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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도슨트북 Sep 04. 2021

이건희 컬렉션,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박수근 Park Sookeun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전시회.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뉴시스


박수근 Park Sookeun

절구질하는 여인  The Woman Who Crushes

1954

Oil on Canvas

130 x 97 ㎝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제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출품하여 입선한 작품으로, 먼저인 1936년 제15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출품하여 입선한 수채화 그림인 ‘일하는 여인’ 이 있다.


일하는 여인, 1936, 수채, 박수근 / 절구질을 하는 여인, 1954, 캔버스에 유채, 박수근





박수근 1914 - 1965

박수근 1914 - 1965,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국민 화가이자 가장 한국적인 서민의 화가인 박수근은 시골의 일하는 여인, 천진난만한 아이 등 단조로운 한국인 일상의 소재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정감 있게 잘 표현해 내는 뛰어난 화가로 일컬어진다. 어렸을 때 가난하여 정규 미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그것이 세계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독창적인 회백색의 화강암 기법으로 불리는 그만의 그림을 그려내는 원동력이 된다.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그의 그림에 대한 의지 때문인지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보는 이의 마음 또한 선해지고 따뜻함이 느껴지곤 한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 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박수근-



1914년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양구면 정림리에서 3남 3녀 중 넷째로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박수근은 7살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형편이 어려워졌다. 현재 그의 고향인 강원도 양구에 2002년 오픈한 ‘박수근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는 이유이다.


강원도 양구군 박수근미술관 Park soo-keun Art Museum


아기 업은 소녀, 1962, 34.3 x 17 cm, 박수근, 이건희컬렉션, 박수근미술관


아기 업은 소녀,

이건희 컬렉션으로 박수근미술관에 기증된 작품 18점 중 하나인 ‘아기 업은 소녀’이다. 아, 너무 좋다. 우리 어린 시절, 형제자매가 많던 그 시절 누나가 어린 동생을 엄마처럼 돌보던 그 모습이다. 우리들 놀이에도 항상 아이를 업고 나타났던 내 친구 그 소녀, 누구 하나 왜 데려왔냐고 하지 않고 당연한 모습으로 여겼으며 등에 아이 있다고 함께 못 하는 놀이는 더더군다나 없었다. 아이를 업은 포대기를 하얀 끈으로 질끈 매고, 저고리에 분홍색 치마, 검정 고무신, 손 많이 안 가게 머리를 빡빡 민 등에 업은 남동생은 뭐가 궁금한지 빼꼼히 여러 번 들쭉날쭉, 아- 우리의 모습이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옛 생각에 눈물이 핑 돈다. 바쁘다는 핑계로 현대인의 삶 속에서 잊고 있던 우리의 감정을 다시 불러내 준 화가가 고맙다. 이게 박수근 작품의 힘인 듯하다.



1921년 7살에 양구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다니면서 미술에 대한 소질을 보였으며, 12살 때 프랑스의 화가 밀레 Jean-François Millet 의 만종 (晩鐘, The Angelus) 을 인쇄물로 보고 처음 감명을 받아, ‘하느님 저도 이 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 주세요’ 라며 늘 기도하였다고 한다. 그 영향 때문일까? 그의 그림에서 유독 시골 서민의 생활모습이 많이 보이기도 하고, 그를 일컬어 ‘한국의 밀레 화가’ 라 부르기도 한다.


The Angelus 만종, 1857-1859. Jean-François Millet 장 프랑수아 밀레, Orsay Museum, Paris, bound of Alfred Chau


1927년 그의 나이 13살 때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자, 이때부터 산과 들로 그림을 그리러 다녔고, 그런 일상의 시골 농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하는 여인과 들에서 나무 캐는 소녀의 모습 등을 그리며 실력을 쌓는다. 이때의 가난 속에서 그림 그리던 경험 때문이었는지, 박수근의 작품은 값 지불을 하고 고용하여 원하는 자세로 표현하는 모델의 정면컷 보다는, 저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며 그린 뒷모습과 옆모습의 작품들이 많다. 앞모습은 전문 모델 보다는 박수근의 아내 또는 아는 동네 사람들이다. 작품을 보는 우리의 시각도 그 순간에는 함께 물끄러미 뒤에서, 옆에서 바라보는 박수근이 된다. 주제 또한 우리의 일상에서, 5일장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여인들과 아이들 모습이다.



노상, 1957, 캔버스에 유화, 박수근


아기 업은 소녀와 아이들, 1950년대, 캔버스에 유화, 박수근


1935년 유방암으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가난으로 가족과도 헤어져 살면서 ‘조선미술전람회, 선전’ 에서 몇 번의 낙선과 입선을 반복하고 춘천, 서울, 다시 춘천 등으로 옮겨 다니며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다가 1939년 그의 나이 25살 때, 아버지가 재혼하여 살고 있던 강원도 금성에 들렀다가 춘천에서 여학교를 나온 이웃집의 17살 김복순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파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귀여운 당신을 내 아내로 맞이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겠습니다.

-박수근이 아내 김복순에게 보냈던 청혼편지-


세상에 이처럼 로맨틱한 어느 화가의 청혼편지를 본 적이 있는가? 그의 진심이 전달된 것일까? 1940년 2월 10일, 강원도 금성 감리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같은 해 5월 평안남도 도청 사회과에 서기로 취직이 되어 평양으로 옮긴다. 1945년 8.15 해방이 되고, 강원도 금성으로 다시 돌아와 금성중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하여 교직생활도 하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자유사상을 지닌 화가라 하여 공산 체제의 감시와 고초를 당한다. 그 사이 1942년 첫아들 성소가 태어나고 1944년 첫 딸 인숙과 1947년 차남 성남이 태어나지만 그다음 해 첫째 아들 성소가 뇌염으로 죽고, 이내 또다시 1950년 한국전쟁의 힘든 시기를 겪게 된다.



장남 박성남, 1952, 박수근, Gallery Hyundai


6.25 전쟁통에 뜻하지 않게 먼저 남쪽으로 내려온 박수근은 약 2년간의 가족과 헤어짐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서울 창신동 큰처남의 집에서 극적으로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 만남 이후에 그린 첫 작품이 ‘장남 박성남’ 이다. 가족의 소중함을 아들의 모습으로 표현한 걸까? 다시는 헤어지지 않으리라는 의지를 아들 모습으로 표현한 듯하다. 동그랗게 깎은 이마의 머리가 너무나 귀엽다. 동그란 얼굴과 오똑한 입술이 분명 우리 아이의 모습이다.


화가의 길을 걷고 있는 박수근의 아들 박성남. 가나아트센터


1953년 지금은 신세계 백화점 본점 건물이 된 당시 미 8군 PX 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 주며 돈을 벌었다. 이때 모은 돈 35만 환으로 창신동에 조그마한 집을 마련할 수 있었고, 그는 이 작은 집 마루를 작업실로 삼아 창작에 열중하였다.



미 8군에서 초상화를 그리던 시절의 박수근, 왼쪽에서 두 번째. photo 박수근미술관


1959년 박수근의 창신동 집 마루에서. 오른쪽 박수근, 왼쪽 아내 김복순과 딸 인숙.


이 미 8군 PX에서 지나가는 미군들에게 가족이나 애인 초상화를 주문하라고 꾀하는 점원을 만났으니, 그녀가 바로 소설 ‘토지’의 작가 박완서(1931~2011)이다. 그때는 그들도 서로 한국 문단의 큰 별과 한국 화단의 큰 별이 될 줄 몰랐으리라.



박완서 1931 -2011, 박완서 첫 소설 ‘나목’, 열화당



박완서와 박수근,

박완서의 첫 작품인 ‘나목 裸木 (1970)’ 에서 작품 속 ‘옥희도’ 라는 화가가 박수근을 모델로 한 캐릭터이다. 박완서에게 박수근은 특별한 사람이었던 것일까? 또 다른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1995)’ 에는 박수근이라는 이름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나목’ 은 잎이 지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를 뜻하는 의미로, 소설 속 주인공 경아가 알고 지내면서 옥희도에게 이성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이후 시간이 흘러 경아도 다른 이와 결혼하고 아이도 생긴다. 옥희도가 일찍 죽은 후 열린 유작전에서 경아는 ‘나무와 두 여인’ 이라는 그림을 보게 된다.



나무와 두 여인, 1962년, 캔버스에 유채, 박수근


가지만 앙상한 나목을 가운데 두고 왼쪽에는 아이를 업은 옥희도의 아내로 보이는 여인과 오른쪽에는 머리에 짐을 이고 지나가는 여인이 곧 ‘경아’가 아닐까 하는 분위기로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 그림이 실제 박수근의 그림 ‘나목과 두 여인’ 작품이다. 실제로 박수근은 간경화로 너무나 이른 나이인 51세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같은 해인 1965년 가을 10월 소공동 중앙공보관에서 79점의 작품이 전시된 유작전을 열어 소설의 이야기로 그려진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나목은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박완서, '나목', 열화당-


미 8군에서 근무할 때도 국전에는 꾸준히 작품을 출품하였는데, 1953년 국전에 출품한 ‘집’이 특선, ‘노상에서’가 입선, 1954년 국전에서는 ‘풍경’, ‘절규’가 입선 등으로 출품에만도 시간이 부족하여 PX 일을 그만두고, 자신의 작품에만 전념한다. 이 시기 때 그렸던 작품부터 박수근의 독창적인 기법이 표현되기 시작한다. 단순화한 소박한 주제, 굵고 명확한 검은 윤곽선, 흰색, 회색, 회갈색, 황갈색, 원근감이 없는 평면적 색채 등의 박수근 기법이 발전되어 가기 시작한다.


노상, 1955, 캔버스에 유채, 박수근


박수근의 화강암 기법,

이 오돌토돌한 느낌의 기법은 어떻게 완성된 것일까? 보통 박수근의 작품 설명을 보노라면, ‘마티에르’ 라는 표현을 많이 한다. 프랑스어로 ‘마티에르 Matière’, 영어 Material 로 ‘재질, 질감’ 이라는 의미로, 박수근 작품의 거칠고 오돌토돌한 독특한 표현 기법을 말한다. 1950년대 중반부터 가난하지만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며, 신라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박수근은 경주 남산과 신라시대의 유적지들을 찾아 신라의 석조와 기와, 마애불과 석탑 등을 탁본하면서 깊은 감동을 받는다. 이 화강암 느낌을 어떻게 자신의 작품에 적용할까 깊이 연구한다. 그의 호가 ‘아름다운 돌’인 ‘미석 美石 박수근’ 임이 우연이 아님을 나타내 준다.


왼쪽 석도륜, 오른쪽 수렵문전(프로타주, 문질러서 옅게 칠하는 기법), 박수근


이 거친 화강암의 울퉁불퉁한 표면에 그림을 그리듯이, 유화를 전체적으로 한번 바르고 말리고, 다시 그 위에 바르고, 말리고 여러 번의 반복을 통해 겹겹이 쌓아 올린 두툼한 느낌의 표면 질감을 만들어내고, 굵은 검정을 가지고 돌에 그림을 새기듯이 그렇게 완성해 나간다. 바위에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저녁 찬 바람에 뜨거운 낮 바람에 비에 젖고 맑게 개고 오랜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담고 있는 자연 바위 위의 그림을 그린다.


나는 그림 제작에 있어서 붓과 나이프를 함께 사용한다.
캔버스 위의 첫 번째 층을 충분히 기름에 섞은 흰색과 담황갈색으로 바르고 이것을 말린다.
그 다음에 틈 사이사이의 각 층을 말리면서 층 위에 층을 만든 것이다.
맨 위의 표면은 물감을 섞은 매우 적은 양의 기름을 사용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것은 갈라지거나 깨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과감하게 검은 윤곽선을 이용하여 대상을 스케치 넣는다.

-박수근의 지지자였던 미국 마가렛 밀러 Margaret Miller 여사의 1965년 글 ‘조용한 아침의 나라 화가, 박수근’ 에서 박수근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쓴 글-



절구질하는 여인, 1954, 캔버스에 유채, 박수근

절구질하는 여인,

처음 작품을 봤을 때의 답답함, ‘좀 클리어하게 그리지, 왜 이렇게 희미하게 그려서 보는 이도 답답하게 만드는 거야’ 했던 불만은, 어느새 그의 의도를 알고 보니 부끄럽다. 우리의 돌 위에 그림을 그리고픈 박수근의 바람이 확 느껴진다. 석공이 떡 주무르듯이 다뤘던 돌을 박수근은 그림으로 주무르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의 돌 위에 우리의 엄마, 우리의 아기를 새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 시절 아이를 등에 업고 무슨 일이든 다 해야 했던 우리의 엄마, 낮에는 들에 나가 밭일도 해야 하고, 때마다 새참이며 점심도 준비해야 하고, 빨래며 절구질이며 밀린 집안일도 다 해야 했던 우리 엄마의 모습이다. 하얀 저고리에 어두운 치마, 검정 고무신, 하얀 앞치마에 등에는 아기를 포대기로 업고, 절구통을 힘껏 잡은 손, 쪽진 머리에 얼굴을 단순화해 우리 모두의 엄마로 그려 놓았다.


아, 핑크색 옷을 입고 있는 우리 아기, 이 돌에 핑크색을 그려 놓았다. 너무나 아름답다. 핑크색 분필로 돌 위에 색을 입혀 놓은 듯하다. 무채색 일색일 것만 같은 돌 위에 이렇게 색을 입히니 너무나 좋다. 머리에는 춥지 말라고 하얀 모자를 씌워 놓았다. 엄마 등에서 아기는 물끄러미 우리를 쳐도 보고 있다. 우리 아기, 그 아이가 바로 우리이다. 이렇게 커버린 우리이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나더러 똑같은 소재만 그린다고 평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의 생활이 그런데 왜 그걸 모두 외면하려 하나

-박수근-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 국립현대 미술관


농악,  1960년대, 162 x 97㎝, 캔버스에 유채, 이건희컬렉션, 국립현대미술관
유동 (遊童, 길에서 노는 아이들), 1963년, 96.8×130.20㎝, 캔버스에 유채, 이건희컬렉션, 국립현대미술관
2007년 5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45억2000만원에 낙찰된 빨래터, 1950년대, 박수근,   위작 논란에 휩싸여 2년 재판 끝에 위작은 아니라는 판결을 받아낸 작품.






인생에서 한 번은 예술이 주는 기쁨과 위안을 받아 보시길 바라는 작은 바람입니다. 본 저작물에 인용된 자료의 저작권은 해당 자료의 저작권자에 있음을 알립니다. 본 저작물에 인용된 자료의 게시 중단 등을 원하시면 shaan@daum.net 로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즉시 삭제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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