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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도슨트북 Sep 24. 2021

이건희 컬렉션, 폴 고갱의 파리에서의 센강

Paul Gauguin 폴 고갱


Paul Gauguin 폴 고갱

Untitled 무제 (The Seine in Paris 파리의 센강)

1875

114.5×157.5cm


이건희 컬렉션에서는 ‘Untitled 무제’로 발표되었으나, 또 다른 제목으로는 ‘파리에서의 센강 The Seine in Paris’ 또는 ‘ 센강변의 크레인 Crane on the Banks of the Seine’ 또는 ‘이에나 다리와 그르넬 다리 사이의 파리 센강 The Seine in Paris between the Pont d’Iéna and Pont de Grenelle’ 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1875년 고갱이 그린 후, 그의 아내 메트 소피 가드 Mette-Sophie Gad 가 소유하고 있다가 덴마트 코펜하겐에서 컬렉터인 윌리엄 룬드 William Lund 에게 판매되고, 이후 뉴욕으로 건너가 1980년 개인 컬렉터에게 판매된 기록으로 남아 있었는데, 그 이후 이번에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된 걸로 발표되었다.  1875년 비슷한 시기에 고갱은 비슷한 구도의 작품을 몇 점 더 그린다.


이에나 다리에서의 센강 The Seine at the Pont d'Iena, 1875, Paul Gauguin, Private Collection
파시 부두 맞은편의 센강 The Seine opposite the wharf de passy, 1875, Paul Gauguin, Private Collection
Port de Grenelle 그르넬 항구, 1875, Paul Gauguin, Private Collection






Gauguin in 1891


Paul Gauguin 폴 고갱 1848 - 1903,

프랑스 후기 인상주의 Post-Impressionism 의 대가, 20세기 표현주의 Expressionism 와 상징주의 Symbolism 미술의 대표 화가로 평가받는 폴 고갱은 우리가 잘 아는 빈센트 반 고흐와 함께 살았던 짧은 인연으로, 그의 작품보다는 반 고흐를 힘들게 하였던 인물로 더 유명세를 치르는 화가이다. 원시적인 색감, 선명한 라인, 평면적 색채 사용, 사실과 상상을 접목하여 그리는 종합주의 Synthetism 등 독특한 색채와 실험 미술로 이후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 등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작품인지 한 번 볼까?  


설교 후의 환상(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Vision after the Sermon (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 1888, Paul Gauguin,


고갱 작품의 특징을 잘 알 수 있는 ‘설교 후의 환상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이다. 브르타뉴 전통 의상을 입은 여성들이 설교를 듣고 난 뒤에, 성경에 나오는 천사와 야곱이 서로 씨름하는 것을 상상하는 모습을 그렸다. 일반적인 인상주의는 자연을 직접 보고 그리는 것인데 반해, 고갱은 사실과 상상을 함께 표현하는 이러한 종합주의 Synthetism 기법을 구사한다. 빨간 원색의 칼라와 원근감을 무시한 현실은 크게, 상상은 작게 표현한 부분들이 일본의 풍속화인 우키요에 うきよえ 느낌도 물씬 풍긴다. 선명한 라인과 원색적인 색채, 평면적인 색면, 검은 윤곽선등 일본 판화와 중세 스테인드글라스처럼 구획을 나눠 표현하고 하는데, 이를 구획주의 또는 클루아조니즘 Cloisonnism 이라 한다. 구도 또한 대각선을 가로지르는 소나무로 현실과 상상을 자연스럽게 나누고 있다.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을 두고, 인간과 신의 씨름, 인간과 사탄의 씨름, 천사와 사탄의 씨름 등 여러 해석이 나오는데, 이러한 여러 해석을 낳을 수 있는 상징성의 작품이다 해서 상징주의 Symbolism 라고도 한다. 자아가 강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고갱은 이러한 그림을 그렸구나, 재미있다.  


예수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과 똑같이 그려, 자신이 곧 예수다라고 말하는 듯한 고갱의 자화상. 오른쪽 뒤에도 보이는 고갱의 자화상 머그컵. Self-Portrait with the Yellow Christ, 1890 or 1891, Paul Gauguin, Musée d'Orsay, Paris 



184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외젠 앙리 폴 고갱 Eugène Henri Paul Gauguin 은 혁명의 시기인 1850년에 아버지의 저널리스트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잠시 외할머니의 고향인 페루로 떠나는데, 가는 도중에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아버지를 잃는다. 페루에 도착한 고갱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외가 친척의 도움으로 편하게 지낸다. 그의 페루에서의 이국적인 경험이 이후 새로운 미술을 선보이는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1854년 페루 내전으로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지내다가 그의 나이 14살 때 해군 예비학교에 등록하고 이후 3년 동안 배 조종사 조수로 일한다. 이러한 경험이 이후 항해로 떠난 타히티, 마르티니크섬, 마르케사스 제도에서의 생활에 도움이 된다. 


프랑스 해군 2년 복역 후, 1871년 그의 나이 23세에 파리에서 증권 거래 일을 하면서 돈도 많이 벌어 그 후 11년 동안 성공한 파리 사업가로 생활한다. 그 당시 수입을 지금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일 년 연봉이 약 1억 7천만 원 (30,000 Francs a year in 1879) 정도라고 한다. 경제적 여유도 생긴 고갱은 주말에 갤러리도 자주 들러 작품을 구매하기도 하고, 직접 간간히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초창기 인상주의의 대가인 카미유 피사로 Camille Pissarro 그림도 사고, 피사로와 함께 그림도 그리면서 친하게 된 고갱은 피사로를 통해 세잔, 드가 등 예술가 친구들과 인사도 나누게 된다. 이 시기인 1873년에 덴마크인인 메트 Mette-Sophie Gad 와 결혼해 다섯 아이를 가지며 가족을 이룬다. 하지만, 1882년 파리 주식 시장 폭락으로 고갱의 수입은 급락하고 이후 증권거래 일보다는 그림을 그리는데 전념하기로 결정한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가족이 모두 덴마크로 갔다가 고갱과 6살 난 아들만 다시 쫓겨나다시피 프랑스로 돌아와 아내와 남은 가족들과도 결국 헤어진다.  


Untitled 무제, 1875, Paul Gauguin, 이건희 컬렉션, 국립현대미술관

1875년 그의 나이 27세에 그린 작품으로, 고갱이 주식 중개상으로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을 때, 미술에 관심을 가지며 갤러리도 자주 들리고 신진 예술가들의 그림도 구매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카미유 피사로와 우정도 쌓고, 주말에 함께 그림도 그리러 다닌다. 피사로를 통해 그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과 인사도 나누고 함께 교류한다. 이후 둘은 점묘법에 대한 의견 대립으로 1886년 서로 결별한다. 이제 갓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고갱의 작품이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갱의 독창적인 작품 특징보다는 그 당시 트렌드로 시작하고 있었던 인상주의와 기존 사실주의 그림의 특징들이 파란 하늘, 둑의 풀밭, 바다 물결 표현 등에서 많이 보인다. 1871년부터 프랑스 파리는 정치, 경제, 사회, 기술 등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라 부르는 ‘벨 에포크 (Belle Époque, Beautiful Era)’ 시대로, 제2차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많은 공사와 건물들이 들어선다. 그 당시 여기저기 많이 보였던 공사 현장의 크레인과 크레인 뒤로 공장의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산업 혁명의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다.  크레인 바로 옆에는 다리가 놓이기 전 배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배 두척이 놓여 있어 산업화 전, 후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 사이를 걸어가는 엄마의 한 손 어깨에는 짐이, 다른 한 손에는 아이의 손을 잡은 뒷모습이 삭막한 산업화의 공사 현장을 인간미로 따뜻하게 적셔주고 있다. 저 뒤에 해가 지는 것으로 보아, 일을 끝내고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하늘과 땅을 가운데 크레인이 나누고, 강둑과 바다를 크레인과 배가 좌우로 나누고 있어 구도 또한 안정적이다. 편안한 일상의 풍경 사진을 한 편 보는 것 같다.



빈센트 반 고흐 vs. 폴 고갱 In 아를 Arles,

“안녕하세요, 반 고흐입니다. 1887년 11월 처음 화랑에서 고갱과 그의 작품을 보자마자 그의 매력에 흠뻑 빠졌죠. 누가 봐도 파리지앵의 멋쟁이였고, 자신감에 찬 그의 말과 행동이 잘난 척과 허풍끼도 좀 있어 보이기도 했지만, 저에게는 없는 부분이라 부러웠죠. 저보다 5살 더 많아 인간적으로도 작품으로도 배울 점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동생 테오를 통해 그림도 몇 점 사게 해서, 고갱에게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에 아마도 도움도 되었을 겁니다. 1888년 2월 파리에서의 힘들었던 생활을 접고, 남프랑스 아를로 옮겨 예술가 공동체 프로젝트를 꿈꾸고 있었는데 아무도 반응이 없었죠. 고갱만은 꼭 오게 하고 싶었어요. 테오에게 고갱만은 꼭 함께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고, 테오를 통해 고갱 빚도 탕감해 주고 정기적으로 고갱 그림을 사게 하는 조건 등으로 고갱이 아를로 오게 만들었죠. 계산적이고 현실적인 고갱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건 돈이 가장 효과적일 거라 생각했는데 먹혀 들었죠. 1888년 10월 23일 드디어 아를에 고갱이 옵니다!  

반 고흐와 고갱이 함께 지냈던 아를의 노란 집 The Yellow House (The Street), 1888, Vincent van Gogh, Van Gogh Museum

반 고흐와 고갱의 성격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반 고흐가 그린 의자. 단순하고 소박한 반 고흐의 의자와 화려하고 장식이 많은 고갱의 의자. 

Left: Gauguin's Chair 고갱의 의자, 1888, Vincent van Gogh, Van Gogh Museum. 

Right: Van Gogh's Chair 반 고흐의 의자, 1888, Vincent van Gogh, National Gallery, London


“아를에 도착하자마자 고갱은 친구 베르나르에게 편지로 ‘무척 작고 꾀죄죄한 곳’이라고 썼다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내가 얼마나 설렘으로 그를 맞이했는데요! 처음 한 달 정도는 잘 지냈던 것 같은데, 점점 시간이 갈수록 우리는 잘 안 맞았죠. 저도 제 성격이 내성적이고 가끔 잘 흥분하고 거칠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 조심했는데, 고갱은 너무나 냉소적이며 자기 주장이 강했죠. 자기애가 어마어마했어요.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친구였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건 무조건 다 못마땅했죠. 고갱이 그려준 저의 모습이에요!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해바라기를 폭삭~ 시들어진 모습으로 그려놓고, 제 모습은 힘도 없는 너무나 작은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미친놈의 알콜중독자 같은 추한 얼굴로 그려놓았잖아요! 좋아요, 제 모습은 그럴 수 있다지만, 제가 좋아하는 카페 마담인 지누 부인을 너무나 사악한 얼굴과 압센트 술병을 앞에 놓아 술에 취한 모습으로 그리고, 저 뒤의 수염 난 제 친구인 우체부 조셉 룰랭을 사창가 여자들에게 치근덕거리고 있는 바람둥이 모습으로 표현해 놓은 건 정말!!”


고갱이 그린 반 고흐의 모습. The Painter of Sunflowers (Portrait of Vincent van Gogh), 1888, Paul Gauguin

Left: 반 고흐가 그린 책 읽는 지적인 모습의 지누 부인. L'Arlésienne, Portrait of Madame Ginoux 지누 부인의 초상, 1888, Vincent van Gogh, Musée d'Orsay,  

Right: 고갱이 그린 술에 취한 지누 부인. Night Café at Arles 아를의 밤 카페(Madame Ginoux 지누 부인), 1888, Paul Gauguin, Pushkin Museum, Moscow



“1888년 12월 23일 저녁,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결국 저는 폭발했죠! 저도 제가 발작을 하고, 이후 정신을 잃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눈을 떠 보니 아를 병원에서 귀를 감싼 붕대로 얼굴이 감겨 있는 내 모습에 귀가 잘려 나간 걸 알 수 있었죠. 아마도 떠난다, 떠난다~ 입버릇처럼 떠들던 고갱이 짐 싸 놓고 나간 모습을 보고 돌아버린 것 같기도 하고… 무엇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고갱과 심한 말다툼 끝에 폭발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펜싱을 곧 잘하던 고갱이 말다툼 끝에 펜싱 검 ‘에페 épée’ 로 방어한답시고 내 귀를 친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요. 그 사건 이후로, 고갱과 함께 했던 아를에서의 9주간의 짧은 시간은 마감되었죠. 제 인생도 완전히 바뀌었어요! 고갱이 다 망쳐놓았어요!!”

 

귀 잘린 반 고흐의 초상화.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and pipe, 1889, Vincent van Gogh,  Kunsthaus Zürich




“안녕하세요, 고갱입니다. 예술가중에 저처럼 억울한 사람이 또 있을까요? 제 얘기할 때면 제 얘기보다 고흐 얘기가 더 많이 나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잖아요! 제 작품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반 고흐 얘기만 하다가 끝납니다.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귀는 반 고흐가 잘랐는데, 욕은 제가 다 먹습니다. 그 짧은 9주 동안 반 고흐와의 시간이 평생 저를 따라다닙니다. 아를로 가는 게 아니었는데… 꼭 와달라고 매달려서 한 번 가 줬는데, 그게 이렇게 족쇄가 될 줄이야… 사실 반 고흐와 있는 동안 테오에게 내 그림도 좀 더 팔고, 돈 좀 모아서 타히티 갈 비용 좀 모을 생각이었거든요. 처음 도착해서 작고 꾀죄죄한 모습에 실망했을 때 바로 돌아갔어야 했는데, 그놈의 돈 때문에…


아를에서 본 반 고흐는 파리에서보다 더 심각해 보였어요. 감정의 기복도 더 심해졌고, 그 독한 술 압센트도 입에 달고 살았죠.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건, 위생상태가 엉망이었어요. 나까지 병에 걸릴 것 같아 참을 수가 없었어요. 제가 형인데도, 제 말도 잘 안 들어요. 경제관념도 엉망이에요. 테오가 한 달에 생활비로 250프랑을 보내주는데, 같이 쓰는 공동 생활비인데도 개념 없이 혼자 다 쓰고, 사창가에 푹 빠져서 거기 다 갖다 주고… 생활을 할 수가 없었죠. 무엇보다 우리 사이에 가장 큰 문제는 반 고흐가 저에 대해 자격지심이 엄청났다는 거예요. 열등감에 사로 잡혀 있었죠. 그도 그럴 것이, 제 그림은 그래도 테오에게 보내져서 조금씩 팔리고 있었는데, 반 고흐 그림은 한 점도 안 팔리고 있었거든요. 그 자격지심이 가장 컸던 것 같아요. 저도 처음 한 달은 어떻게든 잘해 보려고 했는데, 포기했어요. 반 고흐는 그냥 혼자 살아야 해요! 사실, 저도 반 고흐에게 고마운 점이 있긴 있죠. 반 고흐의 그림을 보고 깜짝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내색은 안 했지만, 저 보다 나은 부분도 많았죠. 제 작품에 영향을 안 끼쳤다고 할 수는 없어요, 인정해요!


반 고흐를 왜 그렇게 그렸냐구요? 지누 부인을 왜 그렇게 그렸냐구요? 제가 반 고흐에게 항상 하는 말이, ‘눈에 보이는 것만 그리지 마라, 머릿속 상상을 함께 표현해라’ 였어요. 그게 반 고흐 그림과 제 그림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거든요. 이것 때문에 많이 부딪치기도 했죠. 저는 제가 생각한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제 눈에는, 제 상상으로는 그렇게 보였던 겁니다. 작가의 상상력, 인정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거짓말로 그릴 순 없잖아요? 참, 제가 아를로 가기 전, 반 고흐가 일본의 화가들이 판화를 교환하며 우정을 나누고 서로의 작업에 힘을 보내는 전통이 있듯이, 우리도 서로의 자화상을 교환하자고 하더군요. 좋은 생각인 듯하여, 저도 열심히 그려서 보내줬고, 반 고흐도 보내줬죠. 저는 제 자화상에 ‘레 미제라블,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제목도 달아서, 나 불쌍한 사람, 장발장 같은 사람이니 잘 보살펴 주길 바랬죠. 반 고흐의 자화상은, 완전 수도승 느낌의 머리도 확 밀어버린, 살도 쑥 빠져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이는 그런 모습, 아, 그때 뭔가 이상함을 알고 아를로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고갱과 반 고흐가 서로 자신의 모습을 그려 교환한 자화상. 고갱 자화상의 뒤의 인물은 고갱의 친구인 베르나르.

Left: Self-Portrait with Portrait of Émile Bernard (Les misérables), 1888, Paul Gaguine, Van Gogh Museum

Right: Self-Portrait (Dedicated to Paul Gauguin), 1888, Vincent van Gogh, Fogg Museum, Harvard University



“1888년 12월 23일 저녁, 반 고흐는 완전 미쳤어요! 잠깐 짐 정리 좀 하고, 빅토르 위고 광장을 산책하러 나갔는데 저 뒤에서 반 고흐가 면도칼을 들고 저를 뒤따라 오는 거예요. 저도 영문을 모르겠어요. 아마도 제가 떠난다고 오해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며칠 전 테오에게 왔던 편지에서 테오가 결혼할 거라는 소식에 경제적으로 심적으로 더 이상 테오의 지원을 받지 못할 거라는 극심한 불안감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무서워서 그날 저녁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호텔에서 잤어요. 다음 날 귀를 잘랐다고 하더군요. 그 잘린 귀를 사창가에서 허드렛일 하는 친구에게 줬다는데, 아마도 창녀에게 줬을 거예요.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죠? 테오에게 바로 연락하고 그 길로 아를를  떠났죠. 다시는 아를에 갈 일은 없을 겁니다. 반 고흐가 제 인생을 망쳐 놓았어요! 제가 뭘 잘못했죠?”


고갱에게도 반 고흐의 귀 사건은 트라우마였던 것으로 보이는, 고갱이 만든 주전자 모양의 자화상. 귀가 없고, 유약을 피처첨 흘러 내리게 표현. Jug in the Form of a Head, Self-portrait 머리 모양의 주전자, 자화상, Gauguin, 1889. Kunstindustrimuseet, Copenhagen.





tahititourisme.kr


타히티 Tahiti,

고갱은 타히티를 두 번 방문한다. 첫 번째는 반 고흐와의 아를 생활 이후인 1890년 유럽 문명이 닿지 않은 이상적인 원시의 모습 타히티를 그려 새로운 미술로 파리에서 그림을 팔아 보고자 갔는데, 도착하자마자 프랑스 식민지로 유럽화 되어 있던 또 다른 프랑스 땅, 타히티 모습에 크게 실망한다. 두 번째는 3년간의 타히티 생활 후 파리로 복귀했지만 뜻대로 그림이 잘 팔리지 않자, 1895년 다시 타히티로 향한다. 그림보다는 방탕한 생활과 건강 악화, 빚 독촉에 힘들어하던 차에 결정적으로 1897년 4월 너무나 사랑했던 딸 알리느 Aline 가 폐렴으로 죽었다는 소식에 고갱은 심한 우울증 증세를 보이며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는데 그 전에 유작처럼 그린 작품이 우리의 인생에 관한 고갱의 대작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작품이다. 고갱의 자살은 미수에 그치고, 약 5년을 더 산 후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한다.


지금까지 그렸던 그 어떤 것보다도 뛰어날 뿐 아니라,
앞으로도 이를 능가하거나 비슷한 작품은 결코 그릴 수 없다고 믿네.
나는 죽음을 앞두고 모든 열정을 쏟아 최악의 조건에서 고통받으며 정열을 불태워 이 작품을 그렸어.

-폴 고갱의 편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1897, Paul Gauguin, Museum of Fine Arts, Boston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는 우리 인생을 한 편의 파노라마로 표현하였다. 오른쪽 끝의 검은 개가 우리 인간의 인생 전체를 바라보듯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이 검은 개를 고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어린 갓난아이 주위에는 타히티 섬 전통의 공동 육아를 따르는 세 여인이 있고, 가운데에는 서서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를 따는 우리의 욕망과 원죄를 그려 놓았으며, 오른편에는 한 인생을 산 늙은 노인이 괴로워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앞 줄은 모두 원시의 옷을 벗은 모습이고, 뒷 줄은 문명화되어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다. 뒷 줄의 왼쪽에는 타히티에서 죽음의 여신이라 부르는 ‘히나’ 조각상이 놓여 있고, 그 바로 옆에 고갱이 너무나 사랑했던 죽은 딸 알리느가 보인다. 오른쪽의 옷을 입은 문명화된 여인 둘과 바로 앞에 옷을 벗고 앉아있는 원시의 여인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왼쪽 위 귀퉁이는 그림을 살짝 벗겼더니 뒷면에 황금색 바닥이 드러나 듯 프랑스어로 ‘D' où Venons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Nous Que Sommes 우리는 무엇인가 Nous Où Allons Nous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라는 작품명이 쓰여 있다. 오른쪽 반대편 황금색 귀퉁이에도 ‘P. Gauguin 1897’ 이 들쳐져 있다. 상상력과 표현력이 어머어마한 화가였구나. 나쁜 남자, 고갱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그에 대해 갑자기 미안함이 밀려온다. 




작품 제목이 너무나 센스 있는 ‘언제 결혼하니?’. 2015년 2월 중동 카타르 왕가에게 약 3억 달러(3,272억여 원)에 팔린 것으로 알려진 작품. Nafea Faa Ipoipo: When Will You Marry?, 1892, Paul Gauguin, Kunstmuseum in Basel, Switzerland



영화 '고갱', https://youtu.be/ygOpHblxj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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