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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 Dec 02. 2023

인절미

거침없이 나오는 종이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한주는 삐삐빅 거리는 소리에 복사기를 바라보았다. 종이 걸림 경보가 뜨자 한숨을 푹 쉬고는 복사기 옆 면을 열였다. 처참히 구겨져 끼여있는 종이를 보자니 꼭 자신의 처지 같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자신을 피하기 시작하는 동료들. 피한다기보다는 모르는 척한다는 게 맞는 걸까. 아니, 투명 인간 취급 한다는 게 맞는 말인 것 같다. 결제를 받으러 팀장실에 들어가도 팀장님은 놓고 가라는 말만 할 뿐 어떠한 피드백도 주지 않는다. 원래 같으면 잘했다, 다시 해라, 이건 어떻다 등 작은 것까지 이야기를 하시는 분이 요 며칠 영 이상하다. 친한 장대리에게 물어도 모른다고만 할 뿐. 장대리 마저 피하는 기분이 드니 점점 더 주눅이 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주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요 근래 사건이 있었다면 얼마 다니지도 않고 퇴사했던 신입사원과의 마찰뿐. 하지만 그건 그 사원과 자신만의 일이었기에 딱히 다른 사람들이 외면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답답한 마음에 점심시간에 장대리와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해보려 했다. 하지만 곧 점심시간이 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한주에게 밥 먹으러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참. 유치하게. 나잇살들 먹고 왕따 시키는 거야? '


한주는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커피나 한 잔해야겠다는 생각에 탕비실로 들어간 한주. 탕비실에서 옆부서 여직원 두 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소곤거리는 말이었지만 민성과 자신을 연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그리고 얼핏 들리는 말로 부담스럽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등 부정적인 이야기뿐이었다. 그 후 두 여직원은 탕비실을 나갔고 이윽고 민성과 장대리가 탕비실로 들어왔다. 한주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조금 전의 일을 민성에게 전했다.


"민성 씨. 기획부 여직원이랑 사귀죠?"


갑작스러운 질문에 민성은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다.


"아까 탕비실에서 민성 씨 얘기하길래. 그런데 민성 씨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헤어져요. 민성 씨 별로라고 흉보더라."

"흉이라뇨?"

"마음에 안 드는데 만난다는 둥, 부담스러워서 헤어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냐는 둥. 내가 있는데도 그렇게 말하는 거 보면 민성 씨 호구 잡힌 거 같아."

"정확히 듣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가 거짓말하겠어요? 딱 봐도 꽃뱀 상이구만. 헤어져 헤어져."

"관심은 감사하지만 제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다른 분들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당연하죠. 장대리야 이미 들어서 어쩔 수 없고. 장대리랑 나는 또 친하니까. 내가 비밀 꼭 지켜줄게."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민성은 탕비실을 나갔다.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한 게 당장에라도 헤어질 것 같았다.


"한주선배. 진짜 그렇게 들은 거예요?"

"그럼. 민성 씨 어쩌냐. 좋은 여자 만났다고 좋아했을 텐데."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뭐 아무튼 비밀은 꼭 지켜주세요."

"자기가 왜 그래? 자기 일도 아닌데."

"동기잖아요. 부탁드려요."


장대리는 고개를 까딱 하고는 탕비실을 나갔다. 한주는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했지만 민성은 외근을 나간 상태라 물어볼 수가 없었다. 카톡을 해서 물어볼까 하다 괜히 마음만 더 아프게 할 것 같아 장대리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정신없이 타이핑을 하고 있는 장대리에게 의자를 쭉 밀고 가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어떻게 됐어?"

"네? 저야 모르죠. 저 선배. 저 이거 1시간 안에 팀장님께 드려야 해요."

"알아. 근데 진짜 아무 말도 안 했어?"


한주는 집요하게 물었다. 사실 한주 입장에서는 자신 덕에 꽃뱀을 처리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였다. 계속 손을 움직이던 장대리는 결국 한주에게 짜증을 내고 말았다.


"선배! 저 지금 바쁘다고요. 한가하세요?"

"뭐? 아니 동기라며! 걱정도 안 돼?"

"지금은 직장이고 일을 하셔야죠. 하."


두 사람의 목소리에 사무실 안에 있던 열댓 명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장대리는 책상 구석에 있던 담배를 들고는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한주는 왜 자신에게 짜증이냐며 장대리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사무실 사람들은 멈추었던 시선을 거둬들이고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잠시 후 돌아온 장대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일에 집중했고 한주 역시 마음이 상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퇴근 후 오늘은 월에 한 번 있는 회식이라 다들 회사 근처 고깃집으로 향했다. 한주는 아까의 일이 마음에 걸려 장대리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사실 회사 사람들 중에 그래도 자신의 말을 가장 잘 들어주던 사람이 장대리였기에 불편한 마음으로 회식에 가고 싶지 않았다. 장대리는 괜찮다는 듯 미소만 살짝 지어 보이고는 얼마 전 입사한 남자 신입사원 옆으로 가 앉았다.

고기가 익어갈 때쯤 외근을 나갔던 민성도 회식에 합류했다. 아까와 달리 밝은 표정인걸 보아서는 아마도 시원하게 걷어차고 온 게 분명했다. 한주는 맥주잔을 들고는 민성과 장대리, 신입 사원이 있는 테이블로 가서 민성과 마주 앉았다.


"송익훈 사원님. 우리 회사 첫 회식 어때요?"

"아 좋습니다. 회식이 강압적이고 그럴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없고. 장대리님이랑 김대리님이 잘 챙겨주셔서 좋습니다."

"그렇죠. 이 두 분이 우리 회사에서 가장 성격 좋은 사람들이에요. 여자분들한테 인기도 많고."

"아 그래요?"


신입인 익훈은 대단하다는 표정으로 민성과 장대리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아까까지는 기분 좋게 웃고 있던 민성의 얼굴이 어두워지며 잔을 들고 다른 테이블로 가려는 듯 보였다.


"어디가 민성 씨.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했어. 어떻게 됐어?"


한껏 짜증 난다는 표정의 민성은 제 사생활이니 더 이상 관여하지 말아 달라며 다시 자리를 옮기려고 했다.


"말하는 거 봐. 꽃뱀한테 물린 거 구해줬더니."


선배! 야!


선배와 야 소리가 동시에 나왔다. 한주의 입을 막으려고 선배라고 외친 장대리와 화가 날대로 나 폭발해 버린 민성의 야 소리였다.


"야? 지금 야라고 했냐? 하늘 같은 선배한테?"

"선배? 선배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완전 미친년이구만. 꽃뱀? 누구더러 꽃뱀이래? 네가 맨날 헛소리 하고 이간질하고 어떤 말이든 부풀려 말하는 뇌피셜 쩌는 여자인 줄은 알았는데 정신 좀 차리고 살아. 너 나르시시스트냐? 내가 진짜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정신병원 좀 가봐. 여기 사람들 절반은 그렇게 생각할걸?"

"나.. 나.. 뭐? 정신병원"

"그래 정신병원. 매번 자기 말이 팩트라며 여기저기 소문내고. 자기 잘못은 하나 없고. 없는 말 지어 만들고. 누가 뭐라 하면 들었다는 둥, 봤다는 둥. 너는 끝까지 근데 사과 한마디 안 했지? 3개월 전에 나간 미정 씨. 그때 갑자기 갑상선 문제로 몸이 안 좋았는데 혼전 임신을 했다, 그 사람이 우리 과장이다 내가 들었다 내가 봤다. 그 소문 때문에 미정 씨 나간 거야. 네가 쓸데없이 헛소리 해서. 그런데 미정 씨 나가고 뭐라고 했냐? 네 말이 맞았다고. 미혼모 되니까 겁나서 나갔다며 호들갑 떨었잖아. 그때 누구 하나라도 네 말에 동조하디? 혼자 신나서 주절 거렸지? 한두 명인 줄 아냐? "


한주는 말문이 턱 막혔다. 늘 그들을 위한 말만 했고 자신이 알고 있는 말만 했을 뿐인데 나르시시스트? 이렇게 억울할 수가 있나. 한주는 다른 사람들이 도와줄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모두 냉랭한 눈빛으로 한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이렇게 당하는데 다들 왜 가만히 있어요? 내가 뭘 잘못했어요? 나는 들은 말만, 내가 본 말만 했어요."

"들었겠지. 봤겠지. 그런데 보고 들은 것만 이야기해야지. 왜 그 말에 살을 붙여. 그리고 왜 그 말이 사실인 듯 이야기해."


한숨을 푹 쉬던 팀장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한주는 그대로 얼어버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팀장님의 말에 따라 다른 사람들은 먼저 자리를 옮기기 위해 짐을 챙겨 나갔다. 그때 장대리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방을 챙기며 한주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선배. 선배 여러 명한테 고소당할 뻔했어요. 마음은 착하다고 몇 번을 막았지만 저도 이제 더는 안 되겠네요. 그때 민성 씨 만나시는 분이 부담스럽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 이유는 민성 씨가 전날 좋은 지갑을 선물했대요. 그래서 자기 때문에 돈을 많이 썼고 자신도 뭐라도 해주고 싶다 이야기하던 중이었다고 같이 있던 여직원이 이야기해 주셨고요. 어차피 민성 씨는 신경도 안 썼지만. 먼저 가볼게요."


장대리는 한주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가게를 빠져나갔다. 혼자 덩그러니 남은 한주는 여전히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한주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서 있는 팀장님 뿐이었다.


"김한주 씨. 자신이 했던 일을 찬찬히 생각해 봐요. 그런 문제들이 결국 사장님에게까지 전달이 된 상황이고. 이게 그냥 남의 이야기를 했다는 걸로 그런 게 아니에요. 한주 씨가 스스로 잘못된 점을 찾을 수 있을지......"

"잘못된 점이라니요. 저는 항상 사람들을 위해서 한 말이었고 모두들 저를 좋아했었어요. 도대체 누가 저를 이렇게 모함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하.. 한주 씨. 누가 모함한 거 없어요. 한주 씨 스스로 만든 거예요. 우선 저는 먼저 가볼게요. 다른 사람들도 그냥 파한 거 같고. 내일 회사에서 다시 이야기합시다."


팀장님은 손을 살짝 흔들어 보이고는 가게를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한주도 서둘러 짐을 챙겨 가게를 나왔다. 계속 멍하게 서 있는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엉킨 걸까. 한주는 집에 가는 내내 생각해 봤지만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집에 도착한 한 주는 회사 게시판에 익명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자신은 현재 사내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있고 누군가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걸 질투해 모함하고 있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한주의 글의 조회수는 순식간에 올라갔고 몇몇 사람들은 몰상식한 부서가 어디냐며 질타를 하는 댓글을 달았다. 한주는 그 댓글을 보면서 역시나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달린 한 댓글을 보고 한주는 더 이상 회사에 나갈 수가 없었다.


re: 이렇게 또 자신의 생각만을 가지고 글을 쓰는 걸 보니 아직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가 봅니다. 이간질, 험담 그것만이었다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의 잘못된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상처받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결국 참다 회사를 나가는 일이 벌써 7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들이 정말 잘못해서 나간 걸까요. 그들이 잘못한 건 그쪽이 듣는 곳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뿐. 여전히 모르시겠죠. 쉽게 설명해 볼게요.

A양은 생리통이 심해 병원을 찾았습니다. 알고 보니 자궁 쪽에 혹이 하나 발견되었고 수술을 꼭 해야 한다는 소견이었죠. 그래서 A양은 팀장님께 말씀드리고 병가를 내었습니다. 근데 그 이야기를 우연히 당신이 듣게 되었고 이야기는 일파만파 퍼져나갔죠. 자 보세요. 생리통 -> 자궁혹 -> 수술. 딱 이게 팩트입니다. 그런데 그쪽이 이야기 한건 뭐였을까요? 생리 불순 -> 성병 -> 매독, 혹은 에이즈 -> 수술 불가 -> 성문란 -> 성매매녀 -> 여러 번의 임신 중절로 인한 자궁 적출. 여기까지 당신이 한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내가 진짜 들었다며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었죠. 진짜 그렇게 들었습니까? 진짜요? 만약 그렇게 들었다면 당신은 망상장애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듣지 않았는데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면 당신은 악마라는 이름조차 아까운 사이코패스입니다. 그 일을 어떻게 아냐고요? 제 일이었으니까요. 수술을 하고 일주일 뒤 회사로 복직했더니 사람들이 저랑 밥조차 먹기 싫어했습니다. 아니, 한 공간에서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하더군요. 그때 당신이 내게 다가왔어요. 그리고 말했죠. 수술하느라 고생했다고. 그럼 당신은 사실을 다 알고 있었던 것 아니었나요?

사람들의 오해는 쉽게 풀리지 않았습니다. 회사를 그만 둘 생각이었죠. 그런데 그때 팀장님이 회식자리를 마련했고 저는 한 시간 후쯤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회식자리에서 팀장님이 제 오해를 풀어주셨어요. 그리고 제가 회식 자리에 갔을 때 다들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했죠. 사실 다 풀리지는 않았지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저라도 그런 소문이 들리면 확인 전에는 꺼림칙할 테니까요. 근데 당신은. 정작 소문을 낸 당신은 사과 한마디 없었어요. 자신은 그래도 저한테 말을 걸어주었고 혼자 챙겨준 멋진 사람이라며 스스로를 칭찬했죠. 솔직히 살인 충동까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을 못 먹었다며 자리에 앉아 인절미를 질겅질겅 씹어먹으며 왔어?라고 웃던 당신 얼굴. 그 얼굴이 역겨워 부서 이동도 했죠. 그런데 여전한가 보네요. 하긴 고쳐질 리가 없죠. 저 말고 당신에게 원한을 가지거나 질려버린 사람들 한 둘이 아닐 겁니다. 꼭 벌받았으면 좋겠어요. 저 누군지 아시죠? 하실 말씀 있으시면 꼭 찾아오세요. 제가 당했던 만큼 두 배, 아니 세배로 돌려드릴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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