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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인 Oct 24. 2024

풍선 터뜨리기

엄마도 같이 읽어볼까

도서관에서 문자가 왔다. 

따끈따끈한 신간 도서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이다. 


오늘은 어떤 책들이 들어왔을까. 집 근처에 큰 도립도서관이 있지만 나는 아직도 예전에 살던 동네에 있는 도서관으로 발길이 향한다. 초등학교 맞은편에 있는 작고 아늑한 어린이 도서관이다.  


나에겐 친정 도서관 같은 곳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그림책을 빌려 나르곤 했다.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나는 사서 선생님과 눈인사를 주고받는다. 선생님은 내가 책을 못 찾고 있는 눈치면 조용히 뒤에서 출력한 종이를 달라고 하신다. 아이들이 읽기 좋은 책을 추천해주시기도 한다. 


오늘 새책 코너에는 두 여자 아이가 도복을 입고 있는 책이 눈에 띄었다.

제목은 『설전도 수련관』. 마침 아이들이 태권도를 배우고 있는 중이라 반가워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씨 크기도 적당하고 중간중간 그림도 많아서 저학년이 보기에 부담스럽지 않아 보였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책과 함께 대출했다. 만화책을 끼워주는 건 엄마의 서비스. 


거실에 있는 회전 책장에 빌린 책들을 꽂아두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엄마의 서비스에 만족하는 듯 제일 먼저 만화책을 집어든다. 달고나를 다 먹은 후에 아쉬운 마음에 다른 건 없나 하는 느낌으로 아이들은 다른 책들도 훑어본다. 매력적인 제목에 이끌려 몇 페이지 읽어봤다가 던지는 책도 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했던 『고양이 해결사 깜냥이』 3권도 태권도 이야기였다. 『흰 띠가 간다』는 친척 동생에게 맞고는 씩씩거리며 합기도를 배우러 가는 한 남자아이의 이야기였다. 『설전도 수련관』도 아이들 관심을 끌만 했다. 나의 예상대로 딸은 책을 펼치고 단숨에 끝까지 읽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책장을 덮으며 생각보다 재밌다고 했다. 


다음 날, 둘째 아이가 같은 책을 들고 와서 말했다.


“엄마, 이 책 읽자!”

“응. 어서 읽어봐. 누나가 그거 재밌대.”

“엄마가 읽어줘야지. 나 아직 이런 책 못 읽잖아. 크크.”

‘난 네가 만화책을 읽어달라 할 때도 무섭지만 동화책을 들고 올 때가 더 무섭다.’

“태권도 이야기 나오잖아. 빨리.”


책을 펼쳐보니 140페이지였다. 몇 페이지만 읽어주면 지루해지든, 혼자 읽든 하겠지 생각하며 마지못해 읽어주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초등학교 4학년 여자아이, 나윤이었다. 

이야기는 나윤이가 혼자 침대에 누워 이불을 마구 걷어차며 짜증 내는 장면으로 시작했다. 세아라는 친구도 등장했다. 둘은 거의 매일 나윤이네 집에 와서 함께 노는 친한 사이였다. 세아는 중학생 언니와 말다툼을 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말을 잘했다. 나윤이는 분명 세아가 잘못했는데도 이상하게 이야기하다 보면 자기 탓으로 돌아오는 상황을 반복해서 겪고 있었다. 세아는 다짜고짜 화를 내고, 비꼬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윤이의 입은 얼어붙었다.  


문득 나의 초등학교 시절 친구가 떠올랐다. 

세아처럼 대차고 야무진 친구가 있었다. 부모님이 바쁘셔서 나를 포함한 여러 친구들이 학교가 끝나면 그 집에 드나들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나에게 전화해서 반장선거 때 누굴 뽑을 거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은근히 한 친구를 뽑지 말자고 유도했다. 아마 나는 그 의견에 동의했던 것 같고, 얼마 뒤 친구들 무리가 스피커폰으로 내 말을 듣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악한 행동에도 그 친구는 당당했고, 울고 있는 건 나였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 느꼈던 생생한 나의 감정이 떠올랐다.


발차기와 몸싸움 놀이를 기대했던 아들은 칼싸움을 하러 떠나고 나는 계속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작가는 여자 아이들 세계의 미묘함을 잘 포착해서 표현했다. 

말, 섬세한 뉘앙스와 톤까지도 중요한 그들의 대화. 


“엄마, 태권도 이야기 나왔어?”

“음.. 이제 나오는 거 같아.”


나윤이는 ‘설전도 수련관’이라는 곳에 도착한다. 

사범님은 분명 도복을 입고 검은띠를 매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품새와 발차기가 아니라 말싸움을 배우는 곳이다. 눈 부릅뜨고 위아래로 상대를 훑기, 말꼬리 잡고 늘어지기, 흥분하지 않고 천천히 호흡하기 등의 기술도 배운다. 하얀 띠를 맨 나윤이가 하얀 벽뿐인 방에 들어가면 파란 풍선이 내려온다. 기합을 지르며 풍선에 적힌 말들을 내질러야 한다. ‘그만해, 왜 나한테 짜증이야, 너나 잘해’ 같은 말들을 크게 지를 때마다 풍선이 터진다. 띠 색깔이 바뀌는 동안 나윤이가 겪는 변화 그리고 세아와의 갈등이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한다. 


나는 책을 읽으며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던 나윤이었던 나를 기억했고, 풍선을 터뜨리며 복수하는 어린 나를 상상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으로는 정확하게 상황을 분별하기 어려웠다. 그때는 내가 친한 친구와 사이가 멀어지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으니까. 선생님과 부모님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부분이 있었다.      


세아도 달라졌다. 나에게 다정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다.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나도 조금은 달라졌다. 말랑말랑 젤리 같던 마음이 조금 단단해진 것 같았다.     


세아도 나윤이도 조금씩 변해갔다. 초등학생들이지만 그들이 겪어내고 풀어가는 인간관계가 인상적이었다. 

동화는 친구끼리의 싸움도 ‘동화적’으로 그릴 줄 알았다. 어린이들의 이야기니까. 나의 착각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이야기보다 훨씬 더 리얼했다. 아이들의 내적 성장이 판타지를 빌려 그려져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당시 내가 이 책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의 행동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더 일찍 깨닫지 않았을까. 친구의 비위나 기분을 맞추고 그 상황을 넘기곤 했던 내 마음이 덜 혼란스럽지 않았을까. 한때 인기를 끌었던 『무례한 사람에게 대처하는 법』에 열광하는 어른들이 줄어들지 않았을까. 당장 마음이 단단해지지는 않았더라도 책 속 인물들의 감정선을 읽으며 나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니구나 하고 위로를 받았을 것 같다. 마음이 후련해졌을 테다.


주변 친구에게 일어날 법한 또는 내가 겪는 갈등이나 상황을 다루는 픽션을 읽은 아이의 세계는 어떨까. 그 세계는 홀로그램이나 책 속이 아닌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까. 이런 동화를 읽으며 자신을 연극 속으로 들여보내 본 아이들은 파란 풍선도,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풍선도 터뜨리게 될까.  아동 문학세계가 더욱 궁금해졌다. 


나는 어린 나를 떠올렸고, 다시 아이 앞에 펼쳐질 친구들과의 세계를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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