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수년 간 만들었던 아이템은 '예쁜 쓰레기'에 불과했다
"1억원 보증 됐어요!!"
서류 더미 속에서 건져 올린 1억 원은 팀을 다시 한번 들뜨게 했다. 갚아야 할 ‘빚’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 우리에게 1억은 세상 전부를 가질 수 있는 돈처럼 느껴졌다. 이제 돈 걱정 없이 진짜 우리 제품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달콤한 착각, 우리는 기꺼이 그 신기루에 취했다. 통장에 찍힌 숫자는 당분간 우리가 굶지 않을 거라는 안도감을 주었다. 그 안도감 위에서, 우리는 여유롭게 정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착각했다.
사무실의 공기는 무거웠다. 화이트보드 가득 적혔던 아이디어들은 이제 수십 개의 검은 줄이 그어진 채 지워지기 직전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Product Hunt에 새로 올라온 거 봤어? 우리 생각했던 거랑 거의 똑같아."
"아... 그럼 이것도 안 되겠네."
책상 위에는 식어버린 커피와 과자 부스러기만 뒹굴었다. 우리는 전 세계의 새로운 서비스를 광적으로 훑고, 앱스토어 인기 차트를 매일 분석했지만, 남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미 세상에 다 나와있다'는 절망감뿐이었다. 또 다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하나의 아이템을 정했다. 콘텐츠를 기반으로 동기부여를 해주는 달리기 앱. 우리는 다시 한번 밤을 새웠고, 우리가 보기에 완벽한 제품을 만드는 데 모든 시간과 돈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우리 팀에는 달리기를 꾸준히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가상의 고객을 위해, 우리가 보기에 멋진 기능들을 끝없이 추가하고 있었다. 러닝 문화에 대한 이해도, 얼마에 팔지에 대한 고민도, 시장 규모에 대한 가늠도 없이 그저 막연한 희망을 꿈꿨다.
그럼에도 열심히는 했다. 시나리오를 쓰고, 성우를 고용하고, 사운드 디렉터를 고용해서 쫓기는 듯한 상황을 주는 콘텐츠를 만들었다. 지원사업으로 받은 돈으로 광고를 집행했고, 연계 프로그램으로 실리콘밸리에 건너가 VC들에게 피칭도 했다. 그 부지런함 덕분에 구글플레이 스토어의 ‘Early Access’ 섹션에 선정되어 메인에 걸렸고, 크라우드펀딩도 진행했다. 겉으로 보기엔 모든 게 순조로웠다.
하지만 사용자들은 달리지 않았다. 앱을 켜고 돈을 지불하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우리는 다시, 실패했다.
"이제 전략을 바꿔야 할 것 같아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에 올인하는 건 위험하다. 대신 최대한 많이 만들어보자. 그 중 하나라도 터지면 된다. 일기앱, 광고 차단앱... 우리는 마치 복권을 사듯, 앱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디자인하고, 개발하고, 출시하는 사이클을 한 달로 줄였다. 그리고 무작정 메일을 보냈다. 당시 유행하던 커뮤니티의 콘텐츠 디렉터, 인플루언서, 앱 리뷰 사이트... 누구든 우리 앱을 소개해줄 수 있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았다. 인스타그램 DM도 수백 통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명 커뮤니티에 우리 일기 앱이 소개됐다. 바이럴이 일어났다.
"와, 우리 앱 차트에서 2위로 올라가고 다운로드 200만 넘었어요!"
앱스토어 분석 페이지에 찍힌 숫자는 분명 '2,000,000'이었다.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야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이번 달 수익은 얼마야?"
수익 대시보드에 뜬 숫자를 본 순간, 사무실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침묵. 화려한 숫자 뒤, 통장에 찍히는 돈은 1인 개발자가 먹고 살 수준이었다. 당시 5-6명이던 우리 팀의 월급과 사무실 월세, 대출 이자까지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때 깨달았다. 우리는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드는 법은 알았지만, 그것을 ‘돈’으로 바꾸는 법은 전혀 몰랐다.
바닥을 드러내는 통장 잔고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냉혹한 현실을 마주했다. 한참의 침묵 끝에, 대표님이 말했다. "...외주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사무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우리의 꿈, 우리의 아이템을 포기하자는 말이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당장 월급만큼의 돈을 벌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우리의 꿈은 너무나 무력했다. 예쁜 쓰레기를 만드는 스타트업에서, 남의 꿈을 대신 만들어주는 외주 업체로. 우리의 꿈은 그렇게, 시간당 단가로 계산되기 시작했다.
(5화에서 계속됩니다.)
<울면서, 버티면서, 살아남으면서>는 매주 [수요일] 오전에 연재됩니다. '구독' 버튼을 누르시면 다음 이야기를 가장 먼저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