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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로 점치는 재물운

영혼을 지키는 나만의 주식 라이프 (18)

by 김세인


8년 전쯤이었다.

남편은 책을 한 권 읽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재무설계에 관한 책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얼마 후 재무설계사를 만났다. 성실하고 차분해 보이는 이미지를 지닌 재무설계사는 어리둥절한 눈빛의 우리를 빔프로젝터가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그는 자기 소개를 한 뒤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 상담 때 필요한 서류와 정보에 대해 일러주었다. 원천징수영수증과 부부 각자 수입, 지출을 자세히 기록한 가계부를 이메일로 보내 달라고 했다.


‘모아놓은 돈이 있어야 재무설계를 하든가 하지.’


나는 바쁜 와중에 이렇게 세세하게 가계부를 적어서 남에게 보여줘야 하나 속으로 불만이 가득했다. 수입, 고정 지출, 비고정 지출, 부채 상황, 보험... 남에게 보여주려니 현실보다 축소하거나 숨기고 싶은 부분들이 있었다. 뭔가 발가벗겨지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보통 가계부에는 수입과 지출 내역을 세세히 적는다. 대출금이 있다면 대출 상환금, 보험, 그리고 수입에서 각종 지출을 뺀 현금 흐름 상황도 보인다. 그가 신혼부부인 우리에게 강조한 것이 있었다. 수입을 알뜰히 모으고, 지출을 줄이고, 자산을 늘리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


물론 누구나 알고 있다. 말로는 쉬운 그 일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현금성 여유금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긴축재정을 유지하다가도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면 예금을 깨거나 대출 또는 마이너스 통장을 쓰게 될테니 말이다. 정말 그랬다. 도련님이 갑자기 결혼을 한다고 했다. 우리는 휴가 때 해외여행도 떠났다. 경조사와 품위 유지비는 예고 없이 잔고를 비워가고 있었다. 우리가 몰랐던 통장의 실상을 그는 꿰뚫어 보고 있었다.


결혼 후 몇 년간 우리 가정경제는 마이너스였다. 새벽에 일어나 열심히 경제와 주식에 관한 공부를 하는 남편을 보며 머리 아프게 뭘 그렇게까지 하나 싶었다. 그의 책상에는 『완벽한 재무제표 읽기』가 놓여있었다. 나도 살짝 훑어봤다.


대손상각비, 당좌 좌산, 무형자산손상차손, 매출연동비, 자본잉여금...


운전자본은 또 무슨 소린가.

운전하면서 쓰는 돈이란 얘기인가. 아.. 형광펜으로 표시된 부분만 대충 훑어보고 바로 덮었다.


네이버에서 간단하게 재무정보를 보는 게 내 수준에 맞지 싶었다. 매출액, 영업이익, 부채비율 등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때 8년 전이 떠올랐다. 가계부의 수입과 지출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수입에서 지출을 뺀 현금성 자산이 바닥나기 시작할 때 다음 달 고정수입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회사의 매출액 숫자가 커졌다고, 영업이익율이 늘었다고 회사의 가치가 마냥 높아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후, 여러 가지 생각이 뒤엉켰다.


사람들은 다 나처럼 기사와 애널리스트 보고서와 방송을 보고 주식을 살까?
이렇게 주식을 사도 되는 걸까?
펀드매니저들은 어떤 근거로 주식을 매매하고 추천할까?
기업도 가계부가 있을까? 있다면 나는 거기서 주가와 관련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주식을 사는 데 기업의 재무제표 보는 법을 배워야 할까?
재무제표는 기업의 가치를 판단하는데 도움이 될까?
사업보고서를 보는 일은 나를 합리적인 투자자로 만들어줄까?



주식 초보자였던 나는 느낌적인 느낌으로 주가를 예상하고 매매했다.

주식 경력자가 되었다고 생각될 즈음에는 신문과 인터넷 기사를 보고 증권사 직원과 자주 통화하며 ‘믿습니다’를 외쳤다.

차트를 보고 52주 최고가와 최저가를 확인했다.

외국인과 기업, 개인이 얼마나 샀는지 살피고 개인의 동향과 반대로 가려고 했다.

PER, PBR과 ROE의 수치만 보고 고평가와 저평가를 판단했다.

어닝 서프라이즈 소식을 듣고 안도했으며 어닝쇼크 기사가 나면 매도를 고려했다.


증권사의 목표주가를 보고 나의 ‘희망’을 ‘전망’으로 바꿨다.


네이버에서 회사의 재무정보를 살폈다.

연도별 매출액과 영업이익, 순이익을 보고 오케이 사인을 내렸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만 받아들였다. 회사는 가계부에 부채, 유형 자산, 무형 자산, 재고, 받지 못한 외상금까지 모두 적어두었지만 나는 수입만 보고 환호했다.


법륜스님이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해서 일어나는 문제가 많다고 했거늘, 나는 무지한 채로 점점 나를 주식 프로라도 된 양 착각하기 시작했다. 일단 나는 숫자를 싫어했고 회계사와 나의 영역을 철저히 분리하려 했다.


큰 도화지에 스케치만 하고 다했다며 손을 드는 초등학생처럼. 세밀하게 그림을 그리거나 색칠하는 일은 귀찮아했다.


색칠이 필요했다. 합리적인 주식 경력자가 되려는 나는 조금씩 재무제표를 공부했다. 열정을 발휘하면 숫자와 용어들에 질릴 게 뻔하니 한 챕터씩만 책을 읽었다. 차로 이동하는 동안에는 유튜브 강의를 들었다. 네이버 재무정보에서 회사 이름을 치면 기업이 공시한 수많은 문서들을 볼 수 있었다.


사업보고서, 현금흐름표, 재무상태표를 열어보면 그 기업이 하는 일과 위험요소, 계열사 정보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다. 기업이 지속적인 영업이익을 내고 있는지, 부채와 다른 자산은 있는지, 순이익과 현금 흐름은 주가와 어떤 접점을 찾을 수 있을지 살필 수 있다.


“여보, 금융감독원 사이트는 가봤어?”

나는 공부를 조금 하고는 의기양양하게 남편에게 물었다. 질문이라기보다 재무제표가 공시된 금융감독원 사이트를 알고나 있느냐는 비아냥에 가까웠다.

“다트? 거기 안가도 돼. 네이버에서 재무제표 다 볼 수 있어.”

“사업보고서도? 그렇게 자세히는 안 나오던데?”

“PC 버전으로 보면 돼. 여기 네이버 금융에서 전자공시 들어가면 다 연결돼서 한 번에 볼 수 있지!”

“아, PC버전...”


사이트에 들어가 일일이 기업의 각종 보고서를 프린트하던 나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아는 척하려다가 되려 내 수준을 드러내고 말았다.


하나씩 용어에 대해 알아가니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처럼 새로운 세상이 열린 듯했다. 다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씩 공부한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회사의 재무제표를 볼 줄 알면 적어도 위험요소를 가진 기업에 투자할 일이 줄어들 것이고 무엇보다 단기적인 이벤트나 시황에 흔들릴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건 내가 반드시 공부해야 할 일임에 틀림 없었다.




여전히 나에게 재무제표를 보는 일은 버겁다. 보고서를 찾아 하나씩 클릭해서 꼼꼼히 쳐다보는 일이 번거롭고 익숙치 않다. 우리 집 가계부를 작성하고 들여다 보는 일도 큰맘 먹고 하는데 말이다. 재무제표가 주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는 통찰까지 가려면 나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숫자와 회계용어를 쳐다보는 일보다 흔들의자에 앉아 피천득의 수필집을 읽는 일이 세상 좋다.


그럼에도 나는 깨달았다. 재무제표를 보지 않고 주식을 투자하는 것은 기본 없이 기술을 부리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지분법까지 알려 하지 말고 투자자로서 필요한 사실만 단순화해서 볼 줄 아는 능력만 생겨도 논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애널리스트들의 친절과 노력은 교과서가 아니라 해설서라는 것을.


주식거래에 내 영혼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믿음이 있는 곳에 내 돈을 보내야 한다. 이율을 약속한 은행이 아니고서야 늘 불확실성이 따라다닌다.


그 믿음에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명료한 근거 중의 하나가 기업의 재무제표였다는 것을 주식투자를 시작하고 몇 년이 지나서야 알았다. ‘교과서만 보고 공부했어요.’라는 수험생의 말처럼 나도 재무제표 보는 법을 꾸준히 공부해보련다.




『공부란 무엇인가』의 한 구절을 생각하며.


그동안의 무식을 일거에 날려버릴 벼락같은 통찰, 일종의 인생 역전 만루 홈런을 치게 해주겠다는 약장수를 조심하라고. 공부는 산삼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고.


처음 들춰보고 바로 덮었던 『완벽한 재무제표 읽기』 책을 다시 펼쳤다. 형광펜을 들고, 밑줄을 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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