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슬이는 집에 오니 삐질삐질 눈물이 나왔다.
단짝 친구인 민송이는 다른 친구와 깔깔거리며 이야기하고 혜슬이는 안중에도 없었다. 집에 오니 회사에 있어야 할 시간에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혜슬이의 등을 토닥이며 실컷 울고 나중에 무슨 일인지 말해달라고 한다. 울지 말라고 야단치지 않고 부드럽게 말하며 기다려주는 엄마. 혜슬이는 그것도 심술이 나 새엄마라 그런가 생각한다.
『셋 중 하나는 외롭다』 속 주인공은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아이, 혜슬이다.
새엄마는 돌아가신 엄마의 친한 동생이었고, 아빠가 다시 결혼한다면 엄마가 되기를 바란 사람이기도 하다. 새엄마는 알뜰살뜰 혜슬이를 챙겨주며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새엄마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 새엄마와 아빠, 혜슬이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단짝 사이에 끼어 들어온 친구와 셋이서 지내기도 심술이 나는데 집에서도 외로워진다. 엄마도, 아빠도, 단짝도 달라진 것만 같다. 혜슬이의 감정 변화를 세세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책은 몇 페이지를 남겨두게 된다.
학교에서 아이의 마음 나눔실 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다고 한 책이다.
새엄마와 재혼한 아빠, 새로 태어날 동생. 아이는 평범하지만은 않은 이 가족의 이야기를 어떻게 읽었을까. 겉으로 보면 모르지만 어쩌면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는 친구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셋이 친한 사이에 어느 날 한 명이 소외되거나 서운하게 되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전개가 뻔한 주말 가족 드라마를 상상하다 10시 월화 드라마를 본 기분이랄까. 혜슬이는 새엄마 뱃속에 있는 동생이 불편하다는 티를 팍팍 내며 아빠와 말다툼을 벌인다. 엄마아빠에게 그렇게 버릇없이 말하고 행동하면 안 된다는 교훈은 없었다. 동화는 혜슬이의 마음을 카메라로 따라가듯 찍고 있었다. 실타래처럼 꼬였다가 풀리는 과정은 너무 우연적이지도 억지스럽지 않았다.
최근에 읽은 동화 속 이야기들이 꽤 스펙트럼이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따로 사는 가족, 다문화 가족,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을 담담하게 그린 책도 있었다.
『내 마음 배송 완료』 속 송이도 엄마아빠의 이혼으로 엄마와 둘이 산다.
엄마는 홈쇼핑에 푹 빠져 산다. 딸 송이는 거의 매일 배달음식을 시켜 먹거나 라면을 끓여 먹는다. 송이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프다고 느낀다. 송이의 엄마가 원래 그랬던 건 아니다. 아빠와 이혼한 후부터 엄마는 달라졌다. 귀찮을 정도로 알뜰살뜰 송이를 챙기던 엄마의 모든 관심은 홈쇼핑에서 사는 물건으로 변해버렸다.
어느 날, 엄마가 즐겨보던 홈쇼핑 채널을 돌리려던 차에 쇼호스트는 송이에게 말을 걸어온다. 7D 안경을 쓰면 원하는 것은 다 존재하는 쇼핑의 세계로 올 수 있다고. 쇼핑의 판타지가 시작된다. 마음에 안 드는 엄마를 팔 수 있는 방송이 나왔다. 송이는 완판 직전이라는 자막에 마음이 급해져 홈쇼핑에 전화를 건다. 엄마를 판다고.
내가 예상한 시나리오는 엄마가 떠난 후 송이가 불편함을 느끼거나 엄마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다르게 흘러갔다. 미운 엄마를 홈쇼핑에 팔아버리면 얼마나 통쾌할까. 내 입장에서 생각하니 섬뜩하고, 아이 입장에서 생각하니 재밌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잠자리에서 책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내 마음 배송 완료』 읽었다. 처음엔 몇 장만 읽으려고 했는데 읽다 보니 재밌더라고.”
“그치 재밌지? 처음엔 재미없는 거 같은데 계속 읽게 돼. 송이 엄마는 좀 이상해. 밥도 잘 안 차려주고.”
“송이 엄마도 스트레스가 있었던 것 같아. 아빠랑 헤어지게 됐고, 하루 종일 일하고 늦게 들어오니까. 엄마도 별거 아닌데 화낼 때 있잖아.”
“사실 나도 엄마가 미워서 속으로 나쁜 말할 때 있었어. 미안해. 크크.”
아이의 솔직한 말에 홈쇼핑에 팔 생각은 안 해줘서 고맙다고 말해야 하나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순간 고민했다.
아이와 나는 각자 베스트 장면을 꼽았다. 나는 엄마가 팔려가는 데 송이가 모른 척하는 장면이 웃기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아이는 엄마가 다시 반품돼서 돌아오는 장면이 재미있었다고 했다. 반품되는 대신 다시 송이가 팔려가는 장면이 분했다고도 했다.
로얄드 달이 지은 동화도 아니고, 한국 작가가 쓴 동화가 이렇게 엄마를 팔아버리다니. 나는 어린 시절, 이런 동화를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때는 창작동화가 별로 없었다. 몇몇 동화를 읽으며 내가 생각하는 아름답고 순수하며 엄마가 해 줄 잔소리를 대신해 줄 거라고 믿었던 동화의 세계가 뒤집어졌다.
현실은 엉망인데 동화 속 서사는 백설공주를 그리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인터넷 세계에서는 딥페이크 범죄가 성행인데 동화에서는 엄친아만 나올 수는 없었을 테다. 아동문학도 뒷짐 지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을 거다.
엄마를 파는 것보다 나에게 더 큰 반전은 동화라는 원 가운데에 온전히 ‘아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진정한 주연이었다.
주연은 주체성을 중요한 무기로 가지고 조연 자리로 밀려나지 않았다. 가르치려 들거나 성장하라고 다그치거나 자신의 방식으로 규정하려는 어른들은 동화 속에서 오히려 혼쭐이 났다. 아이들의 관점에서 내가 속한 어른의 세계를 바라보니 민망할 때가 많았다.
『어린이라는 세계』를 쓴 김소영 작가는 아이들에게 ‘나라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이니 뭐니 하는 말을 자제하면 좋겠다고 말한다. 어린이는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을 위해 살아있다고. 그러니 나라는 오늘부터 어른들이 잘 짊어지자고.
당황했던 동화의 반전이 조금씩 반가워졌다. 세상에 수많은 아이들이 미래를 위해 존재하는 ‘어린이’가 아니라 지금 그대로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이끄는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길 바란다.
동화 속 많은 인물들이 그 길을 응원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