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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대가리의 흉계

미선어머니 사채의 덫에 빠지다 <도바 위에 뜬 별 1부 제18화>

by 손병호

밀양 고객길에서 만났던 여인과의 재회


양사장의 성대결절은 놀랄 만큼 빨리 나았다. 일주일도 채 안 되어 목소리에 힘이 붙었고, 그는 다시 장터에 섰다.

“아우님, 별다른 계획 없으면 이대로 같이 해보자. 손발도 잘 맞고, 장사도 술술 풀리잖아.”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장님, 고맙지만 이쯤에서 그만하려고요.”

“왜? 돈 문제는 내가 챙겨줄 건데.”


“그게 문제입니더 돈보다… 저는 한자리에 오래 있질 못합니다. 전에 다니던 은행도 갑갑해서 나왔는데, 형님이 잘해주시니 더 미련이 남을까 걱정입니다.”


양사장은 말없이 잔을 들었다.
“그래, 아우 마음 알겠다. 그래도 시간 나면 한잔하러 들러라. 너하고 마시는 막걸리 맛이 참 좋더라.”


그가 건넨 마지막 잔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일주일치 수당은 예상보다 많았다. 내 통장엔 120만 원이 찍혀 있었다.

남은 장마철은 그 돈으로 버틸 만했다.


그날 저녁, 용두산 아래 중동집에 들러 밀린 외상값을 갚았다.

소주 한잔을 따르려던 찰나, 삐삐가 울렸다. 대팔이었다.


“성호야, 니 찾는 사람이 왔다. 젊은 여잔데, 니는 자기를 잘 모를 거라더라.

무슨 소린가 싶어 중동집으로 오라 했다.


십 분도 채 안 돼 뜻밖의 사람이 나타났다.
밀양 고갯길에서 잠시 스쳤던 그 여자가, 광복동 골목 한복판에 다시 나타났다.


이름은 윤지혜, 부산지역 민영방송 KMN 의 피디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윤지혜는그녀의 이모부가 밀양시장이고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 일부러 밀양에 다녀가곤 한다고 했다.


이모와 밀양 장날 나들이 하면서 내가 밀양식당앞에 장사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했다.

그리고 그곳 주인에게서 내가 부산 국제시장으로 옮겼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부산의 노점상 맛집을 일본 오사카 방송국에서 취재하겠다고 해서요.
객관적으로 소개할 만한 분이 누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노점 선생님이 국제시장에서 장사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말의 이면엔 오래 눌러둔 감정이 엿보였다.

나는 대팔 이모를 소개했고, 방송은 예상보다 훨씬 잘 풀렸다.


촬영팀은 시장 골목의 활기와 노점 사람들의 순박한 모습을 담아냈고,
프로그램은 한일 교류 기획 중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 일을 계기로 윤지혜와 나는 자주 만나게 되었다.
커피를 마시며 문학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점점 더 불편해졌다.
내가 살아온 골목의 냄새와 그녀의 세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경계가 있었다.


한편 나는 장귀자 대표와의 만남도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남천동 삼익아파트 전세를 얻어놓았으니 그리로 옮기고
도시계획 석사 과정을 마쳤으니 대학 강사와 동시에
박사과정을 밟으라고 권했다.자기가 친분이 두터운 대학총장에게 부탁하면 가능하다고햇다.


그녀의 말에는 일종의 설계도가 있었다.
내 대학원 지도교수가 지금 부산 도시계획위원회 위원장으로
지역 개발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 뒤를 이어가라는 듯한 눈치였다.


어쩌면 그녀는 나를 통해 자신의 부동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안정된 세계를 완성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그리는 구도가 구체적일수록,
내 마음은 오히려 점점 무거워졌다.



그 모든 것이 내겐 남의 옷을 입은 듯 어색했고,
그 속에서 나는 점점 작아졌다.
결국 내가 장귀자 곁에 머문 건
사랑이라기보다 못난 자존심의 반작용이 아니었을까.


소위 ‘출세’나 ‘행복’ 같은 단어가
내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보면,
오히려 공허감이 밀려왔다.


그럴수록 그녀와의 만남에는
점점 회의와 피로가 뒤섞이기 시작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방랑자, 역마살에 묶인 인간인가.’


결국 나는 윤지혜에게 장귀자 대표와의 이상한 관계를 모두 털어놓았다.
그녀는 처음엔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얼굴을 돌리고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는 식은 커피잔을 밀쳐놓으며 말했다.

“당신은… 내가 생각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녀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며칠 뒤, 장귀자에게 전화를 걸어
“기대에 부응할 자신이 없습니다. 모든 게 제 욕심이었습니다.”
그 한마디만 남겼다.


윤지혜에게도 몇 번 전화를 걸었지만
끝내 받지 않았다.
문자로 남긴 말에
“조금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어요.”
그게 마지막이었다.


나의 어쭙잖은 로맨스는
제대로 익기도 전에 식어버렸다.


비 내리던 봄장마처럼,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그렇게 지나갔다.



그러나 사실, 내가 먼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다.

내가 장귀자와 윤지혜를 만나기 그 몇 달 전,

나보다 더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가 있었다.

바로 지난 겨울, 구 씨 형님의 이야기였다.


타인의 사랑을 이야기하기 전에
앞서 꺼내둔 내 이야기를 먼저 정리해야 했기에
서둘러 내 이야기를 풀어놓았었다.


물론, 돌이켜보면 나와 지혜와의 인연도 결코 단순한 일은 아니었다.

언젠가 다시 그 뒷이야기를 해야겠지만,
지금은 잠시 내 마음을 접어두고
구 씨 형님의 피 말리는 순애보를 들려드리고자 한다.



리어카 보관소장의 흉계


그날 밤, 그리고 며칠 동안 나는 그 사건의 현장에 없었다.

내가 손에 쥔 것은 흘러 다니는 말의 파편뿐이었다.


장터 구석구석에 퍼진 추측, 왕비다방 한쪽에서
‘염소대가리’라 불리는 리어카 보관소장의 부하들이


일부러 남 들으라는 듯 내뱉은 상스러운 말들―
그 모든 걸 다방 주인이자 마담인 영숙을 통해 나는 들었다.


“구 씨 형님, 술에 약 타 묵고 쓰러졌다 카더라.”
“미선 어매, 결국 애 손 잡고 나가 삔 모양이라더라.”

나는 그 조각난 말들을 맞춰 보았다.
소문은 서로 엇갈리고 모순됐지만,
그 틈새로 장터의 냄새, 수정다방의 음침한 기운,
한 여인의 떨림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미선이네 모녀가 사라진 자리는 유난히 허전했다.
그들이 깔던 낡은 스티로폼 상자는 여전히 골목 모퉁이에 남아 있었고,
아무도 치우지 못한 채 바람에 나부끼며 빈자리를 증언하고 있었다.


그 시절은 IMF의 바람이 모든 것을 쓸어가던 때였다.
은행 문은 하루아침에 닫히고,
어제까지 정장을 입던 이들이 오늘은 길바닥에 나앉아
양말이나 휴지를 팔았다.


그 광경은 우리 노점상들에게도 낯설고 두려웠다.

우리가 왜 남들의 손가락질을 감내하며
신용협동조합을 세우려 했던가?
답은 바로 이런 절망의 나날 속에 숨어 있었다.


이후의 일들은 더 이상 내 한 사람의 눈으로만 기록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시장 골목의 목소리, 다방의 의자, 떠도는 말들, 흘러나온 말들이 모두 증인이 되었으므로,
나는 이제 그들의 목소리에 빈곤한 내 상상력을 종이 한장 정도에 덧 붙여 이 장을 재구성해본다.




다방 앞 그림자


국제시장과 4차선 도로를 경계로 이웃한 부평시장 끄트머리와 아미동이 만나는 삼거리.

이곳은 지금은 금지되었으나 한때 오전에는 개와 고양이를 전문적으로 파는 오일장이 섰던 곳이다. 서로 각자 돈과 새끼를 가지려는 양측 주인끼리 조건이 맞으면, 즉석에서 동물들의 번식 행위 장소가 되곤 했다.


시내에 가까운 곳이지만 제때 치우지 않은 동물 배설물 냄새, 닭·오리·고양이·개의 냄새로 대부분의 주민들이 기피하는 장소였다.

이곳엔 가축 장수들과 달리, 남의 눈에 띄기 싫어하는 종류의 사람들이 은밀히 이용하는 수정 찻집이라는 쉼터가 있었다.


간판 불빛이 희미하게 흔들리는 수정찻집 앞.

겨울바람에 길가 현수막이 세차게 펄럭이고,

누군가 함부로 버린 음료수 캔이랑 담배꽁초가 바람에 나뒹굴고 있다.

미선 어머니, 올해 갓 서른을 넘긴 미경 씨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내석에 앉은 마담이 곁눈질을 했다.

“왔네!….” 짧게 중얼거리더니 종업원에게 눈짓했다.

미선 어머니는 고개를 숙인 채 종업원을 따라갔다. 그녀의 손은 치맛자락을 꼭 쥐고 있었고, 발소리는 점점 더 무거워졌다.


찻집 안은 어두웠다. 이름은 찻집이지만, 70년대 후반에 유행했음직한 싸구려 여인숙을 개조한 티가 물씬 났다.

프런트는 오래된 대형 거울―거기엔 <축 발전, 증 **은행>이라는 금박 글씨가 적혀 있었다―을 뒤로하고, 웬만한 남자 가슴 높이 정도 되는 목조 안내 데스크가 있었다.

그리고 서너 평 남짓한 공간에 테이블 몇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프런트와 연결된 긴 복도의 끝 흰색 벽에는 추운 날씨에도 반라의 여성이 웃고 있었다.

벽에 붙어 있는 대형 달력이었다.


복도를 마주하고 양편으로 룸들이 잇달아 있었다.

닫힌 문틈 사이로 비치는 구조는 단순했다.


작은 테이블, 재떨이, 옷걸이, 그리고 방 크기에 비해 지나치게 넓은 소파가

이 다방의 특이한 구조와 의외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오래된 재떨이에서 풍겨오는 매캐한 냄새로 가득했다.


작은 밀실. 천장 형광등은 희미하게 깜빡거렸고,

낡은 소파에는 누군가 흘린 커피 얼룩이 번져 있었다. 벽지는 눅눅하게 들떠 있었다.


염소대가리가 푹신한 소파에 기대어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 마침 들어서는 미경 이를 보자 반갑게 일어났다. 그의 눈빛은 흐릿하면서도 여린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번들거렸다.



“어여 오소, 미경 씨. 추운데 오느라 고생했지요. 아이고, 이 손이 꽁꽁 얼었네.”


그는 슬그머니 미경의 손을 잡았다가,

놀라 뒤로 빼는 그녀의 시늉에 아쉬운 듯 손을 놓았다.

미경은 망설이다가 의자 끝에 살짝 걸터앉았다.

손은 무릎 위에서 파르르 떨렸고, 시선은 바닥만 향했다.


협박의 언어


20대 초반의남자 종업원이 뒤에서 방 안의 분위기를 염탐하듯

휘둘러보고 재빨리 나가면서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말없이 미경이 자리에 앉자 염소대가리는 천천히 장부를 꺼내 펼쳤다.


“미경 씨, 아시지요. 내도 기다릴 만큼 기다리고,

사정 봐줄 만큼 봐줬다는 것 말입니다.

정말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이 시간 준 거 알아주어야 할거마는


. 이미 이자만 쳐도 벌써 원금을 넘어선 지 오래다?

그쪽도 내처럼 홑몸으로 딸 하나 키우는 줄 뻔히 아는데,

오죽하면 지금 사는 집에 전세금 압류를 걸었겠소.

또 압류 걸었다고 바로 방 빼라는 것도 아닌데…”


“소장님, 그렇지만 너무하셨어요.

제겐 말 한마디도 없이… 집주인이


법적인 송사에 휘말리기 싫다면서

저보고 나가든지 합의 보든지 하라고….”


“어허, 뭐 그런 무식한 주인이 있노?

이 한겨울에 애 데리고 어디로 가라고. 거- 미친 사람들 아니가?”


“그래도 압류 못 풀면 나가라는데… 어찌 좀 풀어주시면 안 될까요?”

숫제 애원이 간절한 눈빛이었다.


“미경 씨, 오해 마소. 나는 혹시 미경 씨가 내 모르게 다른 데도 빚이 있어,

그나마 있는 전세금을 뺏길까 봐

미경 씨와 딸 미선 이를 위해 미리 단도리해 놓은 기다.”


“그럼 방을 안 빼도…”


“암, 내가 주인에게 전화 한 통화하면 되는 기다.

어이, 거긴 입구라 찬바람이 많이 들어오니께

요기가 더 따스하니 이리 내 옆으로 좀 오보소.”


염소대가리가 당연하다는 듯 눈을 찡끗하며 손을 내밀었다.

미경은 잠깐 망설이다가, 못 이기는 척 그의 손을 잡으며 일어섰다.


“요새 IMF 때문에 시장 사람들 많이 힘들다던데,

미경 씨도 얼마나 고생이 많겠노.”


그는 일수 장부를 들었다가 툭 하고 던지며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장사는 갈수록 어렵고, 이자는 매일 불어나고.

장사 아무리 해도 못 갚는다, 알제? 그라모 다른 길을 찾아봐야지.”



"다른 길이라면. ㆍᆢ

"미경이 기대 반 걱정 반의 눈으로 염소대가리를 쳐다본다.


“길이야 찾으면 많제, 미경이 마음먹기 달렸지 암만, ”


염소대가리의 눈은 미경의 시선은 무시하고

그녀가 아직 벗지 않은 검은색 코트 안의

깊게 파인 희고 풍만한 젖무덤을

노골적으로 쳐다본다.


미경은 그의 음흉한 눈길을 의식하며

수치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한편 어쩌면 전세문제는 잘 해결 될 지도

모르겠다는 가냘픈 희망을 가져본다.


그녀는 코트를 천천히 벗었다.

염소대가리가 몸을 당겨 단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그녀에게 바짝 붙어 앉았다.


낡은 소파 가죽은 염소대가리가 몸을일으켰다가

다시 기댈 때마다 메마른 신음을 냈다.


미경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모았다가 다시 풀기를 반복했다.

그녀의 손끝은 핏기가 없었지만, 심장은 평소보다 빠르게 콩닥콩닥 뛰고있었다.


염소대가리의 손길이 처음 닿은 건 무릎이었다.

겉으로는 무심한 듯, 그러나 확실히 의도된 접촉이었다.


미경은 몸을 움찔하며 치맛자락을 잡았다.

하지만 그 힘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남자의 손길이 조금씩 안쪽으로,

아주 천천히 이동할 때마다

그녀의 어깨는 더욱 뻣뻣하게 굳어갔다.


미경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흔들렸다.

지금 뿌리치면, 전세금은?


당장 쫒겨나면 아이는 어디서 자야 하지?

이 손을 뿌리치면, 내일 당장 거리로 나앉을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또 다른 목소리가 속삭였다.


나도 여전히 여자다. 누군가의 손길을,

누군가의 말 한마디를,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왔던가.


자존심은 뿌리치라 외쳤지만,

오랜 고독은 잠시라도 기대고 싶다고 속삭였다.


허벅지 위로 내려앉은 손길이 무거울수록,

이 모순은 더 혼란스럽게 그녀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괜찮다. 모두 다. 내가 알아서 해줄게.

미경 씨, 내가 니 사랑한다.”


그의 말은 복리에 복리를 두른 그의 빚 장부보다도 더 교묘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미약한 여자에게

얼마나 신묘한 효과를 불러 일으키는 지.


혹은 번연한 거짓말인 줄 알지라도 혼자된 여자에겐

얼마나 달콤하고 위로가 되는 말인가,


그리고 이 남자는 마음만 먹으면

자신에게 지금보다 더 나은 환경을

줄 수 있을 정도의 힘 있는 남자였다.


무너지는 성채


남자의 손길이 무릎을 거쳐

허벅지 위쪽으로 서서히 올라오자

그녀의 여성도 조금씩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이 지날 때마다 오래도록

재 속에 묻어둔 불길 같은 것들이

여기저기 순간적으로 톡 톡 타오르다가 꺼져가길 반복했다.


이제 사내의 크고 넓적한 손은 각도를 꺾어

노골적으로 허벅지의 안쪽까지 밀고 들어왔다.


집요한 그의 손을 형식적으로나마

말리는 척하던 그녀의 손은 언제부턴가

남자의 손등을 더듬고 있었다.

남자를 만나러 오기 직전 이미 갈아입었던 그녀의 속옷이

그녀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젖어가고 있었다.


남자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 안쪽에서

또다시 더 깊은 은밀한 계곡 안을 향해 서서히 각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는 어쩌면 오늘 이 남자를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는 순간, 그녀는 갖고 있던 수치심도

여자로서의 체면도 머릿속에서 갑자기 다 사라져 버렸다.


다만 실로 오랜만에 남자의 그것이 자기에게 들어올 것을 상상하니

얼굴이 화끈거리며 온몸을 뜨거운 열이 훅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다고 이 사내가 딱히 좋은 것은 아니었다.

비릿한 내음을 풍기는 염소수염을 한 이 사내를 좋아할 여자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조금 전 그녀를 지나갔던 그 불길이 곧장 다시 돌아왔다.

녀는 알고 있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지금은 꺼뜨릴 수 없는 여체의 불이었다.


그녀의 몸의 변화를 감지한 듯, 급기야 남자의 거칠고 뭉툭한 손길은

거침없이 그녀의 몸에 마지막 남은 작은 천조각을 비집고


금단의 영역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쓰라리고 아팠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그녀는 속절없이 사내의 손길을 따라

하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이 다가올수록, 거부와 갈망이 동시에 끓어올랐다.

어깨는 뻣뻣하게 굳다가도, 어느새 미세한 떨림으로 무너졌다.


닫혀 있던 문이 열리듯, 잊혔던 감각이 번개처럼 깨어났다.

불길처럼 번져가는 열기와, 머리끝에서 얼음처럼 내려앉는 수치심이 교차했다.



그 모순은 행위 내내 그녀를 휘감으며, 몸은 응답했으되 마음은 끝내 저항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허망하게 짧았다. 몸이 무너지면 마음도 쉬 무너지는것이었다.


깜박이는 불빛처럼 순간의 열기는 금세 사그라들었다.

미경은 숨을 고르며 소파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담배 연기, 땀, 끈끈한 공기가 뒤섞여 한없이 공허했다.



“내일 또 오이소. 전세금 얘기도 그때 마저 마무리합시다.”

염소대가리는 장부를 덮으며 짧게 웃었다.

이미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듯,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미경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수치와 아쉬움이 뒤섞인 채, 이상하게도 내일의 그림자가 가슴에 드리워졌다.

하지만 다른한편, 수치심은 조금씩 옅어지며, 내일에 대한 어쩔 수 없는여체의 설렘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집에 도착한 미경은 문을 닫자마자 곧장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현관 바닥에서 욕실 문턱까지, 발걸음 하나하나가 무겁게 울렸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쓸어내렸다.


“씻어내야 해… 다 지워야 해.”

입술이 떨리며 속삭였다. 그러나 물줄기는 아무것도 지우지 못하는 듯했다.

오히려 뜨거운 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다방 밀실의 숨가빴던 공기와 깜박이던 형광등 불빛이 되살아났다.


그녀는 샤워기를 움켜쥐지 않은 다른 한 손을 가슴 위로 올려놓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자의 거친 숨결이 닿았던 곳이었다.

그 기억은 씻어낼수록 선명해졌다.


눈을 감자, 귓가에는 다시 그 목소리가 맴돌았다.

“내 오래전부터 당신을 많이 생각했데이. 사랑한다, 미경 씨.”


싸구려 위로였음을 알면서도, 혼자된 여자의 귀에는 유난히 달콤하게 울렸다.

그 말이 욕실의 수증기 속에서 메아리처럼 번졌다.


뜨거운 물줄기는 어느 순간 낯선 감각으로 변했다.

쇳소리 같은 물방울이 피부 위를 두드릴 때마다,

다방 소파 위에서 억눌렸던 떨림이 다시 살아났다.


불길이 꺼진 줄 알았으나,

물방울은 오히려 그 잔불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그녀는 염소대가리의 거친 숨소리를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한 손으로 가슴을 애무하며

샤워기를 쥔 다른 한 손에는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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