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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온기 Jun 06. 2021

내가 원하는 공간

미니멀라이프, 억지로 만들지 않기


3년 전, 겨울을 지난 꽃들이 지고 푸릇한 나뭇잎이 생기가 돌 때쯤 딱 이맘때

날이 따스해지면서 난 페인트칠 먼저 시작했다. 오래된 집에 살려면 페인트 칠 쯤은 마스터해야 되고, 노련하게 시트지쯤은 공기 없이 붙일 줄 알아야 했다. 오래된 집을 오래 살았던 것처럼 살고 싶지는 않아서다 주어진 조건은 전혀 모르던 분야까지 뛰어들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난 결코 새하얀 집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하얀 집을 만들어가기 시작한 건 3년 전

매서운 바람맞으며  이사한 집은, 이제 겨우 7년쯤 된 나름의 신축이었는데

집이 온통 어두운 우드 몰딩으로 되어있어 우중충하게 나이 든 집 같았다 숙성되어 은은한 멋을 풍기는 한옥이 아닌 그냥 나이만 들어 보이는 집일 뿐이었다. 아무리 밝게 꾸미려 해도 도저히 그 잔상은 없어지지를 않는다





집은 밝아야 한다. 햇살이 길게 늘어지듯 집안에 들어와야 하고,
바람도 들어와 머물다 나가야 한다


한껏 봄 햇살로 아침이면 긴 실타래 풀어지듯 빛이 들어와야 하는 집은 겨우 앞쪽 베란다 까지만 발을 살짝 걸치기만 했을 뿐 그 이상은 물이 무서운 아이처럼 더 이상 넘어오지를 않는다

그 덕에 앞 베란다에서 식물들만 일광욕을 즐기느라 부산스러워진다. 집은 식물이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인데 햇살을 받으러 나도 토분에 심어져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주방과 뒤쪽 베란다는 늘 끝나가는 가을이다 10월 스물 여드레 날  저녁쯤 되는 약간 스산한 날씨다. 여름에도 해가 전혀 들지 않는 뒤쪽 베란다로 가서 가만히 있으면 아주 작은 살랑이는 바람으로 잠시 땀을 식힐 수 있을 정도였다 간혹 우울할 땐 그 우울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뒤쪽 베란다에 의자를 가져가 앉아서 충분히 우울함을 끌어올릴 때도 있다.


등기부등본에 내 이름 석자로 집주인 행세할 수 있는 집은 아니지만, 난 내가 발 딛고 내가 가족들이 집이라고 돌아갈 수 있고, 여행 갔다 돌아오며 '내 집에 최고다'라고 생각하면 그건 내 집이다. 내 집 장만의 '내 집'과 내가 사는 집의 '내 집' 과는  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내가 편하면 된다.

이 집을 내 집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건  아이들이 외투를 벗어던질 때쯤이었다. 외출 후 돌아오는 집은 편하지 않았다. 현관 입구부터 어두워 센서등이 켜지지 않으면 신발 찾기도 힘들었고. 현관 바로 앞에 있는 화장실도 부담스러운 공간이었다. 내가 이 집에 들어서는데 처음 보이는 게 화장실이라니? 화장실에 조금이라도 서운케 신경을 덜으면 이내 곧 화장실에서 물때 냄새가 나서 현관에 들어서는 나와 가족들에게 시위하듯 냄새를 스멀스멀 흘러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늘 환풍기를 틀고 문을 닫아 두지만 이미 난 그곳이 화장실임을 알기에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한창 페인트칠하며 집에 정을 붙이려고 할 때도 있었다. 이 집이 지어지고 첫 입주자로 살았던 사람들이 어린이집 재롱잔칫날 한껏 꾸며둔 것처럼 붙여둔 온 집안의 스티커란 스티커를 뗄 때만 해도 이 집을 꼭 내가 사는 집으로 바꿔 보리라 다짐했었는데  그럼 정도 생기고 적응도 잘하겠거니 했었는데 어두운 건 쉽게 바뀌지가 않는다. 그리고 난 아프기 시작했다.




집안의 있는 것들은 모두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 그게 규칙이다 이곳은 군인들의 가족이 사는 관사이기 때문이다 짧게는 1년 길게는 5년 이상 살다 다른 곳으로 이사 가는 일이 빈번한 곳이고 다음 사이 누가 살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다음 사람을 위한 배려이고, 그래야 하는 게 맞다. 내 집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공동주택이란 곳은 그런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벽에 못을 박고, 벽지를 바꾸고 장판을 바꾸어 두면 다음 사람은 나와 같은 취향이 아니라면 참 곤란하지 않은가 그래서 가장 평범하고 보통의 인테리어를 해두는 것이다. 나 역시 어두운 몰딩과 강화마루 색을 내가 원하는 밝은 계열로 바꾼다면 다음 사람은  청소하기도 힘든데 왜 이렇게 집이 온통 하얀색이냐며 투덜거릴 수도 있다.


내가 살고 있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는 게 억울할 수도 있지만 깨달아야 한다. 마음대로 하고 싶다면 내가 지은 집에 내가 원하는 구조와 인테리어를 할 수밖에 없다. 그걸 이 집에서 깨달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해탈의 경지에 오를 때쯤 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다.


집을 구조를 그리고 공간에 대한 욕심을 버릴 때 미니멀을 할 수가 있다. 내 집 짓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면 욕심을 버려야 하고 그 끝엔 미니멀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건을 가구를 구조를 욕심내면 투덜거림은 끝이 없다. 그렇게  퉁퉁 부은 감정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공간을 만드는 게 훨씬 빠를 것 같다.

집이 어두워지는 건 햇살이 안 들어오는 집의 구조도 문제였지만.  햇살이 들어오는 길을 온통 가구들이 가로막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책장. 식탁, 베란다에 겹겹이 쌓아둔 물건들 온통 밝은 곳으로 가고 싶다는 열망에 베란다 쪽에 놔두었던 짧은 생각이 어둠을 더 크게 만들었다고 생각이 든다. 그냥 밝음이 그대로 들어올 수 있게 놔두어야 하는 건데 말이다 결국 집이 문제가 아니라 공간의 미니멀이 잘못 입력되어 있어서이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내가 원하는 공간의 미니멀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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