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 Chang Ucchin
장욱진 Chang Ucchin
나룻배
1951
판지에 유채
14×29㎝
6.25 직후 장욱진의 아내가 도움을 주던 친구에게 고마움으로 이 그림을 선물로 줘서 장욱진이 크게 화를 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작품의 뒷면에는 1939년의 작품 ‘소녀’ 가 그려져 있다. 재료가 부족해서 캔버스를 쉽게 구하지 못했던 시기라, 6.25 피난길에도 장욱진이 늘 안고 다녔다는 ‘소녀’ 작품 뒷면에 ‘나룻배’ 작품을 그린다. 안타까운 시대상을 보는 것 같아 더 애정이 간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또한 반 고흐가 1887년 경제적으로 어렵던 파리에서 캔버스 사기가 쉽지 않아, 그 전인 1885년에 네덜란드 뉘넨 Nuenen 에서 그린 ‘감자 깎는 여인’ 작품 뒷면에 그렸다.
Left: 밀짚 모자를 쓴 자화상 Self-Portrait with a Straw Hat, 1887, Vincent van Gogh, Metropolitan Museum, New York
Right: 감자 깎는 여인 The Potato Peeler, 1885, Vincent van Gogh, Metropolitan Museum, New York
장욱진 1917 - 1990,
장욱진은 집, 가족, 자연 등과 같은 일상적 이미지의 아이콘을 정감 있는 형태와 뛰어난 색감으로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화폭에 그려내어 누구나 공감하게 만드는, 한국 미술사에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한 화가이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로 손꼽힌다.
나는 심플하다.
이 말은 내가 항상 되풀이해서 내세우고 있는 나의 단골말 가운데 한마디이지만
또 한 번 이 말을 큰 소리로 외쳐 보고 싶다.
‘나는 깨끗이 살려고 고집하고 있노라.’
-장욱진, ‘강가의 아틀리에’ 책에서-
술만 먹으면 입버릇처럼 했다는 그의 말 ‘나는 심플하다’ 처럼, 작품도 군더더기 없이 심플하다. 하지만 비어있지 않다. 심플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심플함은 단순함뿐만 아니라 순수함, 수수함, 절제미, 겸손함, 본질성 등을 함께 담고 있는 심플함이다. 그 심플함에 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절제가 있었을까? 작품과 작가의 삶은 하나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던 장욱진은 그의 삶 또한 심플하게, 깨끗하게 살려고 했다. ‘오직 그림 그린 죄밖에 없다’ 던 장욱진을 가리켜 ‘두 손에서 붓만 빼앗으면 그 자리에 앉은 채 빳빳하게 굶어 죽을 사람’ 이라고 말한 전 국립박물관장 김원용 교수의 말이 공감이 간다.
아버지는 팔을 뻗어 그리는 건 불편하고 친밀감이 없다고 하셨어요.
손 안에서 갖고 놀기 좋을 정도의 작은 크기를 선호하셨죠.
-장욱진의 장녀 장경수,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이사-
장욱진의 작품을 처음 접하면 생각보다 작은 크기에 놀란다. 우리가 보통 일반적인 작품 사이즈로 라고 하는 10호(45.5×53㎝) 보다 더 큰 그림은 그리지 않았다. 늘 방바닥에 무릎을 세우고 쪼그리고 앉아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에서 앉아 있는 사람의 모습은 거의 그인 경우가 많다. 서양화가들처럼 이젤에 캔버스를 세워 놓고 그리는 건 잘 맞지 않았다고 한다. ‘작은 그림이 친절하고 치밀하다’ 라고 생각한 장욱진은 그 작은 사이즈에 놀랍도록 치밀하고 밀도감 있게 하나하나 그려낸다.
또한 장욱진의 그림에는 유독 4개가 많다. 날아가는 새도 4마리, 서 있는 나무도 4그루, 사람도 4명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숫자 ‘4’가 ‘죽을 사 死’ 가 연상된다고 하여 싫어하지만 장욱진은 넷이야말로 가장 적은 숫자로 가장 조형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숫자라 말한다. 나란히 넷 1111, 하나와 넷 1 111, 둘과 둘 11 11, 셋과 하나 111 1 과 같이 다양하게 보여줄 수 있는 넷의 조합, 아- 그의 작품이 얼마나 많은 고민과 생각 끝에 도달한 본질의 심플인지 여지없이 보여주는구나.
1917년 옛 충청남도 연기군 연동면 송용리, 지금의 세종시 지역에서 4형제 중 차남으로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세종시가 ‘장욱진 생가 복원과 기념관 설립’ 을 추진하고 있는 이유이다. 이후 아버지가 전염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고모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학교를 다닌다. 호랑이 같은 고모는 공부는 안 하고 그림에 몰두하는 어린 장욱진을 야단치곤 했는데, 보통학교 3학년 때 ‘전국 소학교 미전’에서 일등상을 받으며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고 한다. 1930년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복중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미술반 활동을 하면서 그림에 열중하다가, 일본인 역사 교사의 공정치 못한 처사에 항의하다 퇴학당하고 1936년 체육 특기생으로 양정고등보통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학한다. 다음 해인 1937년 그의 나이 21살 때 ‘제2회 전국학생미전’에 출품한 ‘공기놀이’가 최고상인 사장상과 중등부 특선상을 수상하여, 상금으로 그 당시 거금인 100원을 받아, 고모에게 비단 옷감도 사드리고 해서 이젠 그림을 그려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냈다고 한다.
아,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 시골 골목 어딘가에서 한 번은 마주쳤을 것만 같은 장면이다. ‘공기놀이’라고 하는데 정작 공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누구 하나 의심 없이 공기놀이를 하고 있구나 생각한다. 앉아서 공기놀이를 하는 소녀들의 얼굴 묘사가 없다. 하지만 모두들 신나게 공기놀이를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생략된 표정이 우리를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왼쪽의 동생을 포대기에 업고 서 있는 소녀의 모습이 그 시절 엄마, 아빠는 일 나가고 누나가, 언니가 동생을 돌보던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다. 나도 하고 싶은데, 하는 표정이다. 장욱진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들이 쉬면서 공기놀이하는 모습을 보고 그렸다고 전한다. 전체적으로 어렵던 시기에 우리 누나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눈물이 난다.
장욱진의 초기 작품으로, 이 시기에는 다작을 하여 캔버스 틀을 떼어내고 천만 쌓아도 어른의 허리까지 닿을 정도로 그림을 그렸는데, 전쟁 이후에 거의 다 소실되어 귀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이 작품을 그린 후, 장욱진은 이 작품을 좋아했던 화가 박상옥에게 건네고, 박상옥이 1968년 사망 후 유품을 정리하던 아들이 아버지의 작품이 아닌 듯하여 인사동에 가서 확인해 본 결과 장욱진의 작품인 것으로 알게 된다. 아들이 이 작품을 장욱진에게 가져가 원래 찍혀있던 도장이 흐릿해져 다시 사인을 받고 이후 이건희 컬렉션으로 들어간 것으로 추정한다.
1939년 일본 도쿄의 제국미술대학(지금의 무사시노 미술대학) 서양학과에 입학하여, 다음 해에 선전(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소녀’가 입선한다. 1941년 역사학자이자 정치가인 이병도의 맏딸인 이순경과 결혼도 하고 1945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약 2년 근무하지만 이내 관두고, 1948년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등과 함께 사실을 새롭게 보자는 ‘신사실파’를 구성하여 활동한다. 1950년 6.25 전쟁으로 부산으로, 다시 고향인 충남 연기로 피난민으로 옮겨 다닌다.
전쟁통에도 아끼고 다니던 ‘소녀’ 작품 뒤에 그린 작품이다. 장욱진이 어렸을 때 봤던 강나루 나룻배의 모습을 너무나도 경쾌하고 밝게 그렸다. 이걸 어떻게 암울하고 힘든 피난민 시절에 그린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힘들었던 그 시기 우리에게 희망을 그려 주고 싶었던 걸까? 옛날의 평온했던 일상을, 전쟁이 끝나고 언젠가 다시 올 일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우리 가족의 살림밑천이자 가족으로 우리와 늘 함께했던 황소, 가방 메고 읍내 학교에서 돌아오는 남동생, 오일장에 닭을 사 들어오는 새색시,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있는 울 엄마, 자전거 타는 동생, 노 젓는 나룻배 아저씨, 그 작은 배 안에 우리 인생을 다 담았다. 파란 강물이 우리의 희망이다. 지금 봐도 아련한 추억인데, 그 피난민 시절에는 얼마나 되찾고 싶은 일상이었을까? 그 어렵던 시대에 우리의 화가 장욱진도, 이중섭도 역설적으로 참 밝은 희망을 많이 그렸다. 이 세상에 이렇게 경쾌하고 밝은 피난민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같은 피난민 시기인 1951년에 장욱진이 그린 ‘자화상’ 작품도 전쟁통에서는 도저히 만나기 쉽지 않은 황금빛 들녘을 걷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참 역설적인 표현이라 더 아련하다.
1954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대우교수로 취임하지만 약 7년 후 1960년, 미술이라는 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에 교수직을 관두고, 경기도 양주 덕소에서 홀로 12년(1963∼1975), 가족과 함께 서울 명륜동에서 4년(1975-1979), 아내와 둘이 충북 수안보에서 5년(1980∼1990), 경기도 용인 신갈에서 4년(1986∼1990)을 옮겨 다니며 자연 속에서 예술을 불태우고 야인처럼 우리 곁을 떠났다. 2008년 용인 신갈의 장욱진 가옥이 우여곡절 끝에 국가 등록 문화재로 등재되고, 2014년에 양주시립 장욱진미술관이 개관되어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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