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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인 Apr 27. 2024

특별한 하루

엄마도 같이 읽어볼까

『잔소리 없는 날』.

내가 읽어본 첫 동화다. 정확히 말하면 어른이 되어 처음으로 한 장씩 페이지를 넘기며 읽어본 동화책이다. 아이에게 추천할 요량으로 적당히 훑어본 책이 아니라 내가 직접 독자가 되어 읽어본 이야기다.


여느 때처럼 책 표지를 넘겨 작가 소개를 먼저 찾아봤다. 안네마리 노르덴이라는 독일 작가다. 자신의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만들다가 동화작가가 되었단다. 


목차도 책 분위기를 살피는데 빼놓을 수 없다. 일요일 저녁, 월요일 오전, 월요일 오후, 월요일 저녁. 목차는 단순하다. 제목이 많은 것을 말해주기에 어떻게 잔소리 없는 날이 진행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책이 작고 얇아서 한 손에 쏙 들어온다. 조금만 두꺼웠어도 아마 나는 휴대폰으로 블로그 리뷰를 찾아봤을 것이다. 


첫 페이지를 펼쳤다.  

엄마의 한 손은 허리를 짚고 있고, 다른 한 손은 손가락질하듯 아이를 향해 있다. 아이의 두 손은 귀를 막고 있다. 물론 둘의 표정은 뒤에 걸린 가족사진 속 표정과 다르게 대치 상태다.  


‘푸셀은 벌써 일주일째 기분이 나쁘다.’  


첫 문장부터 단도직입적이다. 

푸셀은 엄마아빠의 잔소리 때문에 불쾌하다고 말한다. 하루 종일, 일요일까지도 계속되는 잔소리 때문에 말이다. 엄마의 대답은 내가 할만한 말과 비슷하다. 나라고 좋아서 잔소리를 하겠냐고. 그냥 두면 세수도, 숙제도 안 할게 뻔하지 않냐고. 나는 속으로 덧붙인다. 잔소리 들을 행동을 안 하면 되지 않느냐고. 아침에 일어나면 양치하고 세수하는 게 기본이며 주중에 못한 숙제를 끝내고 놀면 될 일 아닌가. 


첫 문장을 보자 아이가 여섯 살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양치해라, 세수해라’, 엄마가 그렇게 말하면 기분이 나빠진다고 했다. 똑같은 말 말고 다른 방식으로 얘기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 방법은 나의 창의성에 맡긴다는데 참 어안이 벙벙했던 기억이 났다.


푸셀은 엄마아빠에게 특별한 단 하루를 제안한다.

바로 ‘잔소리 없는 날’. 하루라도 간섭받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기회를 달라는 것이다. 엄마아빠는 위험한 일을 제외한다면 허락하겠다고 한다. 물론 약간 불안한 얼굴로 망설이며. 푸셀의 특별한 날은 바로 다음 날 시작된다.


월요일, 푸셀은 일찍 일어나 엄마와 인사한다. 


“안녕, 엄마!”

“안녕, 푸셀! 너 씻….”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엄마가 말끝을 흐리는 이 대사는 엄마가 보나 아이들이 보나 풋 하고 웃음이 나올 것이다. 이 소년은 당당하게 오늘은 세수를 안 하겠다고 선포하고 아침부터 자두잼을 퍼먹는다. 

오늘 하루 동안 어떤 신나는 일을 벌일까 고민하는 푸셀. 




나도 어린 푸셀이 된 듯 초등학생 시절로 돌아갔다. 나라면 뭘 했을까. 학교를 빠지는 대담함까지는 없으니 학원을 살짝 땡땡이치지 않았을까. 윤선생 영어 학습지 선생님이 전화 올 시간에 맞춰 친구를 만나러 밖에 나가지 않았을까. 이제부터 내 친구 생일파티엔 동생을 데려가지 않겠다고 엄마에게 으름장을 놓았을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내가 엄마라는 사실을 잊었다가도 번뜩 떠올랐다. 푸셀이 빨간 불인데도 길을 건너다 하마터면 차에 치일 뻔했을 때, 술 취한 아저씨를 집에 데려올 때, 한밤중에 집 밖을 나간다고 할 때.      


푸셀은 단 하루지만 누군가의 크고 작은 간섭과 걱정에서 벗어난다. 평소 같으면 어른들에게 잔뜩 혼났을 만한 일을 벌인다. 신나지만 살짝 겁이 나기도 하고,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되지 않아 실망하기도 했던 하루. 


나에게 이 책을 건네준 우리 집 어린이도 나에게 말했다.

나도 주말에 ‘잔소리 없는 날’ 하루를 해보고 싶다고. 안 봐도 그려지는 하루다.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 보란 듯이 양치질을 하지 않고 뒹굴거릴 것이다. 학습지는 던지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마음껏 놀자고 하겠지. 엄마가 평소에 금지한 유튜브를 클릭해 흔한 남매와 민쩌미를 볼 게 뻔하다. 젤리와 음료수를 잔뜩 먹고 라면도 끓여달라 할 거다.


나는 그 꼴을 보고 있으면 인내심을 시험해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먹고, 자고, 어딘가를 가는 일부터 친구와 노는 시간까지 아이들 입장에서는 부모님에게 허락을 구할 일이 태산이다. 


돌아보니 나의 부모님은 잔소리가 별로 없는 분들이셨다.

여름이면 나는 해가 질 때까지 고무줄놀이를 하고 놀았다. 엄마는 밤 8시가 되어 깜깜해지면 베란다에서 들어오라고 소리쳤다. 핸드폰이 없는 시절이었기에 엄마아빠가 일일이 간섭할 수도 없었다. 손이 빠른 엄마는 정리하라고 잔소리를 하기 전에 본인이 말끔하게 치우셨다. 학교 선생님인 아빠는 성적이 안 좋아도 다음번에 열심히 하라고만 하셨다. 


잔소리 없이도 나와 동생은 건강하게 자랐다.

나만 따라다니며 울던 동생은 학교축제에서 공중발차기를 선보이는 씩씩한 남학생이 되었고, 소심했던 나는 나만의 분별력을 차차 쌓아나갔다. 


엄마가 된 나는 잔소리를 안 하면 큰일이 날 것처럼 군다. 내가 하는 잔소리는 사랑의 표현이나 남편이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면 명백히 보인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군더더기가 되어버린 말들이. 주도성을 잃어버린 아이들의 사소한 일상이 짜증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나의 첫 동화 읽기는 어눌하고 낯설었다. 

하필 엄마로서 나에게 불리한 내용이기도 했다. 푸셀처럼 어린아이가 되었다가 엄마가 되었다가 양쪽에 발을 담그며 읽었다.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이 아니라 굉장히 현실적인 모험을 그린 이야기였다. 하루 동안의 해방이 푸셀에게는 어떻게 느껴졌을까. 


이 책을 읽은 아이들도 같은 해방감을 느꼈을까. 엄마아빠는 잔소리와 걱정 섞인 말을 꾹꾹 참아가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들에게 하루의 길이는 얼마나 다르게 느껴졌을지, 푸셀의 특별했던 단 하루가 모이고 모이면 어떤 아이로 성장할지 상상했다. 


나에게 푸셀의 하루는 어딘가로 떠나는 특별한 여행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계획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여행. 


이 책을 읽었다고 내가 깊이 반성하고 잔소리를 하지 않을 리는 없다.

나는 참다못해 여전히 내일의 숙제를 읊을 것이고, 그렇게 양치를 안 하다간 신경치료를 하게 될 거라고 말할 게 뻔하다. 


다만 책을 읽는 동안, 그리고 읽은 후에 한동안 나는 푸셀의 마음을 상상했다. 

하루 동안이지만 정신적 모험을 시작하는 대담한 마음 그리고 무사히 엄마아빠 품으로 돌아온 후에 마음을 말이다. 마음은 틀린 법이 없다고 한 누군가의 말이 떠올라서다. 그렇게 마음을 그려보기만 했다. 봄 새순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한 번 더 상상해 봤다. 


세수와 숙제, 학교.... 이 책을 쓴 작가는 아이들의 일상 속 작은 일들을 실오라기처럼 끄집어내어 나에게 단어 하나를 건넸다. 


주인. 

내가 주인이 되는 마음. 


스스로 경험하고 분별하며 커 가는 마음. 세상에 묻혀 들리지 않았던 숲 속 새소리처럼, 내가 귀 기울여야 하는 아이들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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