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함이 오기가 되기까지
"같이 창업해볼래?"
스마트폰과 모바일 앱이 세상을 바꾸기 시작하던 2012년, 스물셋의 나는 그렇게 부산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스물세 살의 나는 내가 세상의 주인공인 줄 알았다. 취업 준비에 여념이 없는 동기들 사이에서, 나는 '창업가'라는 낯설지만 근사한 이름으로 불렸다.
서비스 기획 전문가 과정, 모바일 앱 전문가 과정 등 당시에 생소한 것들을 앞서 나가 익히며 수료했고, 여러 스타트업 행사 데모데이에 참여해서 발표하며 네트워킹도 해나갔다. 모든 게 새로웠다. 그런 곳에 속해 있는 나 자신이 멋있어 보였다.
보증금 얼마에 월세를 내는 작은 방을 사무실 삼아 밤새워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동료들과 소박한 밥을 먹으며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불안했지만, 그 불안감마저 청춘의 훈장처럼 느껴졌다. 정해진 길을 가는 친구들이 오히려 시시해 보였다. 나는 다르다고, 더 큰 꿈을 꾸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오만한 착각에 처음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친구들이 하나둘 졸업하고 사회로 나갔을 때였다. 페이스북 피드에는 연수원에서 받은 명함과 사원증 사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와는 다른 길'이라며 애써 외면했다. 그렇게 애써 외면하던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던 건, 오랜만에 다 같이 모인 친구의 결혼식 뒤풀이 자리에서였다.
오랜만에 내려온 부산의 밤은 뜨거웠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잔 부딪히는 소리로 시끄러운 술집 안은 사람들의 열기로 후끈했다. 대기업 다니는 친구 하나가 다른 친구에게 물었다. "너도 골프치지? 필드 나가봤어?" 그러자 다른 쪽에서 대화가 이어졌다. "나는 주식 때문에 미치겠다. 너는 뭐 샀냐?"
골프? 주식? 한 달 사무실 월세와 다음 달 팀원 월급을 걱정해야 하는 나에게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내가 가진 '창업가'라는 이름은 그들의 세계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들이 매달 따박따박 월급을 받으며 쌓아가는 자산과 경험치 앞에서, 내가 가진 것은 불확실한 꿈과 당장 사라질지도 모르는 지원금뿐이었다. 연봉과 복지를 이야기하는 그들 앞에서 나의 꿈은 다시 한번 한 단어로 설명되지 못하는 무언가가 되었다.
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기 위해. 하지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술이 유독 쓰게 느껴졌다. 그날 밤, 자랑스러웠던 나의 길은 부산의 시끄러운 술집 한복판에서 완전히 길을 잃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 나는 캄캄한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친구들의 농담에 애써 웃던 초라한 모습. 엄마의 만류를 뿌리치고 시작한 길이었다. 모두의 걱정과 우려를 뒤로하고 내린 나만의 선택이었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한 채로 끝낼 수는 없었다. 내 자존심의 문제였다.
내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마다 나는 다짐했다. 반드시 ‘증명’해내겠다고.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안정적인 월급보다 더 큰 가치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겠다고.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용기가 아니라 무모함이었다. 나는 내가 얼마나 아는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없는지 깨닫지 못한 채였다. 그저 ‘증명’이라는 목표 하나만 보고,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진 셈이었다. 당장 내가 마주할 세상이 어떤 곳인지도 모른 채.
(3화에서 계속됩니다)
<울면서, 버티면서, 살아남으면서>는 매주 [수요일] 오전에 연재됩니다. '구독' 버튼을 누르시면 다음 이야기를 가장 먼저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