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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인 May 23. 2024

그날따라 긴긴 수다

엄마도 같이 읽을까

“엄마, 내가 말한 책 읽었어?”

“응. 재밌어서 아껴 읽는 중이야.”

“재밌지? 그거 말이야. 한자 ‘바를 正’ 자가 하나씩 사라지는데...”

“안돼 안돼. 미리 알려주면 반칙이야.”


나는 귀를 막았다.

아이는 나의 그런 모습이 재밌었는지 키득거리며 계속 말했다. 엄마보다 자기가 먼저 읽은 책에 대해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것 같았다. 진심이었다. 나는 그 책을 꽤 신나게 읽고 있던 중이었으니 스포일러는 막아야 했다.


“엄마, 근데 이상하게 제목만 보면 재미없을 것 같은 책이 내용은 재밌더라. 그 책도 재미없게 생겼잖아.”




아이가 두 번째로 나에게 추천한 책 제목은 『노잣돈 갚기 프로젝트』다.

아이 말대로 제목이 그렇게 끌리진 않는다. 아이들은 아마 노잣돈이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를 것이다. 하지만 첫 장을 펼치면서부터 마치 드라마의 예고편처럼 흡입감 있게 빨려 들어간다.


주인공 동우는 초등학교 6학년 남자아이다.

동우는 등굣길 문구점 앞에서 같은 반 친구 준희에게 돈을 빌리려고 쫓아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사실 말이 빌리는 거지 동우는 그런 식으로 종종 준희의 돈을 뺏곤 했다. 동우는 일어나 움직여 보지만 친구의 뒤통수를 때리려는데 손은 뒤통수를 통과하고 비명을 질러도 듣는 이가 없다. 그렇게 동우는 저승사자에게 끌려가게 된다.


다행인 건 사주와 이름이 같은 다른 아이의 운명이 실수로 동우와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동우는 다시 이승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돌아가려면 노잣돈이 필요하다. 그것이 저승의 법칙이다. 저승사자는 곳간에 좋은 일을 쌓아놓은 게 없는 동우에게 노잣돈을 빌려준다. 단 49일 안에 갚아야 한다. 가까운 사람에게.


동화는 동우가 다시 저승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노잣돈을 갚는 49일간의 이야기를 그린다.

초반부를 읽을 때는 무슨 아이들 동화에 저승사자며 노자장부가 나오나 했다. 그러다 염라대왕이 쓴 노자장부와 불쑥불쑥 나타나는 저승사자와 친숙해지며 나는 혼자 피식피식 웃었다. 나는 원래 판타지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상하게 이 책에서는 저승이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학교폭력에 대해 철저히 교육받는 요즘 초등학생들에게 동우는 의심의 여지없이 학교폭력 가해자다. 동우는 약간 허세를 부리기도 하고 자기보다 약한 아이에게는 함부로 대하기도 하는 아이다. 동우가 노자를 갚아야 하는 대상은 준희. 준희는 반 아이들에게 찌질이라 불리며 친구들의 심부름을 대신해줄 때가 많다. 그런 준희에게 동우는 떡볶이 값을 내게 하거나 휴대폰을 빌려 데이터를 쓰곤 했다.


스토리가 꽤 탄탄했다.

다음 내용이 궁금해 계속 읽게 됐다. 친구들 간의 주먹질, 부당한 일을 둘러싼 심리적 긴장감, PC방과 SNS, 담임 선생님에게 혼나는 일상... 남자아이들 세계를 그리는 장면들이 현실적이었다. 책 속의 인물들은 아이들에게 해리포터가 아니라 우리 반에 있는 누군가를 보는 느낌일 것 같았다.


학교폭력을 둘러싼 장면에서 나는 심각했다가 담임선생님이 혼내는 장면에서 크크크 거리며 웃었다가 저승사자가 불쑥불쑥 나올 때는 놀랐다가 마지막에는 감동했다가...


나의 흥분을 전할 사람이 필요했다.

“딸, 엄마 책 다 읽었는데 진짜 재밌더라.”

“그렇지? 그런데 밤에 읽으면 무서워. 저승사자 때문에.”

“하하. 그래. 저승사자 나올 때 엄마는 재밌던데. 동우가 누구한테 말도 못 하고 얼마나 힘들었겠어. 엄마는 동우가 준희에 대해서 메모하는 장면들이 감동적이었어. 준희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준희를 도와줄 방법들.. 물론 노자를 갚아야 되니 할 수 없이 그런 거긴 하지만. 짜증 내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준희를 위하게 되잖아.”

“맞아. 준희는 고기를 안 좋아해서 급식 때 나오는 돈가스도 안 먹어. 축구는 싫어하고 앉아서 책 읽는 걸 좋아하니까 친구들이 찌질이라고 해. 참, 준희는 고양이를 좋아해.”

“응. 고양이 덕분에 준희가 마음을 연 것 같기도 해.”


“그런 것 같아. 지난번에 네가 동우가 나쁜 애인 것 같다고 했잖아. 근데 엄마가 돌이켜보니까 엄마도 친구한테 나쁜 행동을 한 적이 있었더라고. 엄마랑 친한 두 친구가 있었어. 그중에 한 명이랑 더 친했거든. 피아노 학원에서 덜 친한 친구의 신발을 숨겨놨어.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장난이긴 했지만 동우랑 성재를 보니까 그때가 생각났어.”

“진짜? 엄마가 그랬단 말이야? 나빴네. 저번에 승재가 지우를 때렸거든. 담임 선생님이 승재를 엄청 혼내서 승재가 우는데 불쌍하기도 했어.”

“그랬구나. 승재가 그럴 애가 아닌데 왜 그랬을까. 그래도 혼날 일이 있으면 혼나야지. 지우도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


“사실 나도 요즘 서연이한테 좀 미안했어. 예나랑 셋이 친한데 예나랑 나랑 둘이 서연이가 자주 삐진다고 안 좋은 점을 말하기도 하고 그랬거든. 서연이한테 선물 하나 사줘야겠어.”

“셋이 친하니까 질투 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그러겠다. 엄마는 동우가 전에는 준희 돈을 자주 뺏고 괴롭히기도 했지만 노잣돈을 갚으려고 애쓰면서 점점 변하는 모습이 좋았어. 준희가 좋아하는 고양이를 살펴보는 것, 다른 친구들이 준희를 괴롭히려 할 때 지켜주는 것,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엄마도 노잣돈을 갚는다면 가장 가까운 사람 중 누가 있을까 생각하게 됐어.”


“누구?”

“지연이 이모. 엄마는 이모한테 받은 게 훨씬 많은 거 같아. 이모가 몸이 약해서 자주 아프고 외로워하는데 엄마는 뭘 해줄 수 있을까 생각이 들더라.”     




딸은 평소에 학교생활에 대해 쫑알쫑알 이야기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날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학교에서 일어난 일들을 술술술 이야기했다. 주변 친구들,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 담임 선생님의 반응, 자신의 감정까지 그렇게 많은 말을 한 건 처음이었다.     


책 속의 저승사자에게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커가면서 선생님과 부모님 외에도 다른 많은 어른들과 친구들을 만날 것이다. 돈으로만 해결되지 않는 일에 맞닥뜨릴 때, 분별력이 필요할 때 어디를 바라봐야 하는지 망치가 되어주는 저승사자 같은 존재가 필요할 것이다.   

   


‘첫사랑 동화’ 같다고나 할까.

동화를 읽는 나는 서툴렀지만 푹 빠져 읽었다. 나에게 이 책은 또 다른 동화도 펼칠 수 있게 해 주었다. 축구공을 가지고 정신없이 달려가는 남자아이들을 보며 동우를 떠올리게 했다. 아이들의 실수와 폭력에 민감해진 이 사회에서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지 생각하게 했다.      


재밌는 책은 아껴보고 싶다던 아이는 친구의 생일에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나와 아이는 동우와 준희의 이야기를 공유했다. 아이와 친구도 그럴 것이다. 돈으로 갚을 수 없는 그 무엇들, 우정과 상처, 관심과 관계, 생명과 치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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