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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이례 Aug 11. 2022

쏘다닐 권리는 없는 건가요??

최근 3년 넘게 살던 서울의 신축 아파트에서 30년이 훨씬 넘은 낡은 경기도의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다. 남서울의 끝자락에서 경기도의 동남부 1기 신도시로 이사를 감행하게 되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아이의 교육과 주변 환경 문제가 가장 컸다. 전에 살던 곳은 서울이긴 하지만 동네가 좀 낙후되었던 곳이었다. 특히나 중학교가 집에서 도보로 30분 거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 도보로 이동하는 거리가 소위 말하는 지저분한 시장통, 대로변, 유흥시설이 몰려있는 곳들이었다. 여자 아이다 보니 더욱 그런 부분이 민감하던 차에 몇 가지 사건이 발생하면서 아예 이사를 감행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바로 성범죄자가 아이 통학거리 사이에 이사를 온 것이다.

한국에서는 일정 기준 이상의 성범죄전력이 있는 사람이 내 거주지 반경 몇 km 이내로 이사 오는 경우 메일과 우편물이 날아온다. 범죄 이력자의 사진을 포함한 신상명세가 날아오는데 범죄의 내용이나 인상착의를 보면 섬뜩한 기분을 피할 수 없다. 특히나 내 거주지 인근이면서 아이와 같이 다니던 지역 인근에 이런 범죄자가 이사 오는 것은 굉장히 신경 쓰이는 일이다.


두 번째는 작년에 발생한 마트 소변 사건이 바로 우리 집에서 도보 10분 거리의 마트에서 발생한 것이다.

마트 주차장의 쓰레기통에 소변을 보고 있는 남성을 제지하던 남성이 소변남이 지니고 있던 흉기에 찔려 큰 부상을 입은 일이다. 소변남이 평소 흉기를 지니고 있었고 말 한마디에 무자비하게 초면의 남성을 수차례 칼로 찔렀다는 것에 사회적 공분이 일어났었다. 그런 무자비하고 끔찍한 일이 내가 아이와 한 번씩 가는 대형마트에서 일어났다는 것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는 그 마트는 다시는 가지 않게 되었는데 그런 일을 통해 동네에 가지고 있던 정이 모두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집 주변에 이런 위험 요소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어린 여자아이를 키우기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우리 부부는 내렸다.  이번의 이사를 통해 우리 부부는 어린 여자아이를 키우기 좋은 곳으로 몇 가지 기준을 세웠는데 그 기준을 세우면서 느낀 것은 생각보다 어린 여자가 길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위험이 아주아주 많다는 것이었다. 남자인 나는 어린 시절 전혀 생각하지 못하던 위험요소가 내 딸아이에겐 훨씬 더 많이 크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내가 당연하게 누렸던 것들이 남성적 특권과 여유였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들이었다.

유럽여행 중 길가의 남성들에게 둘러쌓인 미국인 여성(흔한 길거리 성희롱의 장면)  


주거지의 기준

첫째 집과 학교 사이가 아이가 혼자 다닐 수 있는 곳이어야 할 것. 두 번째로 집 주변이 유흥가나 유해시설이 없는 주거타운일 것. 셋째는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근거리에 있을 것이다.

세 가지 기준 모두 아이가 집 주변을 포함한 길거리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들이다. 그리고 이런 위험이 딸아이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또 얼마나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아내와 처제들을 통해 많은 증거를 들어왔다. 성인인 여자들도 길을 걷다 보면 술 취한 취객이나 이상한 남자들의 접근을 받는 다고 한다. 하물며 어린 여자아이에겐 그런 위험이 훨씬 더 쉽게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위험에 훨씬 예민한 아내의 대응책이 슬프게도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것이다.


눈에 띄지 말고 다닐 것.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운을 느끼면 바로 도망갈 것.(확인하거나 빌미를 주는 언행을 하지 말고)

가능하면 혼자 다니지 말 것.

꽁꽁 싸멜것.


이상한 사람이 길에서 말을 걸면 강하게 대응하는 것보다는 무시하고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것. 자기의 몸을 지키기 위해 호신술을 배우거나 몸을 단련하는 것보다 아예 위험한 시간에 위험한 곳에 나다니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들이다. 딸아이를 낳으면서 딸아이가 강하게 자라길 바랬다. '여성스러움' 보다는 '자기다움'을 드러내길 바랬고 신체적으로도 강하길 바랬다. 여행 중에 만나본 자립적이고 강해 보이는 서양 여성들처럼 자기 몸을 강하게 단련하고 남성에게 의지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사람이 되길 바랬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더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라는 것을 조금씩 느끼고 있다. 작은 위험에서 자기를 지킬 줄 아는 것보다도 아예 위험에 취약함을 인정하고 그런 상황에 있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이 여자 셋을 키워낸 장모님의 주장이시고 그런 태도가 아내와 처제들에겐 고스란히 남아있다.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 집회 (출처: 연합뉴스)

 중고등학교를 남자로만 이뤄진 반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었다. 중학교에 올라오면서 초등학교와는 다르게 남녀가 같은 공간에 있지 않고 남자로만 이뤄진 공간에 있다는 것을 느끼고 나는 불편함을 느꼈다. 사람이 힘에 의해 서열화되는 것, 다양한 것들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 같은 폭력적인 분위기, 한쪽으로 쏠리는 단순함 등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거리를 걷다 보면 이런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바로 여성이 사라진 거리가 그렇다. 무미건조하고 살벌한 기운이 감도는 그런 거리. 아직도 나는 딸아이가 자유롭게 어디든 나다닐 수 있는 거리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회가 되길 바라고 있다. 나와 함께 있는 여성들을 자주 길에 다닐 수 있게 하려 한다. 장모님을 포함한 와이프와 처제들은 길을 걷다 보면 어둑하고 후미진 길을 맞닥뜨릴 때, 길가에 서성거리는 어두운 남성들을 보면서 긴장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길가의 상점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보면 그 존재로 인해 불의의 순간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어 그나마 안심이 된다고 한다. 길을 걷는 여성들은 주변의 여성들의 위험요소를 줄여준다. 연대하고 길을 걷는 여성들은 건강하고 밝은 기운을 준다. 그래서 나는 여성을 밖으로 불러 모으는 거리를 만들고 싶다. 아직 어린 여자아이 혼자 걸을 수 없을 땐 아이를 데리고 같이 걷고자 한다. 아이와 함께 되도록이면 자주 여기저기 쏘다니고자 한다. 아이에게 세상의 다양한 길을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그런 길 위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싶다. 딸아이가 꽁꽁 싸 메진 자기의 영역을 깨고 나오길 바라본다. 자기를 달뜨게 하는 곳으로 계속 가고 움직이고 생각하고 원하고 참여하게 할 수 있는 삶 그 자체로 들어가길 바란다.

리더 위더스푼이 제작과 주연을 맡은 영화 [Wild]의 한 장면

미국의 작가인 셰릴 스트레이드가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도보 여행한 경험을 쓴 전기인 와일드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고통과 고난으로 점철된 한 여성이 길 위에서 맞닥뜨리는 위험과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삶을 살아갈 힘을 얻는 내용의 영화이다.

'짐을 지고 혼자 걷는 여자에 관한 모든 것'

(평론가 김혜리)





"걷지 않는 문화는 여자들에게 나쁘다. 걷지 않는 문화가 권위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이게 다 결국 무슨 의미인지,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그 욕구가 충족되는지 등을 고민하지 않는 여자는 가족에게서 벗어나 방황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걷게 하라. 내 속도로 걷게 하라. 삶이 나를 따라, 내 주위에서 흐르는 것을 느끼게 하라. 극적인 일을 보여달라. 예상하지 못한 둥근 길모퉁이를 달라. 으스스한 교회와 아름다운 상점과 드러누울 수 있는 공원을 달라."  [도시를 걷는 여자들, 로린 엘킨]



표지 사진 출처: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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