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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디자인 빼고 다 합니다

나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하여

by 채원


낭떠러지 아래는 생각보다 푹신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다. 대표님의 멋진 말에 이끌려 무작정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의 아이디어는 덜컥 8천만 원짜리 정부지원사업에 선정되었다.


갑자기 생긴 돈은 우리를 어설픈 '팀'에서 어엿한 '법인'으로 떠밀었다. 태어나 처음 해보는 법인 등기, 사업자 등록… 정신을 차리고 나니 나의 공식적인 역할은 '서비스 기획자'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서비스 기획자로서 나의 첫 업무는, 법인 통장에 찍힌 지원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규정을 공부하고 세무사를 알아보는 일이었다.


나의 역할은 서비스 기획이었지만, 기획은 대표님과 함께였다. 문제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내가 너무 서툴렀다는 점이다. 지난 20여 년간, 나는 늘 정답이 있는 문제만 풀어왔다. 좋은 점수를 받는 법은 알았지만, 정답 자체가 없는 문제를 푸는 법은 배운 적이 없었다. 머릿속의 아이디어를 논리적으로 구체화하고, 개발팀이 이해할 수 있는 명확한 문서로 만들어내는 일은 번번이 벽에 부딪혔다.


내가 쓴 기획서는 그저 모호한 아이디어의 나열일 뿐, 개발을 위한 설계도가 되지 못했다. 회의가 끝나면, 제대로 된 결과물 하나 내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기획자로서 나의 쓸모를 증명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앱스토어에 앱을 출시하고 심사를 받는 복잡한 과정을 하나하나 맨땅에 헤딩하며 알아보기 시작했다. 개발과 기획처럼 ‘정답 없는’ 일이 아닌, ‘정답이 명확한’ 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무서에 전화해서 필요한 서류를 묻고, 정부지원사업 규정을 읽고 정산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들. 어렵고 복잡했지만, 이 일들에는 분명한 목표와 결과가 있었다.

그렇게 나는 기꺼이 회사의 잡부가 되었다. 서비스 기획에서 당장 채우기 부족한 나의 가치를, 이름 없는 행정 업무들을 완벽하게 처리해내는 것으로 증명하고 싶었다.


그때는 몰랐다. 서툰 기획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는 자괴감 속에서, 어떻게든 팀에 기여하기 위해 추가로 떠맡았던 이 일이 당장 회사의 다음 숨을 트여줄 동아줄이 될 줄은. 그렇게 내가 밤새 씨름한 서류들은, 기보의 1억 원 보증이라는 결과물로 돌아왔다.


(4화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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