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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이례 May 16. 2022

젠더 프레임 속 자기소개 by 구씨

나의 페미니즘 해방일지

남성주의 사회에서 살아온 남성으로 우월적 지위를 누리며 살아온 구씨가 결혼을 하고 딸아이를 키우면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된 사연과 페미니즘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변화해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본다.

여성과 남성이 누구도 서로를 가해와 피해의 프레임으로 보지 않을 수 있는 사회를 꿈꾸며 그것으로 인해 남녀 모두가 자유로운 해방을 맞이할 수 있는 날까지의 기록이다.


 예전에 우리 할머니 시대에는 여성, 남성을 바라보는 다른 프레임과 불평등이 존재했었지.. 그래서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여성이 밤늦게 혼자 돌아다니기 무서운 시대도 있었다고 해.. 끔찍한 데이트 폭력이란 걸로 많은 여성이 폭력에 노출되기도 했지.. 지금은 없어진 페미니즘이란 것으로 남녀가 갈라치며 싸우기도 했단다.. 지금은 다 지난 일이지만 말이야...  

첫 번째 기록으로 젠더 프레임을 통해 구씨를 소개해본다. 한국에 거주하는 아주 보통의 사십 대 남자로서 길에서 몇 번을 마주친다 해도 기억하기 어려운 모든 것이 평균인 아저씨. 누군가의 앞에서는 것도 눈에 띄는 것도 꺼려하는 익스트림 IIII(MBTI)의 소유자. 10살 딸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그전에는 전혀 몰랐던 '여성으로서 한국사회에서 살아가기'에 대한 것들을 하나씩 배워가고 있다.


1. 남성성만을 느끼면서 살아왔던 어린 시절


어린 시절 소 목장을 운영하시는 부모님 덕분에 외딴집에서 살았다. 마을과는 좀 동떨어진 시골에 살았는데 그러다 보니 동네 친구가 별로 없었다. 어린 시절은 항상 두 살 터울의 남동생과만 놀았다. 당연히 놀이도 남성끼리 하는 고격한 것들이 많았다. 몸으로 하는 놀이가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칼싸움은 몸싸움으로 번지기 일쑤였기에 마지막은 항상 엄마의 등짝 스매씽으로 끝나던 기억이 있다. 어린 시절은 그래서 여성은 이렇다 하는 인식 자체가 없이 자라왔다. 여성을 접할 기회가 없었고 오직 남성성만을 접하고 배우고 살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여자는 여자끼리 여자 놀이를 하고 남자는 남자끼리 남자 놀이를 하는 문화에서 자랐기 때문에 여자 사람 친구도 없었고 여자들의 문화에 대하여 잘 몰랐다. 남자들 사에에서 땀 흘리면서 몸으로 놀고 때론 몸으로 싸우기도 하고 여성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인식하지 못한 채로 자라왔다.


어머니는 가정주부로서만 생활하셨는데 우리 집은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가정이었다. 나쁘게 표현하면 아버지는 독재자였고 어머니는 그 독재와 탄압을 온몸으로 버티신 분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오고 어머니는 집안일을 하기에 아버지의 퇴근 후 피곤과 짜증을 어느 정도는 어머니가 받아주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집에서도 남성이 아버지의 목소리가 우선시되는 게 당연하 문화에서 자랐다. 여성인 어머니가 큰 목소리를 낸다는 건 반란이라고 생각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남녀공학이지만 합반이 아닌 별도 반인 학교로만 다녔다. 당시 내 인식 속의 여성은 한쪽은 판타지로 다른 한쪽은 미디어를 통해 인식되는 '소비되는 여성'으로만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좋아하던 1년 연상의 누나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영화'국화꽃 향기'와 같은 아가페 사랑을 고수했다. 또 한창 욕구가 끓어오르는 때는 다른 여학생을 대상으로 에로스적인 상상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여성에 대한 이중적인 인식과 그 인식 사이의 부조화, 쉽게 말해 여성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학창 시절을 보냈다.



에드가르 드가 <루브르에서 커셋>     여성이 예술가가 된다는 것이 가당치도 않던 시대에 편견에 맞선 여성화가 커셋



2. 나는 가해자였다.

대학생이 되고 본격적으로 여성을 만나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도 여성을 만나보기는 했지만 진지한 관계는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나쁜 남자였다. 사귀었던 여성들에게 겉으로 몇 번은 자상하고 친절하게 대해줬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도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가기도 했다. 내 중심으로 생각했고 행동했다.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는 말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내 좋은 쪽으로 해석하고 활용했다. 사랑을 뜨겁게 타오르는 정열이라고만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할 예의를 잘 몰랐고 사랑이라는 관계도 꾸준히 노력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쉽게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달콤한 말로, 매너로 여성을 유혹했지만 주도권이 내 것이 되는 순간, 그 사랑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 무지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가해자였다. 헤어지는 여성들에게서 저주의 말도 들어보았다. 지금의 와이프와 첫 번째 헤어질 때에도 도망치듯 설명 없이 헤어졌다. (지금의 와이프는 내가 29살일 때 처음 만나서 잠깐 만나다 헤어지고 2년 후 다시 만나 바로 결혼했다.) 내 상황과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게 어려웠고 그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인식도 잘하지 못했던 것 같다. 가장 큰 문제는 여성에 대한 몰이해와 이해하려는 소통의 부족이었다고 생각한다.

남자 새끼가 무슨 구구절절 내 감정을 설명하나?
여자나 남자나 다 똑같은 사람 아니야? 내가 느끼는걸 여자도 느끼는 거야..
쉬잔 발라동 <푸른방>  그림속의 피사체로서의 여성에서  자기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화폭에 그린  쉬잔 발라동

 결혼을 하고 딸아이를 낳고 11년을 넘게 여성과 살아보니 여성의 심리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두 여성의 개인에 한정되기는 하지만 전체를 알기 위해 부분에 대한 이해를 시작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싸우면서 상처 입히고, 상처 입으면서 알게 되는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바로 실전에서 배우는 살아있는 공부를 하고 있다. 여성이 사회에서 마주치는 여러 불안요소와 차별요소에 대하여 알아가고 있다. 또 그런 불평등과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남성은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한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순전히 내 가족의 안위를 위해 시작된 공부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아빠들에게도 전해져서 지금보다는 좀 더 평등한 사회가 되길 바란다. 그럼으로써 여성은, 남성은 이래야 한다는 사회적 시선과 책무에서 조금은 자유로와 지고 싶다.  


딸아이를 키우면서 딸아이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고 독립적으로 커가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부모로서 아직은 마냥 이뻐해 주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해주고 있는 상황이라 어떻게 이 아이를 바르게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아이가 항상 안전하고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하길 바라지만 세상이 마냥 그렇지 않다는 현실도 알기 때문에 아이가 그럼에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어떻게 만들어 줄 수 있을지? 그렇다면 여성은 어떤 불평등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지? 이런 생각들이 페미니즘에 대한 공부를 시작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딸아이가 아빠를 통해 남자와 동등하고 수평적인 관계를 시작할 수 있기를, 남녀를 떠나 한 사람의 온전한 독립체가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3. 여성가족 안에서 살아가기


 와이프는 세 딸의 첫째 딸이다. 나와 결혼하고 몇 해 지나서 장인어른이 오랜 지병인 당뇨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 그래서 와이프는 두 여동생을 어지간히도 아끼고 챙긴다. 딸아이도 미혼인 이모들과 친구처럼 잘 지낸다. 장인어른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처가 가족이 모이면 여자 5명에 남자는 나 혼자 뿐이다. 장인어른이 돌아가시고 장모님은 시 언니(와이프의 고모)와 친구처럼 지내시는데 시 언니분의 딸도 막내 처제와 같은 나이라 처제들과 자매처럼 지내고 자주 모인다. 그래서 그렇게 모이면 여자 7명에 남자는 나 하나뿐인 여초 가족이 된다. 여성들이 많이 모여있다 보니 어느 때보다도 여성들의 이야기, 특히 20~30대 여성의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그러다 보면 젊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인 폭력과 권위적인 시선들이 얼마나 불편한지 전해 듣게 된다. 뉴스나 SNS를 통해 약자를 향한, 여성을 향한, 어린이를 향한, 동물을 향한 범죄를 볼 때마다 또 그것이 성적인 범죄일 때 인간의 잔인함에 대하여 절절히 느끼곤 한다. 내가 만약 결혼을 안 했다면 그리고 딸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할 분노를 느끼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나 또한 잠재적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약자를 향한 폭력은 나 또한 학창 시절 가해자로서, 피해자로서 경험해봤던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쉽게 아무렇지도 않게 만연하는지 약자의 편에서 생각해보니 보이는 것들이 있다.


아무렇지 않게 말 못 하는 강아지를 위협하는 행동을 하면서 낄낄거리는 아이들

길에서 빨리 가지 못하는 장애인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면서 앞질러가는 사람들

어둑한 골목길에서 여성과 마주칠 때 여성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남자들

이런 상황들을 볼 때 강자가 가진 어두운 힘을 느낀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누리는 많은 것들이 실상 여성들에게 굉장히 위협적인 상황이거나 두려운 상황임을 여초 가족 안에서 여성들이 서로를 지켜주고자 교육하고 경각심을 일깨우는 말들을 들으면서 알게 되었다.

늦은 밤 술에 취해 택시를 타는 일.

늦은 밤 어두운 골목길을 통해서 편의점에 가는 일.

맘껏 본인을 뽐내는 옷을 입고 편하게 거리를 활보하는 일.

자유와 권리에 대한 주장보다는 험한 일에 노출되지 않으려는 자기 방어가 더 실제적인 교육이라는 여성들의 연대에 씁쓸함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자기 도시를 능숙하게
자기 영토로 삼을 수 있는 시민들,
자기 도시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어 다니는데 익숙한 시민들이라야
반란을 도모할 수 있다.
_리베카솔닛 [걷기의 인문학]



나의 딸아이가 어느 시간 이던지 자유롭고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할 수 있게, 뒤로 물러서지 않게,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에 따라 사람에 대한 편견이 생기지 않게, 그 누구도 피해자로, 또 잠재적 가해자로 만들지 않는 사회가 되길 기원해 본다. 특히, 남자로부터 안전해지기 위해 자신의 아름다움과 빛남을 포기하지 않기를 그래서 자신이 가진 충분한 아름다움을 당당히 뽐내면서 살아가기를 바라본다.          


그렇다 내가 추앙해 마지않는 존재는 딸아이를 포함한 우리 가족이고 그들은 하나같이 모두 여성이다. 나의 추앙 안에서 그들이 안위롭게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옆의 여성들을 포함한 모든 여성이 더 주체적으로 활동하고 편안함을 느끼며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두려움을 피하고 불쾌한 상황을 안 만들기 위해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더 크게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들의 의지대로 살아가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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