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을 위해 꿈을 유예하다
"이거 진짜 포트폴리오라고 내도 되는 거 맞아?"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던 동료가 한숨을 쉬었다. 우리 앞에 놓인 건 2개의 프로젝트. 하나는 200만 다운로드로 현재 운영 중인 앱이었고, 다른 하나는 돈은 벌지 못했지만 디자인만큼은 뛰어난 앱이었다. 화려한 숫자와 세련된 디자인은 있었다. 하지만 뭔가 부족했다.
"완성된 느낌이 안 나. 이대로 가면 그냥 '애들이 만든 앱' 같아 보여."
그래서 우리는 밤을 샜다.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 하나씩 보완했다. 클라이언트가 우리를 선택할 수 밖에 없도록, 90페이지 짜리 제안서를 함께 만들었다. 개발 방향 뿐만 아니라, 린캔버스를 그려 어떤 고객을 타겟으로 해야할지, 200만 다운로드 앱을 만든 그로스해킹 경험을 살려 마케팅은 어떻게 펼쳐야할지까지를 담았다.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우리는 비로소 '제대로 된 포트폴리오와 제안서'를 완성했다.
"일단 이걸로 가자. 오늘 오후 2시가 미팅이잖아."
절박했다. 이 미팅을 놓치면, 다음 달 월급이 없었다.
미팅룸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클라이언트는 4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그는 여러 자영업자들의 가게를 모아 광고를 보여주고 적립금을 쌓아주는, 자신만의 '캐시슬라이드'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캐시슬라이드는 대형 브랜드 위주잖아요. 저는 자영업자들도 들어올 수 있게 만들고 싶어요. 치킨집, 카페, 미용실... 이런 식으로요."
그의 설명은 열정으로 가득했지만, 우리가 듣기엔 IT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그게 나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가 필요한 이유였다. 우리는 밤새 만든 90페이지짜리 제안서를 화면에 띄우고, 우리의 진짜 컨설팅을 시작했다.
"대표님 말씀은 정말 좋은데요, 그럼 자영업자 사장님들이 광고는 어떻게 올리게 되나요?"
우리의 첫 질문은 그의 꿈 한가운데 있는 가장 큰 구멍을 짚는 것이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음... 저희가 가서 찍어주거나, 사장님들이 직접 올리거나..."
"사장님들이 직접 올리려면, 그 과정이 아주 쉬워야 합니다. 복잡하면 아무도 안 쓰거든요."
우리는 제안서를 펼쳐보였다. 거기엔 단순히 '개발' 계획이 아니라, 그의 사업 전체를 위한 '해결책'이 담겨 있었다. 폰에서 바로 광고를 만드는 간단한 플로우, 브랜드 템플릿 시스템, 그리고 앱을 만든 후 사용자를 어떻게 모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마케팅 전략과 비즈니스 모델까지.
"저희는 단순히 앱만 만드는 게 아닙니다. 자영업자 사장님들이 쉽게 광고를 만들고, 그 광고를 통해 진짜 손님을 만날 수 있도록, 개발부터 마케팅까지 전체 전략을 함께 설계합니다."
순간 미팅룸에 침묵이 흘렀다. 클라이언트는 제안서를 한참 들여다봤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다른 개발사들은 제가 말한 대로 견적만 뽑아줬는데... 당신들은 내 사업을 이렇게까지 깊이 고민해줬네요."
"저희는 그냥 시키는 대로 만드는 개발사가 아닙니다. 대표님의 서비스가 성공하는 게 저희 목표거든요."
우리는 진심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우리가 기존에 서비스를 운영하며 배운 모든 것을, 이 사람의 성공을 위해 쏟아붓고 싶었다.
미팅 3일 후, 우리는 생애 첫 외주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금액은 4,500만 원. 우리가 직접 번 큰 돈이었다.
"야, 우리 해냈어."
계약서를 바라봤다. 밤새 제안서를 만든 보람이 있었다. 세상이 우리를 인정해준 것 같았다. 포트폴리오가 부족해도, 큰 회사 출신이 아니어도, 우리만의 방식으로 싸울 수 있다는 걸 증명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계약서를 따낸 기쁨보다, '이제 진짜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이 더 컸다. 4,500만 원. 그 돈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뭔가 잘못되면 어쩌지. 그리고 이건 시작일 뿐이라는 걸 알았다. 다음 달 월급을 위해선, 또 다른 계약을 따내야 했다.
우리는 성공한 게 아니었다. 그저 생존의 문턱을 간신히 넘은 것뿐이었다.
그렇게 외주 일은 점점 늘었다. 이후 점점 큰 규모의 프로젝트들이 들어왔고, 동시에 3개의 프로젝트를 돌릴 때쯤, 나는 난생처음으로 PM(프로젝트 매니저)이라는 역할을 제대로 맡게 되었다.
처음엔 클라이언트에게는 좋은 사람이, 팀원들에겐 좋은 동료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그 사이에 끼어 홀로 고립되었다. 클라이언트의 "내일 오전까지 수정 부탁드립니다"는 카톡과 개발자의 "최소 3일은 걸립니다" 슬랙 메시지 사이에서, 나는 양쪽의 압박을 받아내야 하는 사람이었다.
클라이언트는 '내일 당장'을 외쳤고, 개발팀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누구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결정하는 것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성공하면 팀의 영광이지만, 실패하면 PM인 나의 책임이었다. 나는 이 전쟁터의 외로운 사령관이었다.
클라이언트가 최종 검수를 미루면 피가 말랐다. 외주 대금이 제때 들어오지 않을까 봐 매일 통장을 확인했다. 무사히 한 프로젝트가 끝나면, 다음 달 월급을 위해 또 다른 프로젝트를 따내야 한다는 영원한 굴레에 갇혔다.
회사가 안정될수록, 내 영혼은 병들어갔다. 문득 깨달았다. 모든 게 잘못되고 있었다.
'멋지고 혁신적인 서비스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 창업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클라이언트를 만족시키는 개발'만 하고 있었다. 돈은 벌고 있었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이것은 성공이 아니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생존일 뿐이었다.
다들 지쳐가고 있었던 분위기, 자연스레 얘기가 나왔다. "우리... 다시 우리 아이템 해보는 거 어때?"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또 실패하면 어쩌지. 하지만 동시에 알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우리 모두 불행해질 거라는 걸. 동료들과 함께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 이전처럼 막연한 희망만 가지고 덤비는 게 아니라, 이 지긋지긋한 외주 라이프를 통해 배운 현실 감각으로 철저하게 시장을 고려하기로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첫 계약을 따낸 그날 우리가 클라이언트에게 했던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하기로 했다.
"이걸 왜 만들려고 하는 거지?"
그 답이 명확하지 않으면, 아무리 그럴싸해 보여도 만들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그렇게, 길고 길었던 외주라는 터널의 끝에서 다시 한번 우리만의 길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이제 우리의 유일한 나침반은, 바로 그 질문이었다.
(6화에서 이어집니다)
<울면서, 버티면서, 살아남으면서>는 매주 [수요일] 오전에 연재됩니다. '구독' 버튼을 누르시면 다음 이야기를 가장 먼저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