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Lee Joongseob
이중섭
황소
1950년대
26.4 X 38.7 cm
1955년 이중섭이 죽기 1년 전 39세에 첫 개인전이었던 서울 미도파화랑에 출품되었던 약 50여 점 작품 중의 하나로, 그 당시 출품작들이 1954년 통영에서 머물며 그렸던 작품들이 대다수였던 것으로 보아 1954년 통영에서 그린 작품으로 미루어 추정한다. 개인전은 성공적이었지만 수금이 잘 안 되어 여전히 이중섭은 죽기 전까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첫 개인전을 여는데 도움을 주었던 지인들 중의 한 명인 친구 김광균 시인이 출품작 중에 팔리지 않은 약 20여 점의 작품을 개인 사무실에 보관해 두는데 그중에 하나가 이 ‘황소’ 작품이다. 이후 이력은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이건희 컬렉션에 들어간 후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다가 이번에 다시 한번 공개되며 화제를 모으게 된다.
이중섭 Lee Jung-seob 1916 - 1956,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이중섭은 일제 강점기와 6.25 한국 전쟁 시기를 거쳐 소, 닭, 게, 아이 & 가족 등 한국인이 좋아하는 정서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많이 남겨 ‘민족 화가’로 불리기도 한다. 가족과 떨어져 살면서 느꼈던 그리움과 사랑, 몸서리치게 힘들게 견뎌야 했던 가난, 어려웠던 시기에 느꼈던 한국인의 감정 등을 고스란히 그림에 표현해 내어 그의 작품이 곧 이중섭이다.
1916년 북한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나, 부유했던 외가의 도움으로 부족함 없는 유년 시절을 보낸다. 중학교 졸업 후, 민족주의 학교인 ‘오산학교’ 에 진학하여, 미술 교사였던 미국 예일대와 유럽 미술여행까지 다녀왔던 임용련 선생님의 영향으로 본격적으로 미술에 입문하게 된다. ‘한국인은 가장 한국적인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교사의 가르침으로, 이때부터 한국인의 이미지와 가장 맞닿아 있는 ‘황소’ 그림을 많이 그린다.
1936년, 교사의 권유 & 최초의 백화점인 ‘백두상점’을 열어 성공한 사업가였던 형(이중석)의 경제적 도움으로 이중섭은 일본 유학을 떠난다. 일본에서 한 번 옮긴 학교인 분카가쿠인(文化学院)에서 같은 미술부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1921 -)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1945년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한국 원산으로 와 결혼식을 올리고, ‘따뜻한 남쪽에서 온 여인’이라는 뜻으로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이남덕(李南德)’ 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준다. 1946년 첫째 아이는 태어난 지 1년도 채 안 되어 ‘디프테리아’라는 병으로 죽고, 이후 1947년 둘째 이태현(2016년 사망), 1949년 셋째 이태성(야마모토 야스나리)을 두게 된다. 어머니인 마사코와 함께 일본 도쿄에서 살고 있는 셋째 아들 이태성은 2005년 3월 아버지인 이중섭의 작품 8점을 경매에 내놓았는데, 같은 해 10월 위작으로 밝혀져 우리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1950년 한국 전쟁 시기에, 북한 원산에 대대적인 폭격이 일어날 거라는 얘기에 짐을 싸고 가족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조카(이영진)가 머물고 있던 제주도까지 내려간다. 1951년 1월부터 약 11개월 동안 제주도에 머물면서 가난했지만 가족이 모두 함께 지내는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제주 서귀포에 그때 살았던 작은 단칸방인 이중섭 생가와 바로 옆에 이중섭미술관이 있는 이유이다.
1952년 제주에서의 힘든 가난을 피해 일을 찾아 부산 범일동으로 옮겨 판자촌에서 부두 노동자로 일하는데, 현재 부산 범일동에 ‘이중섭거리’가 조성되어 있는 이유이다. 같은 해 장인의 부고 소식과 극심한 가난으로 아내와 두 아들은 일본으로 떠나고, 여권이 없던 이중섭은 한국에 남는다. 1953년 7월 가족을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넘어간 이중섭은 일본 히로시마 여관방에서 약 1주일 정도 가족과 함께 지내는데, 이것이 너무나 안타깝게도 마지막 가족과 함께 지낸 소중한 시간이 된다.
1955년 지인들의 도움으로 첫 이중섭 개인전을 서울 미도파백화점에 있던 ‘미도파화랑’에서 연다. 약 20여 점이 팔릴 만큼 전시회는 성공적이었지만, 수금이 잘 되지 않아 경제적 어려움은 계속 이어진다. 이중섭은 어서 빨리 돈을 벌어 떨어져 있는 가족들과 만나야 한다는 간절함이 강한 만큼 절망감도 컸다. 거식증, 조현병, 지나친 음주 등으로 몸도 안 좋아져, 1956년 41세의 젊은 나이에 간염으로 서울적십자병원 311호에서 외롭게 사망한다. 무연고자로 3일 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친구들의 도움으로 장례를 치르게 된다. 화장 후, 일부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고, 일부는 일본에 있는 부인에게 보낸다.
이중섭의 황소,
열정적인 붉은색 바탕 위에 커다란 눈망울을 끔뻑, 끔뻑 거리는 늠름한 황소의 모습이다. 선이 굵은 황소의 모습에서 우리나라의 우직한 소의 성격이 읽힌다. 날카로운 치아가 아닌, 낮게 고른 이빨을 살짝 드러내고 묵직한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 외국 소 울음소리 무 Moo~ 가 아닌 우리의 소 울음소리, 음메~ 하고 울 것만 같다. 누가 봐도 우리 한국인의 소이다.
‘당신의 황소는 스페인의 투우처럼 무섭다’
1955년 미도파화랑 전시회 이후, 남은 작품 20여 점과 추가 작품 45점 등을 가지고 대구 미공보원에서 개인전을 다시 여는데, 이 전시회를 보던 미공보원장 아서 메타카트 Arthur McTaggart (1915 - 2003) 가 한 말이다. 붉은색 바탕을 보고, 화난 스페인의 투우 Bullfight, 소의 모습을 연상한 게 아닌가 싶다. 스페인의 투우에서 싸우는 소의 모습을 한 번 볼까?
아니, 이 모습이 어떻게 우리의 황소와 비견될 수 있으랴? 너무나 인간미 없는 인간과 소의 모습 아닌가? 누군가 한쪽은 죽어야 끝나는 경기, 등에 창을 꽂고 뿔로 들이받는 인간과 소의 모습, 우리의 한국적인 소의 모습에서는 전혀 없는 감정 아닌가? 소의 얼굴과 인간의 표정 또한 너무나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모습, 이중섭이 아서 메카타트의 얘기를 듣고 버럭 화를 낼만 하다.
“내 소는 싸우는 소가 아닌 고생하는 소, 소 중에서도 한국의 소이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스페인의 화가, 피카소 Pablo Picasso (1881 - 1973) 또한 소의 모습을 작품에 많이 표현했다.
지금 보니 확실히 다르구나! 그냥 같은 소라고 생각했었는데 출발이 다른 소였다. 소의 본질이라고 표현한 단순화된 소의 모습 또한 우리의 소의 모습과 전혀 다르다. 피카소의 소는 스페인에서 많이 보아왔던 투우하는 소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황소 하면 가장 먼저 떠 오르는 끔뻑, 끔뻑한 커다란 눈망울이 스페인의 소에는 찾기 힘들다.
눈,
우리는 저 눈을 통해 소의 감정을 읽는다. 눈을 통해 소와 교감한다. 우리에게는 소하면 너무나 소중하고 선한 저 눈을 빼고는 얘기를 할 수가 없다. 저 눈이 슬퍼 보이면 우리의 감정 또한 슬픈 것이리라, 우리 한국인의 감정이 저 눈에 담겨 있다. 우리가 곧 저 황소이다. 황소가 곧 이중섭인 것이다. 이중섭이 자신의 자화상을 단지 1점밖에 그리지 않은 건, 자신의 자화상이 곧 황소라 생각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가 그린 그렇게 다양한 황소의 모습이, 황소를 그린 게 아니라 이중섭 자신을 그린 것이다.
살짝 벌린 입이 무언가 말을 하는 듯하다.
과묵하고 듬직한 한 청년이 우리에게 무언가 말을 거는 듯하다. 이건 말 못 하는 동물이 아니다. 자신의 감정과 메시지를 입을 통해, 얼굴 표정을 통해, 온몸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너무나 친근해 보이는 우리 가족의 모습, 우리의 모습, 우리 한국인의 모습이다.
굵은 선의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선 하나 하나에 힘의 강약이 느껴져, 힘찬 소의 역동성이 더 느껴진다. 소의 감정이 더 느껴지는 이유 또한 이 굵은 선에서 느껴지는 손 끝의 감정이 고스란히 소의 모습에 표현되어 있기 때문인 듯하다. 이중섭이 어렸을 때 고향인 평안남도에서 고구려 고분벽화가 많이 나왔었는데, 그 벽화의 그림에 인상을 받고, 그의 그림에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한다. 휘갈겨 쓴 듯한 한 폭의 필체를 보는 듯하다. 우리 수묵화의 붓터치를 소의 라인 하나하나에 담아내었다. 하늘로 솟구치는 뿔, 인간의 머리처럼 붓을 범벅 거리며 표현한 황소의 머리, 옆으로 삐친 듯이 표현하여 머리의 움직임을 표현한 귀, 붓의 놀림 하나하나가 예술이다.
이건희 컬렉션 2,
이중섭 사후 1972년 개인전과 1975년 출판물에 잠깐 보였다가 그동안 실물을 볼 수 없었던 희귀 작품으로 알려져 있던 ‘흰소’ 작품이 이번 이건희 컬렉션 작품으로 깜짝 세상에 알려졌다. ‘흰소’ 라 하여 ‘백의민족’인 우리 한국인의 모습을 전쟁 이후 힘들어하는 소의 모습으로 비추어 그린 게 아닐까 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조금은 앙상해 보이는 몸으로 힘겹게 걸어가는 뒷모습을 표현하고 있고, 그에 반해 하얀 붓터치의 흩날림으로 표현한 힘찬 꼬리의 흔들림은 아직 이 소가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살짝 고개를 돌려 뒤돌아 보고 있는 소와 눈을 마주쳤을 때, 아, 너 역시 우리 한국인의 소이구나.
이건희 컬렉션 3,
1950년 6.25 전쟁 때, 북한 원산에서 폭격을 피해 제주도로 내려와 지낼 때 그린 작품으로 추정된다. 1955년 미도파화랑 개인전에서 발표된 것으로, 1959년 개인전 이후 행방을 알지 못하던 작품이었는데, 이번 이건희 컬렉션의 작품으로 발표되어 모두를 다시 한 번 깜짝 놀라게 했다.
추운 겨울날 제주도 바닷가에 눈발이 휘날리는데 물고기들은 물 위로 튀어 오르고 새들은 하늘 위로 날아오르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춤을 추듯 어우러져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천진난만하게 인간과 동물이 함께 놀고 있다. 어디서도 전쟁통 피난의 어려움은 찾아보기 힘들다. 피난의 어려움 속에서도 즐거움을 놓치지 않는 모습이다. 피난으로, 가난으로 힘든 시기였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함께 지냈던 너무나 소중하고 즐거웠던 시간이었음을 바닷가의 추억으로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이다.
1955년 대구 미공보원에서 열린 이중섭 개인전에서 미공보원장 아서 메타카트 Arthur McTaggart (1915 - 2003) 이 3점을 구매해 뉴욕 모마 MoMA 에 기증하면서 한국인 최초의 모마 MoMA 미술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 당시 양담배를 싸고 있던 은박지를 못, 송곳 같은 날카로운 도구로 긁고 그림을 그린 다음에 물감을 전체적으로 바르면 긁힌 그림들 사이로 색이 들어가게 된다. 그런 다음 전체 색을 닦아내면 위와 같이 긁힌 부분만 색이 남는 ‘은지화’ 가 된다.
화장실에서 시작한 은지화,
이중섭과 친한 친구였던 화가 한묵이 얘길 하길, 6.25 피난 시절 부산 남포동에서 같이 무대장치 일을 한 적이 있는데, 어느 날 이중섭이 화장실에서 일을 보는데 무심코 옆에 굴러 다니던 못으로 담뱃갑 은박지 위에 그림을 그려봤다고 한다. 그 후에, 주위의 사람들에게 담뱃갑을 전부 달라고 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중섭의 은지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 이후 약 300여 점의 많은 은지화를 그렸다. 가난해서 그림 그릴 종이, 도구를 살 형편이 안 되어 은지화를 그렸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한시도 손을 멈출 수 없었던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이 일상의 못, 은박지, 엽서 까지도 새로운 시도, 새로운 작품에 대한 도구로 활용하지 않았을까?
끌어안고 있는 두 아이를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 헤어지기 싫어서 꼬옥 안고 있는 두 아이의 모습이 이중섭과 가족의 헤어지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오른쪽 위의 ‘대향’은 이중섭의 호이다.
1952년 7월 일본으로 간 가족과 헤어져 지낸지 거의 2년여 즈음, 이중섭이 헤어져 있는 아들 태현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려진 그림으로, 이 그림만 따로 그린 작품도 있다. 편지 속 내용은, ‘엄마, 태성 군, 태현 군을 소달구지에 태우고 아빠가 앞에서 황소를 끌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함께 가는 그림을 그렸다. 황소 군의 위에는 구름이다.’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힘들었던 가난, 혼자만의 외로움, 짧은 생애, 사후에 더 빛을 보는 화가 등 이러한 이유로 이중섭을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와 많이 연결하여 연상하곤 하지만, 그냥 이중섭은 이중섭으로 기억하고 싶다.
소달구지를 타고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는 가족의 모습을 전쟁통의 힘들고 절망적인 모습이 아닌, 너무나 밝고 경쾌하고 행복한 가족의 모습으로 그려냈다. 평화의 새를 날리고, 꽃을 따서 가지고 놀고 있는 아이들, 그 사이에 웃으면서 아이들이 달구지에서 떨어질까 몸을 잡고, 다리를 잡고 케어하고 있는 엄마, 앞쪽에서 쇠줄을 잡고 너무나 즐겁게 춤을 추듯이 한 손을 하늘로 치켜 세우며 달구지를 이끌고 있는 아빠, 아빠의 손 끝에서 희날리는 구름, 경쾌하게 가족을 실어가고 있는 노란 황금 소의 모습, 보는 내가 다 즐겁다. 가족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즐거운지, 가족과 헤어져 있는 이중섭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아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꽃, 새, 구름, 그리고 황금 소, 여기서도 이중섭의 ‘황소’ 를 만나는구나.
같은 듯, 다른 또 다른 황소 작품이다. 전문가도 구별이 쉽지 않아, 이건희 컬렉션 작품이 이 황소로 오인되기도 했다. 무엇이 다른 걸까?
이렇게 비교해서 보니 확연히 다른 황소의 모습이다.
이빨 2개가 보이고 안 보이고의 차이, 뒤의 붉은 배경이 세로 방향, 가로방향의 차이, 또한 황소의 모습이 더 몸집이 있고, 날씬하고의 차이 등이다. 누군가는 오른쪽의 소가 더 젊어 보인다고도 한다.
당신은 어느 황소가 더 마음이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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