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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많아졌지만, 강해지지 못했다

'알아서 잘해주길'이라는 착각

by 채원

모래 위에 쌓은 성


20억이 넘는 돈은 우리에게 사람을 뽑을 총알을 줬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을 뽑아야 하는지 모르는 어설픈 저격수였다. 우리는 '진취적인 인재'가 아니라, 그저 '성실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뽑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명확한 '권한과 역할'을 위임하는 대신 '알아서 잘해주길' 바랐다.


새로운 동료들이 합류하고, 우리는 진심으로 '원팀'이 되고 싶었다. 다 같이 워크샵을 떠나 밤새 이야기를 나눴고, 회사 로고가 새겨진 후드집업을 맞춰 입고 단체사진을 찍으며 우리의 소-속감을 확인했다. 팀별로 주간 리뷰 시간을 만들고, 넉넉한 회식 예산을 배정하며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애썼다. 겉으로 보기엔 모든 것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모래 위에 쌓은 성이었다. 후드집업은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대신해주지 못했고, 워크샵에서의 다짐은 명확한 시스템 없이는 공허한 외침이 되었다.


10명이 넘는 조직은 그렇게 동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하나의 산, 더 높은 산


사람이 늘었으니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간 리소스 부족으로 다 수용하지 못했던 고객사의 까다롭고 복잡한 요청 기능도 개발하고, 금융사가 우리의 고객사가 되는 큰 프로젝트도 수주해냈다. 프로젝트를 잘 수행해서 오픈했을 때는 모두 다 같이 함께 기뻐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짧았다. 거대한 프로젝트를 끝낸 팀에게 남은 것은 성취감만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갈아 넣고 난 뒤의 깊은 피로감, 그리고 '이만큼 고생했으니 이제는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암묵적인 기대감이었다.

회사는 그 기대에 '보상'이 아닌 '다음 과제'로 답했다. 하나의 산을 넘자마자 더 높은 산을 가리키자, 사람들은 더 이상 '함께'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고생한 사람들끼리, 혹은 비슷한 불만을 가진 사람들끼리. 팀원들은 자기들끼리 뭉치기 시작했다. 우리의 선의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부는 위태로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전쟁의 시작


바로 그 위태로운 순간, 외부에서 구원처럼 보이는 기회가 찾아왔다. '야심작'이 될 만한 거대한 프로젝트를 수주할 기회였다. 대표님의 목소리는 오랜만에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프로젝트가 투자 가치를 증명하고, 이 모든 혼돈을 한 방에 잠재울 '압도적인 성공'이 될 거라고 했다.


하지만 회의실에 모인 팀원들의 표정은 싸늘했다. 팔짱을 낀 채 미동도 없는 개발자들, 바닥만 내려다보는 동료들. 누군가 침묵을 깨고 물었다. "지금 기존 프로젝트도 밀려있는데, 저걸 할 리소스가 있나요?" 명백한 반발이었다. 돈을 주고, 방향을 제시하는데 왜 우리는 이들을 끝없이 설득해야만 하는가. 그들의 불만과 저항이 지긋지긋했다.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 오기 같은 감정이 뜨겁게 솟구쳤다.


대표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알겠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을 수용하겠습니다. 기존 팀은 코어 제품에 집중해주세요. 이 프로젝트는, 우리가 가진 돈으로 별도 인원을 구해서 하겠습니다."


'이게 최선이라고? 정말 이게 최선일까?'


내면의 목소리를 애써 억누르며, 우리는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다고, 돈으로 이 문제를 외주화할 수 있다고 믿어버렸다. 그것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돈을 넣으면 그만큼 아웃풋이 똑같이 나올 것이라 생각한, 위험한 도박이었다. 우리는 팀을 설득하는 대신, 팀과의 보이지 않는 전쟁을 선택한 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 프로젝트를 지옥으로 밀어 넣는 스위치였다.



실패의 대가


외부 팀이 꾸려지고,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PM 역할은 나에게 떨어졌다. 그 순간부터 나의 세상은 두 개로 쪼개졌다.


낮에는 프로젝트 담당사와 끊임없이 소통하며 터져 나오는 이슈를 해결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퇴근을 하면, 그때부터 나의 진짜 일이 시작되었다. 새벽까지 외부 팀과 소통하며 그들에게 기획을 전달하고, 그들이 개발한 것을 테스트하는 고군분투가 이어졌다.


나는 한 달 새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 책임 개발자로 함께 참여한 동료도 5kg가 쑥 빠질 만큼 고생했다. 매일이 지쳐 쓰러지는 일상이었다. 우리는 이 고비만 넘기면 모든 게 잘 해결될 것이라고 믿으며, 매일같이 스스로의 몸을 갈아 넣었다.


하지만 내가 외부와 싸우는 동안, 내부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은 몇 시간씩 늦어졌고, 중요한 결정들은 내가 참여할 수 있을 때까지 미뤄지거나, 혹은 내가 없는 회의에서 내려졌다. 사무실 복도에서 마주친 동료의 눈빛은 점점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양쪽 모두에게 죄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결국, 이 '야심작'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외주팀과 내부 리소스가 엉망진창으로 꼬여버린 프로젝트는, 마지막 회의에서 대표의 무거운 한마디와 함께 공식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았다. 이 실패는 수억 원의 돈과 시간, 그리고 팀의 신뢰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우리는 깨달았다. 누군가가 소진되어 매달리는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실패의 대가는 혹독했다. 수억 원의 돈과 시간을 허공에 날린 우리의 통장 잔고는 빠르게 소진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처음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단어를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구조조정'.



(8화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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