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Kim Whanki
김환기
산울림19-II-73#307
1973
캔버스에 유채
264 x 213cm
1973년 뉴욕에서 이 그림을 그릴 때 김환기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어 놓는다.
1973년 2월 19일,
올해 처음으로 큰 캔바스를 시작하다
1973년 3월 11일,
근 20일 만에 307번을 끝내다.
이번 작품처럼 고된 적이 없다.
종일 안개비 내리다.
김환기 Kim Whanki
여인들과 항아리
1950년대
캔버스에 유채
281×568cm
1950년대 6.25 전쟁 이후 즈음, 서울대 교수로 재직중이었던 40대 초반 김환기에게 그 당시 조선방직을 인수한 최대 방직 재벌인 삼호그룹의 정재호 회장이 퇴계로에 새로 집을 지으면서 대형 벽화용으로 주문한 작품이다. 1960년대 삼호그룹이 쇠퇴하면서 미술시장에 나와 이후 1980년대 초에 가나아트 이호재 회장의 중개로 이건희 컬렉션으로 소장된 것으로 예측한다. 1985년 서울 서소문 중앙일보 사옥이 오픈하면서 한동안 걸려 있었는데, 같은 건물에 있던 호암갤러리의 다른 작품들을 초라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한동안 용인 수장고에 있다가 이번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김환기 Kim Whanki 1913 - 1974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김환기는 한국적 정서를 서양미술과 접목시켜 표현해 한국 모더니즘을 구축한 대표적인 화가이다. 초창기에는 한국적 정서로 표현한 달항아리, 해, 달, 구름, 나무, 사슴, 학, 매화, 한국 여인 등의 반추상 작품에서 1970년부터 후반기에는 수많은 점이 전체 화면을 가득 채운 ‘전면점화 全面點畵’ 의 완전 추상 작품으로 그의 작품의 절정을 이룬다.
한국 미술 경매에서 가장 비싼 Top 10 작품 중, 9개 작품이 그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환기불패’ 라고 불릴 만큼, 그의 작품은 구매 후 손해보지 않는 걸로 유명하며, 매번 새롭게 갱신되는 비싼 거래의 가격으로 김환기 작품을 이기는 작품은 다시 김환기 작품! 이라고 회자되기도 한다. 가격이 그 작품의 절대 가치 평가의 기준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만큼 공감한다는 점에서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보는 작품 제목이 자칫 어려워 보일 수 있는데, 그 당시 추상주의 화가인 잭슨 폴락 Jackson Pollock (1912 - 1956), 마크 로스코 Mark Rothko (1903 - 1970) 의 작품 제목에서 보여지던 것처럼, 관람자에게 작품 제목을 통해 작품에 대한 선입견을 주는 걸 원치 않았던 추상주의 작가의 의도로, 의미 없는 숫자들의 조합 또는 Untitled (무제) 의 방식을 김환기 또한 따른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작품 제목 ‘5-IV-71 #200’ 은 ‘일-월-년 #작품제작넘버’ 로 1971년 4월 5일 그리기 시작한 작품으로 그의 작품 중 200번째 작품을 의미한다. 또한 몇 작품에는 의미를 뜻하는 단어들을 함께 표시하였다.
1, 김환기, 우주 Universe 05-IV-71 #200
2, 김환기, 3-Ⅱ-72 #220
3, Untitled(무제), 1971
4, 김환기, 고요 Tranquillity 5-IV-73 #310
5, 김환기, 12-V-70 #172
6, 김환기, 무제 27-VII-72 #228
7, 김환기, 무제, 1970
8, 김환기, 19-Vll-71 #209
10, 김환기, 무제 3-V-71 #203
1913년, 전남 신안군 안좌도라는 작은 섬에서 1남 4녀의 넷째로 부유한 천석군 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난 수화 樹話(나무수, 이야기화, 나무와 이야기하다) 김환기 金煥基 는 그의 나이 19살 때 일본 유학을 떠나 도쿄 니시키로 중학교와 니혼대학 예술학원 미술학부에서 공부한다. 이때 파블로 피카소의 큐비즘 Cubism (입체주의), 앙리 마티스의 야수주의 Fovism 등 서양미술을 접하고 서양미술에 ‘한국적인 미술’을 담아내는데 노력한다.
1935년 3학년 졸업반이 되면서 정식 화가의 등용문으로 알려진 ‘이과전 二科展’에 작품을 출품할 자격을 얻게 된다. 많은 고민 끝에, 한복 입은 누이동생을 모티브로, 자신의 고향이었던 안좌도의 푸른 바다, 구름, 하늘, 나무, 둥지의 새알 등을 표현한 ‘종달새 노래할 때’ 를 출품하여 첫 입선을 한다. 화가 김환기의 시작이다. 그때 당시 한일 강점기 시대에 일본 한복판에서 이처럼 한국적인 작품을 그린 그의 용기가 대단하다. 조형물들과 비현실적인 배경 등의 느낌이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일본대학 졸업 후 1937년 한국으로 돌아온 김환기는, 그림보다는 한국에 정착해 자신의 업을 이어가고 정착하길 바라는 아버지의 뜻으로 첫 번째 부인과 결혼하고 세 딸 영숙, 금자, 정인도 낳는다.
이 시기에 한국 추상화의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받는 대단한 작품을 그려낸다.
론도 Rondo, 1938,
‘론도 Rondo’ 는 클래식 음악 용어로, ‘둥글다 Round’ 라는 뜻의 이탈리아어이다. ‘일정한 패턴으로 반복되어 나타나는 곡’ 으로 AB-AC-A 이런 식이다. 설명보다는 론도의 곡을 들으면서 이 작품을 감상해 보면 더 낫지 않을까?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1번 K. 331 3악장 ‘터어키 행진곡’과 멘델스존의 ‘론도 카프리치오소 (Rondo Cappriccioso) Op.14 이 대표적인 론도 곡이다.
자, 그럼 위 그림에서 론도의 느낌을 받을 수 있는가? 조각의 반복, 색의 반복, 둥근 테두리들의 울렁거림,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앞으로 나왔다가~ 뒤로 들어갔다가,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하는 반복의 움직임이 느껴지는가? 재미있다. 완전 추상이 아니어서 뭐가 보이기도 한다. 어떤 이는 둥근 외곽 선들이 김환기의 고향인 안좌도 섬을 표현한 것이라 보기도 하고, 오른쪽 아래의 세명의 사람이 김환기의 셋 딸들로 보기도 하고, 가운데 큰 사람이 바로 김환기를 표현한 거라고도 하고, 여러 해석들이 있다. 이러한 색 조각들이 여러 의미로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게 신기하다. 확실히 추상 느낌이 조금만 들어가도 여러 해석들을 할 수 있어 한층 더 재미있다.
1942년, 부친이 사망하자 김환기는 소작농들의 빚을 탕감해 주는 등 재산을 정리하고 그의 아내와도 이혼한다. 이후, 일본인 잡지 편집자이자 시인인 노리다케 가츠오의 소개로 두 번째 부인 변동림(1916 - 2004) 을 만난다. 사실 변동림에 마음을 두고 있던 노리다케가 김환기를 소개한다는 핑계로 변동림과의 만남의 기회를 얻고자 했는데 세상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 듯하다.
변동림은 김환기를 만나기 전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전(현 이화여대) 영문과를 다닐 때, 오빠의 소개로 우리가 국어 교과서에 소설 ‘날개’로 만났던 천재 시인 이상(李箱, 1910~1937) 을 만나 1936년 결혼한다. 이상이 했던 유명한 프로포즈가 ‘우리 함께 죽을까? 아니면 먼 데로 달아날까?’ 이다. 하지만 남편 이상은 결혼 후 단 4개월 만에 일본 도쿄로 떠나 1937년 4월, 일본 도쿄 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숨진다. 이때의 일화가, 이상이 죽기 전 일본에 도착한 변동림은 이상이 ‘멜론이 먹고 싶소’ 라는 말에 도쿄 시내를 돌아다녀 겨우 멜론을 사 와서 이상의 입에 물어주니 먹지도 못하고 입에 물고만 있는 모습에, 먹지도 못하는 멜론을 찾아다니는 것보다는 그의 옆에서 더 많은 시간을 가지는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토로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때 변동림의 나이 21살, 이상의 나이 27살이다. 후에 변동림은 이상의 짧은 생애를 두고, ‘이상은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인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 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기 충분한 시간이다’라고 회상한다.
4개월의 짧은 결혼생활 이후 남편을 잃은 슬픔에 지내던 변동림은 김환기를 만나, 처음에는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서로 편지를 나누면서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딸이 셋이 있던 이혼한 김환기가 변동림 집에서는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아 크게 반대하자, 변씨 가문과 인연을 끊겠다며 변동림은 집을 나오고 그녀의 이름 또한 바꾼다. ‘당신의 아호 향안(鄕岸)을 나한테 주면 평생 그 이름으로 살겠어요.’ 김환기의 어릴 적 이름인 ‘시골 언덕’ 이란 뜻의 ‘향안 鄕岸’을 쓰고, 김환기의 성을 따라 ‘김향안’으로 바꾼다. 1944년 둘은 결혼하여 변동림은 김환기의 여인 김향안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한 인생에서 천재 시인과 천재 화가였던 두 남자의 아내인 김향안은 이렇게 탄생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로 유명한 ‘향수’의 시인 정지용이 결혼식 사회를 보고,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이 주례를 선 결혼식을 성대하게 올린다. 예술가였던 김용준이 살던 성북동의 집 노시산방(늙은 감나무가 있다 하여 붙인 이름)을 사서 수화 김환기와 김향안이 사는 집이라는 ‘수향산방’ 으로 이름을 짓고 그곳에 약 10년간 생활한다. 이 김용준의 추천으로 서울대학교 예술학부 미술과 교수도 1946 - 1950년에 역임한다.
이 시기에 주위의 조언으로 그림을 전시하고 판매할 수 있는 ‘종로화랑’을 오픈하여 운영하는데, 화려하고 귀족적인 고려청자와 달리 너무나 수수하고 소박한 조선 백자와 목가구의 매력에 흠뻑 빠져 많이 사모으게 된다. 이게 바로 김환기의 그림에서 모티브가 된 조선 백자와 항아리가 나오게 된 배경이다. 이후 1956년 파리로 갔을 때, 항아리를 주제로 한 작품의 절정을 이룬다. 우리가 지금은 익숙하게 쓰고 있는 ‘달항아리’라는 말도 김환기가 처음 쓴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
이조 항아리
김환기
지평선 위에 항아리가 둥그렇게 앉아 있다.
굽이 좁다 못해 두둥실 떠 있다.
둥근 하늘과 둥근 항아리와
푸른 하늘과 흰 항아리와
틀림없는 한 쌍이다.
똑
닭이 알을 낳드시
사람의 손에서 쏙 빠진 항아리다.
아, 김환기는 시인이구나! 어쩜 저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 달에서 낳은 알이 달항아리란다. 누가 달과 항아리를 보고 저처럼 표현할 수 있을까? 달에서 똑, 달항아리.
한때, 항아리 속에서 산 적이 있다. 온통 집안 구석구석에 안 놓여진 구석이 없었으니
우리집을 일러 항아리집이라 부른 사람도 있었던 것 같다.
하나 둘 사들인 것이 대청, 화실 그리고 마당까지 번져가게 되니
아무리 항아리 광(狂)이 된 사람이지만,
좁은 집에 골치가 아닐 수 없어 이젠 다시 사들이지 않아야겠다는
몇 번이고 결심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시중에 나가면 자연히 골동품 가게로 발길이 향해졌다.
들르면 으레 한두개 점을 찍고 나오게 됐으니 흡사 내 항아리 취미는 아편 중독에 지지 않았다.
그래서 다락, 광, 시렁위에까지 많은 항아리들을 포개 쌓아놓게 되었으니
이제 생각해도 내 청춘기는 항아리열(熱)에 바쳤던 것 같다.
- 1963. 4. 김환기의 일기 中 -
달에서 쏙 빠진 달항아리가 매화가지에 걸려, 하얀 항아리 위에 진짜 매화를 그려 넣었다. 아, 너무나 아름다운 우리의 그림이다. 달에서 빠진 항아리가 매화를 품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매화가 그려진 달항아리를 본 적이 있는가?
하얀 대칭이 맞지 않은 달항아리에는 주위의 자연이 함께 그려져 있다. 바닷가 산 위의 해를 품은 항아리는 주위의 나무와 둥글둥글한 산, 그리고 저 멀리 아주 큰 달을 함께 머금고 있다. 신이 빚은 자연과 사람이 빚은 항아리는 늘 함께 하고 있다. 김환기의 그림은 항상 자연과 함께 한다.
한국 예술가들의 최대의 불행은
넓은 세계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어 예술적 도약이 제한되어 있는 것이고
나는 한국의 화가일지는 몰라도 세계의 화가는 아직 아니다.
- 김환기 -
1956년, 그의 나이 44세에 파리로 날아간다. 이때에도 적극적인 현대 여성 김향안의 지원은 절대적이었다. 그전부터 파리로 가고 싶다고 내색했던 김환기를 위해 6.25 피난 때도 불어책을 챙겨 공부하고, 미술가의 아내로서 미술을 알아야 한다며 미술평론가 공부도 적극 한다. 막연하게 꿈만 꾸고 있는 김환기에게 김향안은 ‘그럼, 내가 파리로 먼저 가지, 뭐’ 하며 혼자 먼저 떠난다. 김환기보다 1년 전 파리로 날아가, 김환기가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 수 있도록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교류를 하고, 파리, 니스, 브뤼셀 등에서 김환기가 전시할 수 있도록 헌신적드로 지원한다. (M. 베네지트 화랑/파리, 앵스튀티 화랑/파리). ‘아내가 나를 위해 이렇게 좋은 환경에 아틀리에를 구해준 모양이오. 그래도 나는 아직도 다복한가봐. 파리에 오자마자 그냥 제작에 착수할 수 있는 이러한 화실에 들 수 있다는 것이 무조건 감사하기까지 하오.’ 김향안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김환기도 있었을까? 사랑의 힘일까?
파리에서의 3년 동안 김환기는 가장 한국적인 그림이 세계에서도 통하는지 보기 위해 미치도록 그림만 그렸다고 한다. 자신의 한국적인 그림에 자칫 영향을 받을까 봐 , 루브르 박물관 조차 한 번도 가지 않았다는 일화는 어느 정도로 한국적인 그림을 세계에 펼쳐 보고 싶었는지 그의 의지를 짐작할 수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라는 것을 1950년대에, 해외 나가기도 쉽지 않았던 가난한 전쟁 국가, 한국의 김환기는 어떻게 이렇게 실천할 수 있었을까?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
여인들과 항아리, 281x568㎝
정말 큰 대작이다. 그의 작품 중에 제일 큰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가로가 5.6m 이고 세로가 2.8m 이다. 벽면 하나가 그의 작품으로 가득 찬다. 이렇게 크다 보니, 벽화를 보는 것 같다. 현대적인 고구려 벽화를 보는 듯하다.
정확한 연도가 없다. 보통은 뒷면에 끄적끄적 해 놓는데 없다. 이것을 두고, 그림의 주문자였던 삼호방직의 '회장 사모님' 이 세 여인의 가슴이 노출된 반누드 그림을 보고 가리라는 둥 뭐라고 하자 김환기 자존심에 서명하지 않고 주문자에게 바로 그림을 보내서 끝내버려 없는 거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동안 김환기의 그림에서 많이 보였던 오브제들을 한 곳에 다 모아놓은 느낌이다.
세 여인이 서 있고, 그 사이에 두 여인과 한 여인이 앉아있고, 앉아 있는 두 여인 뒤로 또 서 있다. 참 조화롭게 배치하였다. 지루하지 않게 다양한 포즈를 하고 있다. 누가 봐도 우리의 옷이다. 우리의 여인들이다.
왼쪽의 여인은 항아리를 옆으로 어깨 위로 들고 있고, 가운데 여인은 오른손은 치맛자락을 잡고 왼손은 머리에 인 항아리를 잡고 있고, 오른쪽의 여인은 고려청자로 가슴을 가리고 들고 있다. 역동적인 우리 여인의 모습이다. 조선백자뿐만 아니라 고려청자까지 보여주는 우리의 그림이다.
앉아 있는 여인들이 너무 귀엽다. 우리의 한복을 입고 있는 아이들이다. 오똑한 빨간 입술이 보이는가? 표정이 너무나 귀엽다. 너무나 활기차고 밝아 보이는 우리 여자아이들의 모습처럼 보인다. 뒤에 서 있는 두 여인도 둘이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서 있는 여인들의 얼굴도 그렇고, 등장하는 모든 여인들의 얼굴이 달항아리의 모양과 똑같다. 우리가 달항아리이다.
빨간 뿔이 있는 수사슴이 빨간 매화꽃을 입고 물고 있다. 늠름한 수사슴의 모습보다는 뭔가 로맨틱한 사랑을 아는 사슴의 모습으로 보인다. 옥색이 너무나 이쁘다. 고구려 벽화 등 우리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사슴을 참 현대적으로 잘 풀었다. 예쁜 사슴이다.
꽃을 파는 수레와 새를 파는 새장 뒤에 앉아 있는 노점 소녀, 저 뒤에 단순화된 나무들과 조선 남대문의 모습 등이 너무나 정겹다.
전체적인 배경을 조각조각으로 붙여놓은 모습이 우리의 전통적인 누빔 조각보이다. 우리의 누빔 조각보 위에 우리의 모습을 그려놓은 느낌이다. 한국적인 요소를 현대적으로 참 잘 풀어낸 작품이다. 이건 누가 봐도 우리 그림이다. 큰 작품으로 보면 분명 더 큰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1959년 약 3년간의 파리 생활을 정리하고, 1952년부터 역임하고 있던 홍대 미대 교수로 복직하고 학장으로도 일한다.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회화 부분 명예상을 수상한다. 한 번 발을 담근 세계 미술에 다시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욕구는 억누르지 못했을까? 1964년 J.D. 록펠러 III 재단이 지원하는 지원금을 1년 받는 조건으로 미국 뉴욕으로 다시 나간다. 이때가 그의 나이 51세, 그의 도전에 나이 따위는 생각에 없다.
점화가 성공할 것 같다.
미술은 하나의 질서다.
1965년 1월 2일
김환기 일기
미국 뉴욕 생활은 경제적으로 힘들고, 오랫동안 10시간 이상씩 작업을 하느라 신경통이며 두통이며 신체적으로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도 힘든 건 한국에 두고 온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1970년, 그가 오랫동안 좋아라 했던 시인 김광섭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는다. 김광섭은 우리에게 국어책에서 ‘성북동 비둘기’로 잘 알려진 시인이다. 김환기가 성북동 살 때 성북동 이웃사촌이었다가 김환기가 뉴욕에 건너간 후 주로 편지로 소식을 주고 받았다. 큰 슬픔에 빠진 김환기는 뉴욕에서 알고 지냈던 김마태(김환기의 작품 ‘우주’를 소유하였던 후원자겸 의사)의 집에 가 김광섭이 1969년에 발표한 ‘저녁에’ 를 메모하듯이 드로잉 한다.
저녁에
김광섭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 수록
별은 밝음 속에서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아, 한점 한 점이 그리움의 별이구나. 사이즈가 세로 2.3m, 가로 1.7m 의 대형 작품이다. 이렇게 큰 화폭을 하나하나 점을 찍으면서 그리움을 표현하였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작업이다. 점 하나 찍고, 사각으로 그리고, 점 하나 찍고, 사각 치고, 점 하나 찍고 사각으로 두르고… 저 수많은 별, 저 수많은 사람이 나를 쳐다본다. 저 안에 나는 어디 있고, 너는 어디 있는가. 별로, 사람으로,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으로 다시 만날까. 그림이 시구나.
내가 그리는 선(線),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點),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江山).”
-1970년 1월 27일, 김환기의 일기-
(1970년 한국일보 주최 한국미술대상 수상. 실제로는 김광섭이 죽었다는 소식은 오보였다. 김환기가 1974년 먼저 죽고, 그로부터 3년 후 1977년 김광섭은 서울에서 생을 마감한다.)
아, 탄식이 먼저 나온다. 누가 봐도 우리 한국이다. 분홍 저고리의 아름다움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다. ‘환기 블루’로 불리는 그의 매혹적인 블루가 아닌, 이젠 ‘환기 핑크’라 불러야 하는 건 아닌가? 한 땀 한 땀을 누가 이태리 장인들에게만 붙이는 용어라 할 수 있을까? 눈물이 난다. 너무 고맙다. 우리의 아름다움을 이렇게까지 표현해 줘서 너무 고맙다.
진종일 비. 100×80 시작. #220 Rose Matar
-김환기의 일기 중-
캔버스 위에 유화로 기름을 많아 타서 우리의 수묵화 느낌으로 번짐 효과를 내어 표현하였다. 그래서 재료는 유화인데, 동양화 느낌이 난다. 다른 작품에서는 실제로 이 번짐 효과를 더욱 더 살리기 위해, 캔버스가 아닌 코튼 Cotton 위에 유화로 작품을 그리기도 한다. '코튼에 유채'라고 써 있는 작품들이다.
두 개의 원이 우리를 우주 안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2 패널로 구성되어 있다. 두 원이 우리를 빨아 드린다. 두 원은 무엇일까? 혹자는 우주의 근원인 음과 양이라 해석하기도 하고, 남과 여, 너와 나, 김환기와 김향안 등 다양하게 해석한다. 놀라운 건,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 거대한 원이 하나는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고, 하나는 빨려 나오는 느낌이다. 매혹적이다. 무엇보다도 크기 앞에 압도당한다. 저 넓은 화폭에 저 많은 점들을 어떻게 찍어낸 걸까? 얼마나 인내해야 하는 걸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점과 내가 하나가 되는 아무것도 없는 적막한 우주에 덩그러니 나 혼자 있는 무아지경의 순간이 오는 걸까? 감히 따라 해 볼 엄두도 내기가 쉽지 않다.
위 작품이 코튼에 유화로 번진 느낌을 낸 그림이다. 2 패널로 분리가 된다.. 그래서, 원래 이 그림을 뉴욕에서 김환기에게 중형차 한 대 값 정도를 주고 샀다는 김환기의 후원자이자 의사인 김마태(Matthew Kim, 한국명 김정준)씨는 가로로 뉘어서 거실에 걸어두곤 하였다.
현재, 2021년 대한민국 최고가인 약 132억 원, 수수료 포함 153억여 원인 작품을 누가 낙찰해 간 걸까? 낙찰자는 글로벌세아그룹 김웅기 회장으로 알려져 있다.
김환기, 산울림19-II-73#307
산울림이 동심원을 그리면서 퍼져나간다. 동심원이 겹쳐지면서 퍼져나간다. 사각틀 안에서는 더 큰 울림이 느껴진다. 더 깊은 울림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사각틀 밖에서는 점을 찍으면서 번진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옅은 진동을 내며 사라지는 듯하다. 중간의 하얀 선은 하얀 선을 그린 게 아니고 그리지 않고 남겨둠으로써 만들어진 선이다. 얼마나 집중해서 그려야 저렇게 그릴 수 있단 말인가? 산울림, 나의 마음에도 울림이 퍼져 나간다.
김환기의 전면점화,
작업을 가까이서 보던 김향안은 이렇게 회상한다.
큰 점, 작은 점, 굵은 점, 가는 점, 작가의 무드에 따라 마음의 점을 죽 찍는다.
붓에 담 긴 물감이 다 해질 때까지 주욱 찍는다.
그렇게 주욱 찍은 작업으로 화폭을 메운다.
그다음 점과 다른 빛깔로 점들을 하나하나 둘러싼다.
꽤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다시 다른 빛깔로 하나하나 둘러싼 사각형을 다시 둘러싼다.
전 화폭을 둘러싼 다음, 다시 또 다른 빛깔로 네모꼴을 둘러싼다.
세 번 네모꼴을 그리는 셈이다.
중첩된 빛깔들이 창조하는 신비스러운 빛깔의 세계,
이것이 이 작가의 개성이다.
더 이상의 설명은 의미 없다.
김환기의 작품은 그 큰 작품의 세계 앞에 섰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듯하다. 전율.
인생에서 한 번은 예술이 주는 기쁨과 위안을 받아 보시길 바라는 작은 바람입니다. 본 저작물에 인용된 자료의 저작권은 해당 자료의 저작권자에 있음을 알립니다. 본 저작물에 인용된 자료의 게시 중단 등을 원하시면 shaan@daum.net 로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즉시 삭제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