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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험주의자 May 25. 2021

퇴근길, 자유를 품은 바다를
보고 싶다면

한국을 떠나고 싶다면 ② 그리스의 크레타섬


세상이 내 맘 같지 않았던 날, 지친 몸으로 퇴근 한 뒤 현실이 너무 답답해서 어디로든지 순간 이동하고 싶은 날이 있었다. 그럴 때면 책장에 꽂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꺼내 읽었다. 한 귀퉁이를 접어 놓고 노란색 색연필로 밑줄 그은, 벌써 몇 번이나 펼쳐본 내가 좋아하는 구절들을 반복해서 읽고 나면 복잡했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해소되었다. 



마치 내일이란 없을 것처럼 인생을 즐기는 자유로운 주인공 ‘조르바’보다는, 끊임없이 머리를 회전하며 이성이 앞서는 화자인 ‘나’에 더 가깝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책을 읽는 그 순간만이라도 대신 해방감을 느끼고자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단 한 가지, 조르바의 자유분방한 연애관이나 여성을 비하하는 생각에는 공감하지 않는다) 어찌 됐든 스무 살 무렵 이 책을 만난 뒤부터 인생에서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고 삶은 조금이나마 단순해질 수 있었다.



한창 뜨거운 피로 팔팔했던 20대 초반에 만나 지금까지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꼽는 이 책은 어떤 배경 속에서 탄생했을까, 카잔차키스가 그의 고향을 그토록 사랑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직접 크레타 섬에 가서 그 궁금증을 풀어보기로 했다.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인 크레타 섬은 유럽 최초 문명인 ‘미노아’ 문명의 발상지이자,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와 화가 ‘엘 그레코’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 곳 공항의 정식 명칭이 바로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라클리온’ 국제공항으로서 크레타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하는지를 보여준다. 잿빛 하늘의 영국 한 도시를 경유하여 비행기가 착륙할 때쯤, 푸른 바다와 예쁜 조명을 받아 더욱 쨍하게 빛나는 파란 수영장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가 사랑하는 지중해에 위치한 나라, 그리스에 왔음이 실감 났다. 



다음 날 아침 그릭 샐러드의 재료를 사러 가는 길, 바닷바람마저 햇볕에 일광욕을 했는지 보송보송 시원한 바람이 내 몸을 기분 좋게 스쳐 지났다. 슈퍼마켓 가는 길이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니! 오이, 토마토, 피망, 페타 치즈에 레몬 즙을 뿌려 샐러드를 만든 뒤 에어비엔비 숙소 정원의 테이블에 앉아 한 입을 아삭 물었다. 지중해의 강렬한 햇살을 머금은 신선한 재료들이 마음까지 건강하게 해 주는 느낌이었다. 그 기운을 받아서였을까, 누구보다 활기차게 걸으면서 이 곳의 랜드마크인 ‘모로시니 분수’를 중심으로 시내를 구경했다. 어느덧 항구 근처에 다다랐을 때 ‘에게해’와 조우했다. 



“바다, 가을의 따사로움, 빛에 씻긴 섬, 영원한 나신 그리스 위에 투명한 너울처럼 내리는 상쾌한 비. 나는 생각했다. 죽기 전에 에게해를 여행할 행운을 누리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역), 『그리스인 조르바』, p.22



터키에서 본 이후로 다시 만난 푸른 바다 ‘에게해’, 그러나 이번에는 카찬차키스가 사랑했던 그리스의 에게해를 바로 앞에서 보니 가슴이 더욱 부풀어 올랐다. 진한 잉크를 풀어놓은 듯한 에게해 물빛은 다소 연한 부분마저 강렬한 색감을 뿜어내는데 바로 남다른 햇살이 만든 작품이 아닐까 싶었다. 영화 ‘Zorba the Greek’의 OST 음악을 흥얼거리며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한결같이 밝고 생기가 넘쳐 보였다. 하긴 이런 날씨에 우울하기도 힘들겠다. 이 곳 에어비엔비 호스트였던 ‘스타브로’는 그리스의 우울한 경제 사정을 얘기한 뒤 웃으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우리는 이 날씨 덕분에 삶이 만족스러워”



오후에는 이 곳에 온 목적인 카잔차키스의 무덤으로 향했다. 베네치아 성벽 위 한편에 나무 십자가 하나로 소박하게 자리 잡은 그의 무덤, 저 멀리 푸른 바다와 어우러진 크레타 시내의 탁 트인 전망을 바라보니 카잔차키스가 왜 그토록 자신의 고향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이토록 아름다운 땅이 오스만 제국(터키) 통치 하에 있을 때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무엇보다 자유에 대한 갈망이 컸고, 끊임없이 여행을 하면서 진정한 삶과 영혼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인가.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 성탄절 잔치에 들러 진탕 먹고 마신 다음, 잠든 사람들에게서 홀로 떨어져 별은 머리에 이고 뭍을 왼쪽,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해변을 걷는 것… 그러다 문득, 기적이 일어나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동화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역), 『그리스인 조르바』, p.137~138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그와 관련된 명소들의 외국인 방문 비율을 따져봤더니 한국인의 비율이 가장 높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평소에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자유로운 조르바를 더욱더 동경하는 것일까? 이라클리온 시내 중심에서도 동양인 조차 보지 못했는데, 느지막한 오후, 바로 이 카잔차키스의 무덤 앞에서 한국인 노부부와 커플 한 쌍을 만났다. 나 역시 조르바를 만나러 왔다가 크레타 섬에 반해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인들이 자유를 갈망하며 이 매혹적인 섬을 너무 그리워하지 않게 되길 바랐다.


☆ 2017년 6월에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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