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3억은 잔고가 아니라 빚이었다

10년 차 스타트업 멤버의 생존 고백

by 채원

드디어 통장에 23억이라는 잔고가 찍혔다. 그간 회사의 자금을 관리하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던 금액. 0이 몇 개야, 중얼거리며 세어보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휴대폰을 들었다. 제일 먼저 엄마에게 전화해 알렸다. "엄마, 나 이제 자랑스러운 딸 맞지?"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회사에서 경력을 쌓은 뒤에 창업해도 늦지 않다는 엄마의 만류를 뒤로 하고 시작한 길, 드디어 엄마에게 무언가 증명해 보인 것 같아 정말 기뻤다.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열었다. 투자 유치 기사를 캡처해 올리고 성공을 양껏 전시했다. 그간 나의 고생을 아는 친구들의 축하 메시지에 답장을 하며 한껏 어깨가 솟은 기분을 느꼈다.


며칠 후엔 가장 친한 친구를 만나 와인바에 갔다. 용산의 와인바에서 그럴듯한 와인과 안주를 주문하며, 이 순간만큼은 마음껏 기분을 내고 싶었다. 웃고, 떠들고, 축하를 받았다.

"이건 내가 살게."

적지 않은 금액을 계산하며 성공한 내가 된 듯한 기분에 젖었다. 분명 좋았다. 적어도 좋다고 믿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사무실에 출근했을 때, 한 동료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근데 생각보다 왜 이렇게 안 좋아 보이세요?"


그 질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요란했던 내 모습이 전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렇다. 나는 좋았다. 하지만 동시에, 텅 비어 있었다. 내 감정은 모두 소진되고 반짝이는 껍데기만 남아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는 기분.


지난 몇 달간, 나는 내가 아니었다. 투자를 위한 기나긴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내 영혼과 시간, 모든 것을 연료처럼 태워 넣었다. 23억이란 금액을 투자받아 잘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 팀이라는 것을 숫자와 스토리로 끊임없이 증명하는 시간이었다. Data Pack을 끊임없이 업데이트하고, 바뀌는 가설에 따라 Financial Projection을 계속 정교하게 고쳐나가야 했다.


VC의 날카로운 질문이 오면, 주말도 새벽도 없이 이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기 위해 나는 언제든 레디 된 상태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시동을 끄지 않고 달려버린 나는 나는 완전히 소진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했다. 바로 그 말이, 텅 빈 내 속을 가장 아프게 찔렀다. 나는 알아버렸다. 23억짜리 투자를 받는 과정이 이 정도의 지옥이라면, 앞으로는 훨씬 더 힘들겠구나. 나는 결승선에 도착한 게 아니었다. 이제 막 또 다른 지옥의 출발선에 서 있을 뿐이었다.


투자를 받았다는 건 이제 다시금 달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난 이미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는데. 지난 수년간 내가 들인 노력은 뭐지? 여기서 어떻게 그것보다 더하지? 돈만 생기면 모든 게 편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아니네?


끊임없이 불안하고 자다가도 불안한 마음에 깨는 날이 반복되었다. 병원에 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비로소 남들에게 내보일 성과를 만들고 빛나보이던 시점, 그때 왜 나는 가장 힘들었을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이 모든 지옥의 시작점, 남들보다 조금 앞서간다는 오만한 착각에 빠져있던 7년 전 그날의 이야기부터 꺼내보려 한다.


(2화에서 이어집니다)


<울면서, 버티면서, 살아남으면서>는 매주 [수요일] 오전에 연재됩니다. '구독' 버튼을 누르시면 다음 이야기를 가장 먼저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