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반경이 좁은 편이다. 하지만 내 배에서 나온 아이는 딴판이다. 머리 위로 밥그릇을 올리며 식사 종료를 알린 그는 방을 순회한다. 안방 침대에 올라가 창문을 열고, 곧장 서재로 가서 아빠 못지않은 현란한 기술로 마우스를 가로챈다. 이윽고 옷방에 있는 옷을 한 움큼 패대기치며 '꺅' 소리를 지르고, 전리품인 신발 한 켤레를 들고 복귀한다. 나가자는 신호다. 이를 무시하면 스매싱은 기본이요. 머리카락 뽑기, 안경 낚아채기 등 살벌한 고문이 시작된다.
한시도 가만있지 않는 아이를 붙잡고 서둘러 옷을 입힌다. 겨우 나갈 채비를 마쳤는데 그새 마음이 바뀐 건지 바닥에 드러누웠다. 비상사태다. 재빨리 과자 하나를 집어 줄 듯 말 듯 혼신의 연기를 펼치며 유모차가 있는 현관으로 갔다. 마스크를 깜빡해서 방에 다녀온 사이, 아이가 양말을 벗어던졌다. 처참히 널브러진 양말이 꼭 나와 닮았다. 이 상황을 몇 번 겪고 전략을 바꿨다. 유모차에 아이를 먼저 태우고 양말을 신기기로. 다행히 이 작전은 성공이다.
놀이터를 지나 내리막을 내려오면 두 갈래 길을 놓고 고민에 빠진다. 왼쪽은 유모차로 가기 편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 오른쪽은지름길이라 빠른 대신 좁고 턱이 높아 힘들다. 매번 가는 길 앞에서 같은 고민을 하는 나를 발견하고 기준을 정했다. 아이 기분이 좋으면 왼쪽, 칭얼대면 오른쪽을 택하기로.
나는 좋게 말하면 신중하고, 나쁘게 말하면 우유부단한 편이다.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진정 이 남자가 맞는지 기도했다. 눈치 빠른 그는 대학원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부리나케 내려왔고 지금의 남편이 되었다. 우유부단한 신중함은 출산 때 극에 달했다. 오직 자연분만을 외치며 꼬박 하루를 버텼다. 다음날 '자궁문이 안 열렸어요. 어제 그대로예요.'라는 말을 들은 남편은 수술 동의서에 사인했고 그렇게 우리 아이는 세상에 나왔다.
아이가 태어나고 육아 전우인 남편은 나에게 결정이 빨라졌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배앓이로 밤낮 우는 아이를 두고 어떤 분유와 젖병이 어디에, 어떻게 좋은지 며칠 동안 알아볼 여유는 없다. 물론 아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비슷한 상황을 겪은 친구에게 묻거나 인터넷 후기를 읽고 지체 없이 배송을 눌렀다. 다행히 젖병 2번, 분유 3번을 바꾸고서야 배앓이는 멈췄다.
아이와 함께 자라며 나를 돌아봤다. 인생에서 가장 머뭇거린 때가 떠올랐다. 3년의 직장생활에서 2년 동안 퇴사를 고민했던, 멈춰버린 시간이었다. 아이들을 만나는 일은 행복했지만 비교과인 내가 설 자리는 없었다. 어쩌면 자격지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나를 묵묵히 지켜본 국어 선생님은 이따금 글과 시를 보내주셨다. 글을 보며 웃었고 때론 눈물을 훔쳤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짧은 글과 함께 시 한 편이 도착했다. 김종해 시인의 <그대 앞에 봄이 있다>. 한 자 한 자 읽어가는데 꾹꾹 눌러둔 설움이 복받쳤는지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눈물이 한 시간 넘게 흘렀지만, 멈추려 할수록 내 안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물밀듯 터져 나왔다. 하루를 꼬박 앓고 이튿날 아침, 2년을 망설였던 퇴사를 결심했다.
시의 마지막처럼 꽃필 차례를 기다리며 편입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놓고 간 짐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가보니 선물이 있었다. 책과 편지였다. 편지는 이문재 시인의 <도보순례>로 시작했다. 시 끝 무렵 이어진 글에서 당신의 삶을 털어놓은 선생님은 '행복하십시오'로 글을 맺으셨다. 편지를 읽고도 눈물이 나지 않은 까닭은 사회 초년생의 추운 겨울이 다 지나서였을까.
늦깎이 대학생이 된 나를 보며 어떤 이는 혀를 찼고, 어떤 이는 응원을 보냈다. 전자는 인생을 돌아간다 생각했을 것이고, 후자는 용기 있는 도전이라 생각할 것이다. 두 길을 놓고 고민하느라 2년을 보냈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무엇이 옳은 선택이었는지 돌아보지도, 평하지도 않았다.
주위 시선에 떠밀려 살았던 나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내가 보였다. 얼마나 아등바등거렸는지,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나를 다시 찾은 나는 낭만이 있는 캠퍼스에서 혼밥을 하고, 족보를 찾아 헤매며, 어르신 대우를 받았지만 나를 잊지 않았고 나를 잃지 않았다.
우리는 머뭇거린다. 주변을 보느라 머뭇거리고, 확신이 없어 머뭇거리고, 불안해 머뭇거린다. 모진 파도와 바람을 겪으며 힘들게 나를 찾았지만,예측할 수 없는 인생 앞에 또다시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새해에도 머뭇거리는 당신께. 그리고 나에게. 선생님의 선물인 한 편의 시 위에 걸음을 내딛고다가올 봄을 맞이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