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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책을 읽는 조건

by 김세인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때였다.

오후 1시 50분이면 학교가 끝났다. 아이는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놀기도 하고, 집에 와서 책을 보기도 했다. 어린 시절, 나는 해가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고무줄놀이를 하고 놀았다. 요즘 아이들은 놀기 전에 서로 몇 시까지 놀 수 있는지 묻는다.


“나는 방과 후 가기 전에 20분.”

“영어 학원 차 올 때까지 놀 수 있어. 30분?”


아이들은 각자 일정에 따라 시간을 계산한다. 실컷 함께 놀 친구는 거의 없었다. 2학기가 되자 나는 이제 아이가 영어 학원에 다니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학원 시간은 월수금 4시 30분. 이동 시간까지 고려하면 집에 들렀다 다시 나가기보다 간식을 사 먹거나 밖에 있다 학원으로 바로 가는 편이 나았다. 6시 20분에 아이는 하원 버스에서 내렸다.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샤워를 하고 나면 금세 잘 시간이 되었다.


두 달쯤 지났을까.

나와 아이는 여전히 영어 학원이 끼어 들어온 일정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아이는 학원을 다니고 싶지 않다고 했다. 영어 공부를 하느냐 마느냐, 엄마가 아이에게 지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영어 학원 수업이 지루해서도 아니었다. 아이가 원하는 일상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집에서 읽은 〈찬란한 시절〉이 내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나를 달래느라고 색종이를 주셨다. 그 빨간빛 파란빛 초록 연두 색깔이 그렇게 화려하게 보이던 일은 그 후로는 없다. …… 유치원 시절에는 세상이 아름답고 신기한 것으로 가득 차고, 사는 것이 참으로 기뻤다. 아깝고 찬란한 다시 못 올 시절이다.


아이가 유치원을 졸업하자 나의 마음은 그새 색종이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일주일 후, 나는 영어학원에 전화했다. 조금 더 크면 오겠다고.


아이의 오후는 자유로워졌다.

인형 놀이를 하다가 또 책을 읽다가 자신이 원하는 일상을 만들어 나갔다. 그림이 예쁜 『소공녀』를 읽고, 『베니스의 상인』을 심각하게 읽기도 했다. 한국사 만화책을 읽으며 장희빈에 분노하다가 몇 분 뒤에 흔한 남매를 보며 킥킥거렸다. 세계여행 만화책 속에 빠져 프랑스로 갔다가 일본으로 갔다가 책 속 여행을 하기 바빴다. 학교 숙제인 독후감은 쓰기 싫어했지만 자신만의 독서 취향을 천천히 탐색해 나갔다.


아이가 책을 읽으려면 먼저 시간이 확보되어야 하는 것 같다.

아이들의 일상은 꽤 바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배움의 연속이며 해야 할 일에 치여 쉬는 시간이 뚝뚝 끊긴다. 시간이 부족하면 정신적인 여유 공간이 줄어들고, 전두엽은 짧은 숏츠가 주는 쾌감을 절제하기 힘들어진다.


초등학교 때 공부를 많이 해놓는다고 이후로 책 읽을 시간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 시절 활성화되는 상상력과 몰입력, 글을 읽는 즐거움을 빼앗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거실을 큰 책장으로 꾸미지는 않았다.

소파 옆 작은 회전책장이 전부다. 컬러감이 돋보이는 빈백을 2개 사서 거실에 놓았다. 사실 나는 공간을 차지하는 큰 물건을 좋아하지 않지만 아이들이 푹신한 소파에서 책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큰맘 먹고 들였다. 그곳이 그들에게 무릉도원이기를 바라기만 했다.


그 바람이 이루어지도록 나는 ‘잔소리 줄임’ 모드를 켰다. 종일 양치부터 방 정리까지 폭풍 잔소리를 늘어 놓지만, 책을 읽어라 마라 말한 적은 없다. 조용히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거실 바닥에 늘어놓기만 했다. 어렸을 땐 똥과 방귀가 나오는 책을 골라 깔깔 웃고, 이순신 장군에 관심을 가질 때면 역사 영웅의 이야기를 가져다 놓았다. ‘읽어볼래’ 라고 권유하기보다는 ‘재밌다더라’라고 말했다. 해리포터라도 재미없다고 덮으면 그만이다. 책을 읽고 있는 시간만큼은 공부하는 수험생이 옆에 있는 듯 존중 모드를 취했다.


풍요보다는 약간의 빈곤 전략도 썼다. 책을 많이 가져다 놓을 때도 있지만 때로는 책장에 빈 공간을 넓혔다. 늘 책의 풍요에서 허우적거리기보다 허기도 느끼길 바랐다. 몇 번이고 더 읽고 싶다는 책만 우리 집 책장 주인으로 들였다.


우리 집 거실에 책 읽는 아이들을 잃지 않기 위해 나는 늘 두 가지를 살핀다. 그들의 일상에 책이 끼어들 수 있는 여유를 그리고 앞으로 수없이 세워야 할 목표를 던지고 그저 책 읽는 시간을 누리기를.

그렇게 책을 계속 만나다보면 자신과 세상을 조금 더 섬세하게 분별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이들의 시간을 먼저 확보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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