. 이놈이 계획적으로 대형 화재를 내려고 했던 놈이라요.!”
그리고 거의 동시에 경찰차가 도착했다.
붉은 경광등이 띠또띠또 소리와 함께 빙글빙글 돌며 어둠을 찢었다.
경찰들이 뛰어내려 상황을 확인했다.
보관소 입구 바닥엔 석유가 널려 있었고, 공기 중엔 매캐한 연기가 자욱했다.
부하들이 흘린 증언이 그 위에 윤색됐다.
“이놈이 불을 질렀습니다!”
“라이터로 직접 불 붙이는 거 내가 봤다 아입니꺼!”
구 씨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다! 나는… 불 안 붙였다. 난 그냥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미 굳은 표정으로 다가와 그의 양팔을 잡아챘다.
수갑이 철커덕 구 씨의 손목에 채워졌다.
차갑고 무거운 쇠의 감촉이 손목을 파고들자, 그는 비로소 모든 게 끝났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 구 씨의 머릿속은 텅 비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을 거라는 절망감,
미경이를 끝내 지켜내지 못했다는 패배감,
그리고 이제 자신이 방화범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쓰고 사회에서 내몰릴 거라는 두려움.
모든 게 뒤엉켜 가슴을 후벼 팠다.
‘내가 뭘 잘못했노. 그냥 미경이를 좋아했을 뿐인데…
그냥 곁에 있고 싶었을 뿐인데…
이리돼야 했나….’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는 이를 악물었지만, 치미는 울분과 굴욕이 목구멍을 꽉 틀어막았다.
경찰차 문이 열렸다.
강제로 밀어 넣는 손길에 비틀거리며 몸이 처박혔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여전히 자욱한 연기, 석유 냄새,
그리고 어둠 속에서 킥킥대며 담배를 문 염소대가리 부하들의 실루엣들이었다.
다음날 저녁, 대팔이랑 말숙 씨가
왕비다방으로 들이닥쳤다. 얼굴빛이 심상치 않았다.
“성호야, 큰일 났다.”
대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숨소리부터 거칠었다.
“우리가 소장 놈 현장에서 잡았다 아이가. 미선 어머니 비명 듣고 문 열었더니… 그 자식이 붙들고 있더라. 사진도 찍었다 아이가 ”
나는 말없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 불 붙일 틈도 없이 대팔이가 하소연조로 계속 말을 이었다.
“근데, 웃기는 소리 하더라. 우리가 공모한 거라 카더라.
기가 막혀서…. 이거 그대로 경찰 불러봤자,
오히려 미경 씨까지 우리 셋이 다 묶일 판이다.”
대팔이 씩씩대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증거를 챙긴 것도 아니고, 그냥 들이쳤잖아.
소장 그놈, 배짱 장난 아니다. 억지로 밀어붙이면, 우리가 당하겠더라고”
나는 그제야 담배 불을 붙였다.
연기를 깊이 빨아들이며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그래서 나한테 온 기가. 내가 절대 섣불리 행동하지 말라고 했잖아”
“우리 딴에는 염소대가리가 미선어머니를
덮치는 장면만 잡으면 될 줄 알았지.
그래도. 이제 니밖에 없다. 악어형님은 거제도 본가에 가 계시고,
미선 아주머니는 저 꼴이고… 더 늦기 전에 결판 내야 된다.”
다음 날, 수정 다방 밀실로 내가 들어섰다.
탁자 건너편에 소장이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보고 비죽 웃고 있었다.
마치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능글맞은 눈빛이었다.
“자네가 기자 출신이라 매. 기자면 알 거 아이가. 증거 없으면 다 헛소리다.”
나는 무표정한, 지극히 사무적인 눈빛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말없이 탁자 위에 내려놨다.
“소장님, 합의라고 우기고 싶겠지만 상황 증거 여기 모두 채증해놨습니다.
당사자 진술 녹음, 어제 현장 사진까지 이 봉투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당사자가 지금 합의를 부인하고 있어요.
돈을 퍼붓지 않는 이상 구속은 못 면합니다.
그리고, 내가 명색이 언론계 출신인데 그 꼴 보고 가만있지도 않을 겁니다.
전세금 압류로 미선 어머니 협박한 녹음, 고리사채 빌려 쓴 사람들 증언,
세금 안 낸 보관료 장부 카피 — 다 있습니다.
확인하시죠.”
소장의 웃음이 순간 굳었다.
그러나 이내 목소리를 낮췄다.
“허, 그래도 경찰은 내 편이다. 담당 형사들, 내가 손바닥 보듯 한다.”
나는 그의 앞에서 아직 다 타지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천천히 비비다 꾹 힘을 주면서 눌러 껐다.
그리고 이때까지와는 달리, 기자 시절 버릇대로 상대를 곧장 찔러갔다.
나는 목소리를 더 낮추고 말은 아주 부드럽게 그러나 전혀 감정을 섞지않고 말했다.
건설회사 비리 취재등 거친 현장에서 단련된, 익숙한 방식이었다.
“이봐, 소장. 까놓고 말해서, 당신 정도면 시경 감찰계 전화 한 통에 보낼 수도 있어.”
악어 형님 사무실에, 당신과 경찰들 돈 주고 짜웅하는 사진, 수두룩 늘려 있던데.
꼭 불쌍한 경찰들까지 옷 벗게 만들어야 했어?
소장, 내가 불과 몇 년 전까지 부산 시경 출입기자단 ‘캡’이었거든.
당신 ‘캡’이 뭔지나 알어?
근데 말이야, 이 서류, 경찰로는 안 보내.
감찰 결과 나올 때까지 우린 못 참아.
우리, 인내심이 없거든.”
악어 대가리는 내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얼이 빠진 듯했다.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한 채, 멍하니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혼란과 두려움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소장, 지금 부산 동부지청 수사과장 전화번호 불러 줄테니,
바로 돌려 확인해봐. 김성한 과장님이 내 매형이야 .
오늘 특별히 인사시켜줄께. 여기 성 폭행범 한 분 계시다고,
그리고 당신 부하들은 방화범으로 학교 갈래? 실화로 벌금 낼래?
영특하신 소장님, 잘 알아 해야겠지 "
내가 말을 마치자, 소장은 태연한 척했지만 겁먹은 기색을 숨기지는 못했다.
물컵을 들고 있는 손이 눈에 보일 정도로 심하게 떨고 있었다.
얼굴은 죽상으로 일그러져, 마치 사약이라도 삼킨 사람의 표정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의 좁고 비루한 얼굴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쐐기를 박듯 한마디를 더 했다.
“소장님, 미선 어머니에게 위자료는 충분히 드리세요.
그게 당신이 제일 손해를 덜 보는 길입니다”
끝말은 항상 존대어로 마무리한다.
그게 상대를 제압하는 가장 확실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을 끝내고, 가자고 하듯 뒤를 돌아보았다.
말숙 아주머니는 팔짱을 낀 채,
금세라도 악어대가리를 한입에 삼킬 듯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대팔과 칠근이도 내 말을 들으며 어깨가 잔뜩 올라가 있었다.
셋 다 기세가 등등했다.
소장은 한참 말없이 앉아 있다가,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알겠소. 구 씨 건과 미선 씨 건은 지금 바로 처리하겠소. 대신… 이번 일, 밖에 안 나가도록—”
소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칠근이 들고 있던 우산대 쇠꼬챙이가 그의 미간을 향했다.
“어이, 염소대가리. 고개 똑바로 들어.”
칠근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쇠꼬챙이 끝이 흔들리지 않았다.
“니, 앞으로 대가리 처박고 싶을 때는, 상대를 잘 보고 대가리 박아라.”
그가 짧게 덧붙였다. “니도 아마 칠성파 쪽에 줄이 있던 것 같은데… 거기 쪼가리 애들 말고, 행동대장 봉기한테 한 번 물어봐라. 수영 칠근이가 누군지. 니 이번에 운 정말 좋은 줄 알아.”
나는 봉투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이 서류, 다음에는 경고 없이 바로 동부지청 형사 2 부장 책상 위에 올라갑니다.
몸조심하시오.”
소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망연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왕비다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대팔이가 내게 물었다.
“성호야, 와 니 아까 완전 기자 카리스마 작열하더라. 근데 언제 그렇게 자료를 많이 모았노? 봉투도 제법 두툼하던데.”
나는 그를 쳐다보고 별거 아니란 투로 그냥 씩 웃음만 지었다.
오늘, 오후 왕비다방에 배달된 석간 일간지 두 부였다고는,
차마 말하지 않았다.
대팔이의 기자에 대한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 구 씨 형님이 유치장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