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모임에 나간 지 5년쯤 되어간다.
그동안 모임 장소도, 사람들도, 책 취향도 바뀌곤 했다.
독서 모임이 아니었다면 혼자서는 『노인과 바다』만큼 매력적인 헤밍웨이의 단편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시도 잘 안 읽는 사람이 알레고리의 뜻을 이해하려 황현산 선생님의 평론집을 수험생처럼 공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적분을 포기할 때 같이 놓아버린 과학도 문외한이 된 지 오래라 『코스모스』를 읽을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중국작가 위화의 따뜻함도,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매력도, 박완서 작가의 찌릿찌릿한 글맛도 몰랐을 것이다.
물론 모임 전날까지 책을 다 읽지 못해 허겁지겁 눈만 따라가고는 다 읽었다고 한 적도 많고, 어렵고 두꺼워 다 씹어먹지 못한 책도 많다.
아이들과 책을 읽을 때도 아쉬울 때가 있다.
우리나라는 어찌나 만화책을 잘 만드는지 읽어도 읽어도 끝없이 만화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흔한 남매』를 이제 다 읽었다 싶으면 무인도, 빙하, 사막에서 살아남기 시리즈가 나오고, 『급식왕 Go』 신간이 나온다. 다음 달엔 다시 흔한 남매 신간이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책을 고르는 일부터 책과 관련된 모든 것은 그들의 자유에 맡기지만 때로는 더 좋은 책을 함께 읽고 싶을 때가 있다.
모임 전날, 아직도 읽을 페이지가 많이 남을 때 나는 황급히 아이들을 재우기 작전에 들어간다. 그런 날은 유독 아이들이 책을 읽어달라고 한다. 그럴 때 나는 머리를 굴린다. 엄마가 내일까지 읽어야 하는 책인데 한 번 들어보겠냐고 말이다. 아주 흥미로운 내용인 것처럼 거짓말과 과장을 조금 보태기도 한다.
“어떤 동물 농장이 있었어. 돼지, 개, 말, 새끼 오리... 동물들이 많았지.
그중에 꽤 똑똑한 돼지가 있었는데 이름은 메이저였어. 메이저는 동물들에게 연설을 자주 했어. 동물들이 얼마나 굶주리고, 힘들게 일하고, 고통받는지.
그게 바로 동물들의 적, 인간 때문이라는 거지.
어느 날 주인이 술을 마시고 들어오더니 행패를 부리는 거야. 동물들을 채찍질하고 말이야. 동물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폭동을 일으키기로 했대.”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동물들이 복수를 했어?”
“엄마도 거기까지만 읽어서 잘 몰라.”
“아니, 내일이 독서모임이라며 그것밖에 안 읽으면 어떡해 엄마. 궁금하니까 얼른 읽어줘.”
그렇게 내 책을 읽다 보면 아이들은 귀를 쫑긋하고 듣다가 어느새 코를 골곤 했다. 다음 날, 4학년인 딸은 읽어볼 만하겠는지 어제 읽은 책을 달라고 한다.
『침팬지 폴리틱스』도 그랬다.
독서모임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다가 세계적인 영장류 학자 드 발 교수의 침팬지 책이 물망에 올랐다. 다들 호기심에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선정한 책이다. 엄마의 게으른 책 읽기 때문에 또다시 아이들에게 미끼를 던졌다.
침팬지의 세계에서도 권력자에게 인사를 꾸벅하는 모습이 웃겼다고 말하자 아이들은 바로 그 부분을 읽어달라고 했다. 아이는 책을 학교에 가져갔다가 친구들이 침팬지 책을 읽는다고 놀렸다고 했다. 관심 가는 일부 몇 페이지만 읽었지만 아이는 어른 책을 읽었다는 약간의 자부심 같은 것도 느끼는 듯했다.
어느 날, 나는 『총균쇠』를 읽어봐야겠다고 결심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봤다.
정말 두꺼웠다. 유명한 책이라 그런지 사람 손이 많이 타서 너덜너덜했다. 몇 장 넘겨봤지만 도저히 혼자 읽어질 것 같지 않았다. 독서모임에서는 이미 읽은 사람이 있어 함께 읽을 수가 없었다. 『안나 카레니나』처럼 재밌는 소설도 두께에 압도되는데 총균쇠는 1,2,3권을 다 합쳐놓은 정도 같았다. 도서검색을 하다가 『10대를 위한 총균쇠 수업』도 있었던 기억이 났다. 이거라도 읽어봐야겠다 싶었다.
낮에는 책 읽을 시간이 있으면서도 내내 안 읽다가 잘 때만 되면 왜 못 읽은 책이 아쉬워지는지 모른다. 문장이 짧고 친절한 문체라 아이들도 함께 읽어도 되겠다 싶었다.
첫 문장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나라는 미국입니다’인데 퀴즈로 바꿨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나라는 어디일까요?”
별별 나라가 다 나왔다. 그다음부터는 안 시켜도 집중 듣기다. 그렇게 이삼 주 동안 저녁마다 총균쇠 책을 읽었다. 마지막 즈음에 가서는 흥미도가 떨어져서 끝까지 다 읽지는 못했다. 인류의 문명사를 탐독해 보려는 나의 시도는 시작부터 겁내느라 못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읽은 총균쇠 수업 책을 읽는 기회를 얻었다.
짧고 재미있는 책은 쉽게 손이 가지만 어렵거나 깊이 있는 책은 웬만한 독서근력이 없면 혼자 읽기가 쉽지 않다. 나는 아이들의 독서에 자극이 되고 싶다 싶을 땐 잠자리 독서를 이용한다. 낮에는 숙제하라고 잔소리하느라, 아이들은 만화책을 읽느라 책에 대해 호기심과 도전의식을 자극할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하다.
침대에 누우면 몸과 뇌가 이완된다. 그럴 때 잠깐 오디오북이 되어주면 아이들은 이완상태로 자신이 평소 읽는 수준보다 약간 더 높은 독서를 즐겼다. 형아랑 언니들이 읽는 책이라 약간 어려울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수학 선행은 못해도 독서 선행을 하고 있는 느낌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