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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 Aug 26. 2022

평화로운 저녁

남편 생일날...

   "그게 네가 사과하는 방식이야?" 그 말을 듣자마자 단숨에 답했다. "아니, 사과하는 게 아니야. 생일이라 그런 거야." 문제는 약 일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편과 나는 지금 와 보면 별거 아닌 일로 말다툼을 벌였다. 남편은 내가 제대로 일 못한다며 내 탓을 했고 나는 당신이 더 못한다 했다. 언성이 높아졌고 그 상태로 일주일째다. 핵심은 '누가 더 잘났나'이다. 그는 그가 더 잘났다 하고, 나는 내가 더 잘났다 한다. 각자가 더 맞다고 우기는 상황이라 더 이상 진전은 없다. 둘 다 서로 잘났다고 아이처럼 우기면서 싸우다니 둘 다 잘난 게 아니라 못난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가 먼저 내 탓을 했기에 나는 방어적인 자세를 취한 것뿐이라는 게 비굴한 내 변명이다.


   문제는 우리의 냉전은 끝나지 않았는데 그 중간에 남편 생일이 있다는 것이다. 생일을 어찌 지나갈지 고민했다. 그냥 모른 척할 수도 없고 생일자 우대라며 마음에도 없는 사과하고 싶지도 않았다. 고민 끝에 늘 그랬듯이 밤 12시 생일날이 되자 의무감으로 생일 축하한다면서 외식하자 했다. 남편은 그걸 내 사과로 오해하는 것 같아 사과가 아니라며 못 박았다. 생일인데도 그냥 지나치면 남편이 아닌 아이들이 두고두고 내게 말할 것 같아 외식을 택했다. 얼마 전에 받은 상품권도 쓸 겸 외식 장소를 V레스토랑으로 정했다.


   생일을 며칠 앞두고 큰 아이는 난데없이 외식할 때 택시를 타고 가자고 이야기한다. 이유를 물으니, 아빠 생일이니 운전도 쉬게 하잔다. 평소라면 아이의 발상에 미소 지었을 터지만 집안 곳곳에 서린 냉기 때문인지 기막혀하며 코웃음 쳤다. "아빠 운전하는 거 좋아하거든? 아빠가 운전하는 거 싫어한다고 누가 그래?" 단 칼에 아이 말을 잘라버렸다.

 

   생일 당일, 평소와 달리 나는 칼퇴근했고 중간에 남편과 아이들 만나서 함께 음식점으로 향했다. 내 계획대로라면 7시 40분쯤이면 저녁을 즐길 수 있을 것이었다. 아이 학교 근처에서 신호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쿵'하는 충격이 왔다. 멀쩡히 서 있던 차가 망가진 것인지, 아님 뭘까 정신도 못 차리는데 뒷 차에서 사람이 내리더니 오면서 이야기하느라 정차한 걸 못 봤다며 보험 불러 주겠다 했다.


   차 사고가 난 것을 알아챈 아이들은 "오늘 아빠 생일인데 차 사고가~~" 괴성을 질러댔다. 순간, 며칠 전 큰 아이가 생일날은 택시 타자고 한 말이 떠올랐다. 헛소리로 여기지 말고 택시 탔더라면 사고 나는 일은 피했을 텐데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아이도 그때 일이 떠올랐는지 말하려 하는 것을 뭐라 대꾸할 말이 없던 나는 모른 척했다.


   차가 부딪친 이후로 내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6개월 전에 시작되어서 거의 치료 막바지에 있는 부정맥 증상이다. 약을 먹은 지 5개월쯤 되자 부정맥 증상은 평소에는 거의 나타나질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늦은 밤, 그러니까 약효가 떨어지면 증상이 약하게 나타난다. 그러다 이번처럼 갑작스러운 충격이나 심한 스트레스가 있으면 심장이 마구 뛴다.


   내 심장은 점점 더 빠르게 일하면서 동시에 내 몸은 힘이 빠졌다. 등, 허리가 살짝 아파지기 시작하면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상태였다. 아이들은 배고프다며 눈앞에 보이는 식당이라도 들어가자 아우성이었다. 남편은 아이들 먹을 거라도 사 와야 한다며 분주히 움직이려 했다. 정해둔 패밀리 레스토랑 외에 플랜 B가 없던 나는 머릿속에서는 다른 방안을 떠올리며 초조하게 보험사 직원을 기다렸다.


   일말의 희망을 가졌던 걸까. 처음에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던 상대방은 그쪽 직원이 오자 우리가 갑자기 정차해 사고가 난 것처럼 직원에게 이야기했다. '이보세요, 지금 남편 생일이라 가족들이 외식하러 가는 길에 댁 때문에 못 가게 된 건 아세요?'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핵심만 말했다. "신호가 빨간불이었고 우리 앞에 다른 차량 있었어요." 그제야 상대방 측 과실 100%가 맞을 거라는 이야기를 보험사 직원에게 듣고 무사히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예상시간보다 훨씬 늦은 저녁 8시 반이 넘어서야 가기로 했던 패밀리 레스토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평일 늦은 저녁이라 사람이 좀 없을 거라는 나의 예상을 깨고 그 안은 거의 만석에 가까웠다. 아이 생일을 위해 모인 사람들, 가족 모임, 부부동반 모임 등 레스토랑 안은 나와는 다른 세상 같았다. 그 사람들을 바라보니 그곳에 오기 위한 나의 노력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칼퇴를 위해 출근을 일찍 하고 퇴근 후 중간에서 가족들 만나 오는 길에 접촉사고까지, 좀 많이 과도하게 표현하자면 생사의 갈림길까지 경험한 나였다. 나에 비해 그들은 아무 문제없어 보였다. 그들 사이에 자리 잡고 앉은 그 순간만큼은 나 또한 여유 있고 평화로운 하루를 보낸 사람으로 보이기를, 그날의 정신없던 모든 일들은 레스토랑에 편안히 앉아있던 나의 모습으로만 남겨지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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