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자연의 품속에서
달리고 싶다면

몽골의 하르호린

by 경험주의자


몽골은 2011년 입사 후 첫 휴가를 보낸 나라다. 의미 있는 첫 휴가의 장소로 ‘몽골’을 택한 이유 세 가지. 첫째, 양쪽 주말을 붙이더라도 최대 9일의 길지 않은 휴가를 쓸 수 있었으므로 비행시간이 짧은 곳에 가고 싶었다. 둘째, 오랜만에 학생 때처럼 모험하는 듯 진짜 배낭여행을 하고 싶었다. 셋째, 광활한 벌판에서 말을 타고 달리면 그동안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모두 날려 보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팀 내 유일한 여자 신입사원으로서 철은 덜 들어 있었고, 군대식 조직 문화를 버거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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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배낭여행 컨셉이었기에 휴대폰, 노트북과 같은 통신 기기는 두고 (철없는 신입 사원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론리플래닛’ 한 권에 의지하기로 했으며, 여행 루트도 정하지 않은 채 집을 나섰다. 그 후 짧은 휴가인 경우 일정과 루트를 어느 정도 정하고 움직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이처럼 엉성하고 즉흥적이었기에 기억에는 더 오래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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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에 도착한 첫날 밤, 다음 날 어디로 갈까 몇 곳의 후보지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몽골 제국의 첫 수도이자 버스로 6시간 정도 떨어진 ‘하르호린’에 가기로 결정하고 잠들었다. 아날로그 방식으로는 버스 시간을 알 길이 없어, 다음 날 무작정 아침 일찍 8시에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으나 결국 11시 버스를 타고 출발해야 했다. 창 밖으로는 소와 염소 등의 가축들과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고, 옆자리에 앉은 열다섯 살의 아기 엄마와도 몽골어 회화 책을 꺼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약 여섯 시간을 달려 하르호린에 도착, 버스가 떠나고 광활한 초원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이니 저 멀리 지평선에서 몽골제국의 기마병들이 말을 타고 달려올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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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을 ‘가축이 사는 땅에 사람들이 끼어 사는 나라’라고 한다. 사람이 살고 있는 흰색의 게르가 드문드문 떨어져 있었고, 가축들은 답답한 우리 속이 아닌 온 세상을 자유롭게 뛰어놀고 있었다. 동물과 사람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사는 풍경과 순박하게 미소 짓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따뜻해졌고, 정겨운 소 똥 냄새와 바람에 묻어나는 오랜 역사의 향기도 가슴을 설레게 했다. 심호흡을 하면 폐까지 깨끗하게 청소되는 듯한 상쾌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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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밤이 되어 '별'을 보기 위해 게르의 문을 열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깜깜한 어둠 속에서 작은 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날씨가 흐렸던 걸까. 기대했던 것처럼 쏟아지는 별은 볼 수 없었지만, 그동안 도시의 빛 공해로 피로가 누적됐던 심신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촛불 아래서 일기장에 올라온 벌레 한 마리를 벗 삼아 펜을 들다가 조용히 침대에 누웠다. 그날 밤, 나는 완전한 어둠에 압도된 근사한 기분을 느끼며 모든 생명체들이 잠을 자는 진짜 밤하늘 아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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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말을 타고 초원을 달려보기로 했다. 숙소 게르의 주인이기도 했던 가이드와 차를 타고 10분 정도 달려 게르 두 채가 덩그러니 놓인 곳에 도착했다. 말 젖 짜는 모습을 구경하고 시큼한 막걸리 같은 마유주 ‘아이락’을 한 잔 마시며 쉬는 사이, 드디어 내 말을 앞에서 끌어줄 말 한 마리와, 하루 종일 내 몸과 하나가 되어 달려 줄 귀여운 말 한 마리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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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보기보다 높은 말안장 위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고 무서웠지만, 점차 달그락달그락 말의 움직임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니 환희의 탄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느덧 말에게 더 빨리 달리라는 뜻의 의성어인 "추! 추!"를 외치며 속도를 높이자 무아지경의 러너즈 하이가 찾아왔다. 뜨거운 태양 아래 아무도 없는 너른 초원을 거침없이 말과 함께 달리는 기분이란! 마치 온 세상이 다 내 것이 된 듯 세상의 왕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13세기 전 세계 1/4을 지배했던 몽골제국의 칭기즈칸이 사방으로 계속 달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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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확 트인 초원에 자연과 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다른 행성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것 같았다. 중간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지만 빗 속을 달리니 스릴감은 더해졌고, 전 날 제대로 씻지 못했기에 깨끗한 빗물 속에서 이색적인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어느덧 헤어질 무렵 말에서 내려 그의 따스한 체온을 느껴보고 사랑스럽게 쓰다듬어 주니, 자연과 동물을 벗 삼아 지내는 몽골인들의 순수한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뜨거운 가슴보다는 차가운 머리를 지향해가던 내게 훈훈한 온기를 불어넣어준 곳, 몽골은 대자연이 사람을 얼마나 너그럽게 만드는지 몸소 체감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 2011년 7월에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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